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스러운 계집 목을 쳐라” 수백번 명령했지만...권력자도 꼼짝 못한 그녀들 [서울지리지]

배한철 기자(hcbae@mk.co.kr) 2024. 4. 13.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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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유토피아를 꿈꿨던 조선, 무속의 늪에 빠지다
어린 무녀(일제강점기). [국립중앙박물관]
무속(巫俗)과 권력은 불가분 관계인가. 잊을만 하면 정치권에서 역술이나 무속, 풍수 논란이 불거진다. 선거철이면 점집이 문전성시를 이룬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무속은 세계 종교의 종합선물세트다. 모든 종교는 여러 종교와 습합(習合·융합)을 통해 발전했지만 타종교 수용에서 무속만큼 적극적인 종교도 없다. 무속의 신은 동서고금을 망라하며 토속종교와 유불선을 넘나든다. 천신, 지신, 수신, 바람신 등 자연신을 비롯해 부처·보살, 원효, 나옹, 사명당 등 불교 여러 신과 승려, 중국·한국의 역사영웅 등 신앙 대상의 한계를 가늠키 어렵다. 최영, 남이, 임경업 등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장군들도 중요하게 숭배하며 최근에는 맥아더, 박정희도 끌어들인다.

나라에 망조가 든 고종(1852~1919·재위 1863~1907)의 시대에는 뜬금없이 관우신앙이 풍미했다. 고종비 명성왕후 민 씨(1851~1895)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1820~1898)과 극단적 권력투쟁을 벌이면서 죽음의 공포와 절망 속에 병적으로 미신에 집착했다.

명성왕후, 금강산 일만이천봉마다 제물바쳐, 대원군과 극단적 권력투쟁 속에서 미신 집착
북관묘(일제강점기). 명성왕후의 전속무당인 진령군이 살던 북관묘 모습이다. 북관묘는 종로 혜화동 서울과학고 자리에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명성왕후는) 세자의 복을 빌기 위해 명산의 사찰에 두루 기도를 드렸다. 이에 무당과 소경들이 거리낌없이 활개를 쳐 군읍에서 이들을 맞이하고 보내는 잔치가 이어졌다. 금강산을 세상에서 일만 이천봉이라 하는데 봉우리마다 바치는 제물이 돈으로 만 꿰미에 이르렀다.”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

명성왕후가 1866년(고종 3), 16세에 고종과 혼인해 8년 만에 가진 순종(1874~1926)은 태어나면서부터 병약했다. 심지어 <매천야록>에 의하면, 순종은 발기불능에 시도 때도 없이 오줌을 싸는 희귀병을 앓았다. 자신과 친정을 지켜줄 귀한 아들을 위해 무엇을 아끼겠는가. 전국의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아들만 잘 되게 해달라는 기도회를 열었다. 영험하다는 무당은 모두 동원됐고 가는 곳마다 천문학적인 나랏돈이 뿌려졌다.

1882년(고종 19) 구식군인들이 일으킨 임오군란으로 왕후는 친정집이 풍비박산 났다. 그녀마저 궁녀차림으로 장호원까지 몰래 도망쳐 겨우 목숨을 보전했다. 이때 왕후는 용하다는 이 씨 무녀의 소문을 듣고 그녀를 불렀다. 이 씨 무녀는 명성왕후가 곧 대궐로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사이 청나라가 개입해 반란을 진압하면서 명성왕후는 피란 50여 일만에 환궁했다. 예언이 적중했다고 믿은 명성왕후는 무당을 궁궐로 데려왔다. 무당은 자신이 관우의 영을 받은 딸이라며 왕후를 현혹해 송동(宋洞·혜화동 서울과학고)에 관우사당인 북관묘(北關廟)를 짓고 그곳에서 살았다. 고종은 ‘진실로 영험하다’는 뜻의 진령군(眞靈君) 작호까지 내렸다. 진령군은 명성왕후의 전속무당으로 왕후를 위해 수시로 점을 치며 절대적 신임을 받았다.

전속무당 진령군, 명성왕후 점 쳐주며 절대적 신임···고관 인사 간여하고 국정 좌지우지
무녀(일제강점기). [국립중앙박물관]
무녀(일제강점기). [국립중앙박물관]
무녀(일제강점기). [국립중앙박물관]
벼슬은 진령군 말 한마디에 달렸고 고관들은 앞 다투어 그녀에 아첨했다. 조선말 시인·문장가인 김택영(1850~1927)의 <소호당집>은 “(명성왕후는) 진령군이 말하는 것은 들어주지 않는 것이 없으니 내외 관직의 제수도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많았다. 사대부들 중 간사하고 우둔한 자들은 분분히 좇아서 심지어는 어머니니 누님이니 하고 부르는 자들까지 있게 되니…”라고 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이 터지자 북묘로 달려가 의지하기도 했다.

