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빵전략 통했다...50년만에 전세계 사로잡은 봄의 전령사 [전형민의 와인프릭]
어김없이 봄이 찾아왔습니다. 본격적으로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면서 노천 카페나 식당에 앉아 가볍게 와인이나 맥주 등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희망과 긍정의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는 싱그러운 봄날에 어울리는 와인은 무엇일까요.
정형화된 답은 아닙니다만, 많은 와인 애호가들은 ‘봄 와인’하면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 품종으로 빚은 와인(이하 소비뇽 블랑)을 꼽습니다. 아스파라거스와 샐러리로 대표되는 파릇파릇하고 풋풋한 풀내음, 레몬과 라임 같은 시트러스류 과일의 상큼함이 전해지는 와인이죠.
소비뇽 블랑은 그 특유의 싱그러움 때문에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과 잘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면 소비뇽 블랑이 대중적으로 많이 소비되기 시작한 것은 고작 50여년 남짓으로 8000년을 넘나드는 와인의 역사를 감안하면 상당히 짧습니다.
오늘 와인프릭은 봄의 전령사, 소비뇽 블랑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지난해 봄 이미 한 차례 다뤘던 주제입니다만, 와인 애호가들을 위해 이야기가 있는 색다른 소비뇽 블랑을 소개해드릴게요.
아마 까베르네 소비뇽의 강건하고 진한 느낌과 소비뇽 블랑의 푸릇푸릇한 느낌에서 선뜻 공통점을 찾기 힘들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의외로 소비뇽 블랑과 까베르네 소비뇽, 두 품종은 모두 와인 초보에게 크게 사랑 받는 직선적이고 강렬한 향과 맛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죠.
자신이 지닌 풍미를 직선적이고 선명하게 드러내는 스타일인 셈인데요. 둘 사이에 공통점인 소비뇽(Sauvignon)의 어원이 프랑스어 소바쥬(Saubage·야생적인)라는 것을 떠올리면 조금 이해가 편할까요.
참고로 ‘쇼비뇽’은 잘못된 발음입니다. ‘외래어기 때문에 어떻게 발음하든 상관 없지 않느냐’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프랑스어 au의 발음은 명확하게 ‘ㅗ’ 입니다. 보르도(Bordeaux)를 ‘보르됴’로 부르거나 샤토(Chateau)를 ‘샤툐’라고 부르지 않듯, 소비뇽을 쇼비뇽으로 부르는 것은 명확한 오발음입니다.
국내에서 까베르네 소비뇽을 ‘까쇼’, 소비뇽 블랑을 줄여 ‘쇼블’이라고 자의적으로 줄여 부르면서 생긴 오발음이 굳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를 제외한 국가에서는 까베르네 소비뇽을 ‘캡소’나 ‘캡스’, 소비뇽 블랑을 ‘소블’ 혹은 ‘에스비(SB)’라고 줄여 부릅니다.
그렇기 때문일까요? 미국 와인의 거장, 미국와인의 아버지로 불리 로버트 몬다비도 1968년 소비뇽 블랑 와인을 만들고 으레 하듯 병 레이블에 기입하는 품종명을 소비뇽 블랑 대신 퓌메 블랑(Fume Blanc)이라고 적었을 정도죠.
이에 대해 몬다비가 소비뇽 블랑이 역사적으로 주연을 맡았던 루아르 밸리 지역 푸이퓌메에 경의를 표한 것이라는 설도 있는데요. 소비뇽 블랑의 유행에 뒤떨어진 평판, 값싸고 달콤한 화이트 와인이라는 연관성과 거리를 두기 위한 조치라는 해석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이러나 저러 몬다비의 선구안은 무척 뛰어난 셈 입니다. 50여년이 지난 지금, 소비뇽 블랑은 샤도네, 피노 그리지오와 함께 와인샵과 레스토랑 와인 리스트는 물론 동네 마트에서까지 일년 내내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스테디셀러가 됐으니까요.
