RM이 반한 ‘이 남자’ 얼굴...40년 가까이 숨겨진 이유 [나를 그린 화가들]

정유정 기자(utoori@mk.co.kr) 2024. 4. 1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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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1940년대, 개인소장.
올해 60회를 맞는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한국의 근대 화가 이쾌대의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이 걸립니다. ‘이방인은 어디에나(Foreigners Everywhere)’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비엔날레에서 1940년대 이쾌대가 스스로 그린 얼굴이 전 세계에 공개되는 셈이죠. 이쾌대의 자화상 드로잉은 방탄소년단의 RM이 감상한 후 인증샷을 찍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다시 이쾌대의 대표작 중 하나인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을 보겠습니다. 화면 중앙에는 이쾌대가 우뚝 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팔레트와 붓을 든 모습에서 화가라는 자의식이 강하게 드러나죠. 당당한 자세로 서있는 그는 어떤 그림이라도 그릴 수 있다는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뚜렷한 이목구비, 부릅 뜬 눈과 굳게 다문 두터운 입술, 진한 눈썹이 그의 의지를 느끼게 합니다. 두루마기의 청색은 원색처럼 강한 빛을 발하며 지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4월 방탄소년단 RM이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이쾌대의 자화상 ‘드로잉 2-1’. <RM 인스타그램>
‘조선의 것’에 몰두한 이쾌대
이쾌대는 이 그림에서 서양화가인 동시에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그림에 전면에 드러냅니다. 그는 서양식 중절모를 쓰고 있는 동시에 푸른색 두루마기를 걸치고 있습니다. 팔레트에는 유화 물감이 발라져 있는데 그가 들고 있는 붓은 동양화의 모필(毛筆)입니다. 이쾌대가 실제로 그림을 그릴 때 동양화 붓을 사용한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배경은 평화로운 시골 마을로 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속 배경을 연상시킵니다. 밝은 분위기처럼 보이지만 이쾌대는 자못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혼란한 사회 분위기 속 작가의 고민이 엿보입니다.

이쾌대, ‘자화상Ⅱ’, 1942, 개인소장.
또 다른 자화상을 보겠습니다. 이번 작품은 이쾌대가 얼굴을 집중해서 그린 그림입니다. 이쾌대는 이번 그림에서도 앞을 뚜렷하게 응시하고 있습니다. 몸을 흐릿하게 표현했으나 한복 저고리를 입고 있죠. 배경에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모티브로 한 말 문양이 그려져 있습니다.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에 이어 전통에 대한 관심과 민족의식이 드러나 있습니다.

이쾌대는 1913년 경북 칠곡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서울 휘문고보를 졸업한 후 일본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웠습니다. 귀국 후 이중섭, 최재덕 등 일본 유학생 출신 화가들과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한국적 감성의 서양화를 선보였습니다.

윤범모 가천대 명예교수는 “이쾌대가 활동했던 신미술가협회는 전쟁을 예찬하지 않고 징병제나 정신대를 이끈 군국주의에 부화뇌동하지 않았다”며 “이쾌대 또한 ‘조선적인 것’을 화면에 담으려 민족의식을 주요 화두로 삼아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쾌대, ‘이여성’, 1940년대, 개인소장.
이쾌대는 친형인 독립운동가 이여성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그림은 이쾌대가 12살 위 형인 이여성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여성은 중국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1930년에 귀국했습니다. 동아일보에서 사회부장을 역임하고 복식 연구가, 한국화가, 미술사학자로 활동했습니다. 그림 속 이여성은 한복을 입은 채로 개다리소반에 턱을 괴고 앉아 책을 보고 있습니다. 노란 바닥, 붉은 소반, 푸른 저고리와 배자 등 밝고 명쾌한 색채가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주체적인 여성을 담다
이쾌대의 작품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부인 유갑봉입니다. 아내를 향한 그의 사랑은 각별했습니다. 이쾌대는 여성을 그릴 때마다 부인의 얼굴과 몸매를 조금씩 변형해 표현했습니다. 잡지 표지화를 의뢰받았을 때도 밝고 화사한 부인의 얼굴을 그려 보낼 정도였습니다. 유갑봉은 이쾌대에게 뮤즈였던 셈이죠. 유학 생활을 마무리할 무렵 이쾌대는 부인의 초상을 그리면서 그림 한쪽에 유갑봉의 이니셜인 ‘K.P.R.’을 적으며 ‘나의 할 일은 이것. 어떤 장애물이 와도 오직 그 길뿐’이라고 적으며 아내에 대한 사랑을 다짐했습니다.
이쾌대, ‘카드놀이 하는 부부’, 1930년대, 개인소장.
‘카드놀이 하는 부부’는 이쾌대가 자신과 부인의 모습을 폴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을 패러디해 그린 작품입니다. 세잔을 좋아했던 이쾌대가 그를 오마주한 것으로 보입니다. 휘문고보를 졸업하던 해 이쾌대는 유갑봉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일본에 가 아내와 머무는 동안 신혼 생활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림 속 부부의 얼굴은 붉게 상기돼 있습니다. 카드를 꼭 쥐고 있고, 옆에는 마시다 만 술병이 있네요. 다만 무표정하게 앞을 보고 있어 미묘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이쾌대, ‘2인 초상’, 1939, 개인소장.
그림을 얼핏 보면 여성만 보이지만 ‘2인 초상’이라는 제목처럼 자세히 살펴보면 여성 뒤에 그림자처럼 한 남성이 있습니다. 이쾌대가 아내를 강조해서 그린 부부 초상화입니다. 붉은색 저고리를 입은 부인은 화면을 응시하고 있죠. 이쾌대는 자기 자신을 실루엣으로 처리해 희미한 어둠 속에 윤곽만 두드러지게 그렸습니다. 부인을 주인공으로 설정해 아내에 대한 신뢰와 존경을 드러낸 것이죠.

이쾌대가 그린 작품 속 여성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강단 있는 표정을 짓거나 골똘히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여성을 가냘프거나 연약하게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응시하는 주체적인 인간상을 나타낸 것이죠.

김예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이쾌대의 그림에서는 단단한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거나, 주변의 혼란에 동요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는 여성이 자주 발견된다”며 “여느 여성 인물화처럼 단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존재이거나 수동적으로 감상되는 모습이 아니라 확고한 의지를 가진 인간상으로 그려져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이어 “처음에는 부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에서 시작했지만, 점차 조선의 전통적인 여성의 모습을 표현했고, 여기서 더 나아가 자신의 운명을 직시하고 극복해나가는 강인한 민족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다”고 평가합니다.

이쾌대, ‘무희의 휴식’, 1937, 개인소장.
‘무희의 휴식’은 이쾌대가 제국미술학교 5학년이던 1937년 학내 그룹전인 로쿠호샤 전람회에 출품한 작품입니다. 무용수가 단장을 마치고 곧 있을 공연을 기다리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단단한 눈빛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어 결의에 찬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녹색 원삼, 색동 한삼, 녹색 화관은 전통적인 궁중 무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쾌대, ‘상황’, 1938, 개인소장.
‘상황’이라는 이 작품은 무희를 중심으로 노파, 젊은 남자, 노파, 벌거벗은 여인 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릇이 깨져 있고 화려한 패물도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상황인지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이 그림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겪는 수난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많이 제기됐습니다.
이쾌대, ‘봄처녀’, 1940년대, 개인소장.
‘봄처녀’에선 부드러운 명암법을 사용해 인물의 양감을 표현했습니다. 주인공인 여성이 곱게 땋은 머리를 두 손으로 만지면서 먼발치를 바라보며 서 있습니다. 언뜻 보면 수줍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성은 당당한 자세로 서 있고 명확하게 한 곳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걸어 나가는 듯한 동작은 이쾌대 특유의 주체적인 여인상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해방 전후 이쾌대가 소망한 것은
이쾌대는 해방 직후부터 ‘군상’ 연작 제작에 몰두했습니다. 2m가 넘는 큰 화폭에 30여 명의 사람이 그려진 연작은 당시 보기 드문 대작이었죠. 벌거벗은 인물들을 통해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실존성을 강하게 부각했습니다. ‘한국의 미켈란젤로’라고 불리는 이쾌대의 인체 묘사력과 해부학적 지식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쾌대, ‘군상Ⅰ-해방고지(解放告知)’, 1948, 개인소장.
이 그림의 제목 ‘해방고지’(解放告知)는 말 그대로 ‘해방을 알린다’는 뜻입니다. 해방 소식을 전하는 두 여성이 왼편에서 달려오고 있습니다. 오른쪽 아래에는 죽은 사람들의 시체, 뒤엉켜 싸우는 이들이 보입니다. 그들의 위에는 해방 소식을 듣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해방을 직시하는 인물은 두 세 명에 불과하지만, 이들이 표정에 굳건하고 기운찬 의지가 느껴지지 않나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 군상은 삼각형 구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각각 과거와 현재, 미래의 상을 암시합니다.

이 작품에는 질서가 없는 모습 속 해방기의 혼란스러운 사회상이 반영돼 있습니다. 일제 하에서 고통받던 민중들의 모습을 암시하며, 민족의식과 사회 질서를 촉구하는 작가의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이쾌대, ‘군상 Ⅳ’, 1948년 추정, 개인소장.
‘군상 Ⅳ’는 이쾌대가 제작한 군상 중에서도 비교적 나중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입니다. 전통적 서화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펼쳐지며 작품 내용을 전개하는 점을 참고하며 보면 도움이 됩니다. 서양화지만 두루마리 그림의 전통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구성한 셈입니다.