무역협회인 뉴질랜드 포도생산자협회(New Zealand Winegrowers)가 발표한 ‘2023년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뉴질랜드가 생산하는 와인은 전세계 와인 생산량의 1%를 조금 넘기는 수준입니다. 하지만 세계 6위의 와인 수출국이고, 그 수출 와인의 대부분이 소비뇽 블랑이죠.
뉴질랜드는 국토 중 약 4만1860헥터(㏊)에서 양조용 포도를 생산하고, 그중 절반이 넘는 2만7084㏊에서 소비뇽 블랑을 생산합니다. 수출하는 와인의 총량은 3억1371만9000리터에 달하는데, 이 중 소비뇽 블랑만 2억7917만1000리터죠. 이는 전세계에서 수출되는 소비뇽 블랑 총량의 85% 수준입니다. 가히 소비뇽 블랑 원툴이라고 할만 합니다.
단순히 많이 생산하고 판매한다고 해서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죠. 뉴질랜드의 소비뇽 블랑은 이미 세계적인 여러 평가기관에서 우수성을 입증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특유의 갓 깎은 풀과 같은 신선함, 톡 쏘는 산미와 자몽, 라임 제스트, 피망 향 등은 거부하기도 잊기도 어렵다”고 말합니다.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이 세계시장에서 이토록 인정받는 것은 그들이 가진 천혜의 환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극단적인 해양성 기후, 오래된 고대 토양, 고저차 심한 지형 등 흔히 말하는 자연조건 입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오히려 이러한 천편일률적인 특성에 싫증을 느끼는 애호가들도 늘고 있습니다.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들에서 개성을 느끼기 어렵다는 지적입니다.
이에 따라 양조 과정에 새로운 시도를 하는 와이너리가 늘고 있는데요. 대표적인 곳이 1988년 설립된 크래기 레인지(Craggy Range) 입니다.
현존 가장 유명한 산지인 남섬 말버러(Marlborough) 지역이 아닌, 이곳과 마주보는 북섬 혹스 베이(Hawk’s Bay)에 위치한 와이너리입니다.
혹스 베이는 최근 글로벌 와인 네트워크인 그레이트 와인 캐피털(GWC)에서 선정하는 12번째 ‘세계 와인 수도’에 선정됐습니다. 프랑스 보르도와 미국 나파밸리(Napa Valley), 스페인의 빌바오(Bilbao), 호주의 애들레이드(Adelaide) 등이 이미 선정된 바 있죠.
아직도 땅을 조금만 파면 조개 껍데기(shell) 등이 심심찮게 나온다고 합니다. 덕분에 아주 독특한 미네랄 뉘앙스(짠맛으로 단순화하기도 합니다)와 고요한 먼지로 표현하는 이른바 ‘김블렛 더스트’라는 특별한 특성이 발현되기도 합니다.
토양 뿐만 아니라 양조 방식에도 특별한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그동안 소비뇽 블랑은 그 특유의 풋풋함과 상큼함을 유지하기 위해 오크통 숙성 같은 양조 기술을 가미하지 않았는데, 크래기 레인지는 과감하게 오크통 숙성을 진행합니다. 이를 통해 소비뇽 블랑 와인에서 특징적으로 느낄 수 있는 뾰족한 산도가 둥글고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가장 재밌는 점은, 이제 고작 설립 30여년 밖에 되지 않은 가족 경영 와이너리가, 가족이 대를 이어 물려주더라도 1000년 간 와이너리의 소유주를 팔지 못하도록 하는 1000년의 신탁을 했다는 점 입니다. 와인 양조를 ‘미래 세대를 위한 유산을 만드는 일’로 받아들인 설립자의 의지가 돋보입니다.
한편 크래기 레인지 와이너리는 와인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도 무척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해, 유명인들의 결혼식장으로도 인기가 높습니다. 올해 초 뉴질랜드의 전 총리가 사귀던 남자친구와 결혼식을 올린 곳도 바로 크래기 레인지 와이너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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