어두운 하늘엔 섬광이 요동쳐 긴박감을 주고 있습니다. 오른쪽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서로 물어뜯고 무거운 돌로 내리치며 싸우는 이들도 보입니다. 반면 왼쪽에 서 있는 사람들은 결연한 의지를 다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화면 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습니다. 작가가 희망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 아닐까요. 해방공간의 혼란 속에서 밝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담은 그림입니다. 전통과 현대, 평화와 갈등, 과거와 미래 등 해방기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1948년 제2회 조선미술문화협회 전람회장에서 자신의 작품 ‘군상 I-해방고지’ 앞에선 이쾌대. <국립현대미술관>
이쾌대의 작품은 해외에서도 명성을 얻고 있지만, 그의 이름 석자를 공식적으로 부를 수 있게 된 건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1953년 휴전이 된 후 포로 송환 때 북한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1988년 월북 작가 해금 조치가 단행되면서 이쾌대는 대중에게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그에게는 ‘월북 화가’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공교로운 것은 이쾌대가 북한에서도 금기시됐던 작가라는 점입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쾌대는 병환 중인 어머니와 만삭인 부인을 두고 피난을 가지 못했습니다.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한 후 이쾌대에게 공산 치하의 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하라고 강요했죠. 이쾌대는 김일성,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강제 부역을 합니다. 이후 9월 28일 국군이 서울을 탈환하자 이쾌대는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수감됐습니다.

이후 포로 송환 때 이쾌대는 돌연 북한을 택합니다. 그 이유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쾌대는 앞서 1946년 북한 미술계를 시찰하고 돌아온 후 북한 화가들이 새로운 미술을 건설하긴커녕 정치가들의 초상화를 그리거나 정치 포스터를 그리는 등 선전미술만 몰두하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다만 그의 형 이여성이 1948년 월북을 감행해 남한에서의 입지가 불안했거나, 포로수용소에서 생존의 위협을 느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여성은 이후 북한에서 김일성의 정책을 비판하다가 1958년 종파분자로 숙청됐습니다. 이쾌대 역시 공개적인 거론이 금지됐습니다. 남·북한 양쪽에서 금기 화가로 낙인찍힌 셈입니다. 이쾌대는 1965년 위 천공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987년 사망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쾌대, 1947년 가족을 드린 그로잉. “47.12 우리집 식구 일제히 일어나서 기념 촬영을 하다”라고 써 있다.
오늘날 이쾌대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이유는 그의 부인 유갑봉 여사가 작품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이쾌대가 북한으로 떠난 후 남겨진 가족들은 월북작가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감시와 고초를 겪었습니다. 집 주위에는 사복경찰이 맴돌았고, 유 여사는 경찰에 불려 가 가혹한 조사를 받았습니다. 유 여사는 그림들을 다락방에 숨겨서 보관했습니다.

이쾌대는 포로수용소에 있던 시절 물건과 그림을 팔아서라도 아이들을 먹이라고 당부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거금을 제시하며 남편의 작품을 사려는 컬렉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 여사는 삯바느질하며 자식을 키웠습니다. 생계를 어렵게 꾸려나가면서도 남편의 작품을 고스란히 지켜낸 것입니다.

미술학도 양성…해부학 교재 직접 제작
이쾌대는 후학을 양성하는 데도 힘썼습니다. 1947년 성북회화연구소를 정식으로 개소합니다. 이곳에선 ‘물방울 화가’로 알려진 김창열을 비롯해 조각가 권진규, 조각가 전뢰진, 도예가 황종례 등 한국미술의 대가들이 배출됐습니다.
서울 돈암동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그리는 이쾌대. <국립현대미술관>
그는 1951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도 수용소에서 만난 이주영(당시 17세)에게 인체 그리는 법을 가르쳐주기 위해 ‘미술해부학 노트’를 제작했습니다. 38페이지의 노트는 전신 비례에서부터 시작해 골격과 근육의 명칭, 역학을 익힌 후 안면의 구조와 표현 효과 등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구성됐습니다.

이쾌대는 식민 통치와 해방 후 분단 상황에서 민족의식과 시대정신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반영해왔습니다. 다만 월북 화가라는 이유로 이쾌대의 삶과 작품 세계를 입체적으로 보는 시도는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40년 가까이 꼭꼭 숨겨졌던 자신의 자화상이 베니스 비엔날레에까지 걸린다는 사실을 알면 이쾌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이쾌대의 작품을 제대로 마주하며 찬찬히 바라봐야 할 때입니다.

<참고문헌>

-국립현대미술관 기획(2015),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 돌베개

-김인혜(2023), 살롱 드 경성, 해냄

-윤범모(2008), 이쾌대의 경우 혹은 민족의식과 진보적 리얼리즘, 미술사학,(22),327-354.

-양혜경(2017), 향토적 정서에 기반을 둔 민족향기, 수필시대, 12(9·10), 212-223.

-정민영(2020), [정민영의 미술이야기] 화가들의 편지로 본 작품세계, 대한토목학회지, 68(1), 9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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