의식있는 사람들이 분노했지만 국왕은 외면했다. <고종실록> 1894년(고종 31) 7월 5일 기사에 의하면, 형조참의 지석영(1855~1935)이 “요사스러운 계집 진령군에 대하여 온세상 사람들이 살점을 씹어 먹으려고 한다. … 상방검(尙方劍·임금이 보검)으로 주륙하고 머리를 도성 문에 매달도록 명한다면 민심이 비로소 상쾌하게 여길 것”이라고 강력 비판했다. <매천야록>은 1906년(광무 10) 12월 진령군이 죽었다고 기술한다.

순원황귀비 엄씨(대한제국). 명성왕후가 살해된 후 새로운 궐내 실력자로 부상한 엄귀비의 시대에는 현령군이라는 무당이 악명을 떨쳤다 [국립중앙박물관]
명성왕후가 일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자 이번에는 윤 씨 무당이 고종의 후궁 엄비(1854~1911)를 움직여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윤 씨 무당 역시 관우 딸을 사칭해 현령군(賢靈君)에 봉해졌다. 1902년(광무 6), 새로운 관우사당인 서묘를 이궁동(二宮洞·서대문구 천연동)에 세웠다.

이능화(1869~1943)의 <조선무속고>는 “현령군이 받드는 관묘는 이궁동에 있었는데 세상에서 이궁대감 전내신(殿內神·관왕)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진령군은 왕비의 명령으로 송동의 북묘에 거주하였으며 세상에서 진령군 대감이라 하였다”고 했다. 서묘는 1909년(융희 3), 북묘는 1913년, 각각 동묘(東廟·종로 숭인동)로 합사돼 철거됐다.

이 둘이 끝이 아니었다. <조선무속고>는 “이 씨, 윤 씨 뒤에 또 수련(壽蓮)이라는 여자 무당이 있어 대궐을 출입하며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는 의례를 했고, 두 아들은 모두 고관이 되었다”고 했다.

조선시대 무당은 가장 천한 계층이었지만 권력자 마음 사로잡아 막강한 배후로 행세
조선은 엄격한 신분사회였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차별 받았지만 그중에서도 무당은 기생과 함께 조선사회에서 가장 신분이 낮았다. 하지만 미천한 무당들은 권력자의 마음을 사로잡아 막강한 배후가 되기도 했다. 태종 비 원경왕후(1365~1420)는 무당 정사신파(淨祀神婆)를 신임했다. 작자 미상의 <좌계부담>은 조선 제3대 태종 이방원(1367~1422·재위 1400~1418)의 잠저시절, 정사신파가 옆집에 살았다고 했다. 신파는 원경왕후를 위해 여러 번 점을 쳤지만 예언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원경왕후는 무당의 점괘에 따라 남편을 위기 때마다 구해냈다. 정도전에 선수를 쳐 공격하게 했고 무기를 숨겼다가 거사를 할 때 내줘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큰 조력자 역할을 했다. <좌계부담>은 “아! 원경왕후가 조정의 안정을 도운 공은 참으로 신파의 조언이 컸다”고 했다.

원경왕후는 1420년(세종 2) 5월 27일 학질에 걸린다. 왕후는 사경을 헤맸지만 아들(세종대왕·1397~1450·재위 1418~1450)을 시켜 매일 야행을 하며 가는 곳마다 전국의 이름난 술사와 무당을 불러들여 굿을 벌였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6월 24일 세종은 원경왕후와 송계원(松溪院·묵동의 국립여관) 냇가로 행차했다. 황해도 곡산의 홍흡와 방술사 을유가 학질을 다스리는 비술을 행했다. 26일에는 선암(繕巖) 아래 물가로 옮겨 장막을 치고 무당에게 기도하게 했으며 새벽에 두어 사람만 대동한 채 몰래 혜화문으로 들어와 흥덕사(興德寺·서울과학고)에 머물렀다. 실록은 “(왕과 대비가) 밤마다 행차를 옮기어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고 했다. 세종은 귀신을 피해 다니며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면 하늘도 감응해 병이 낫겠거니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후는 병에 걸린지 한달 보름만인 7월 10일 운명한다.

국가 주도로 성수청, 남산 국사당 두고 국가 제사···국무(國巫), 도무녀(都巫女) 등 소속
노량진 노들무당(일제강점기). [국립민속박물관·송석하 기증사진]
장군 차림의 박수무당(1930년 4월 28일 촬영). 무당들은 주로 나라에 충성하다가 억울하게 죽은 역사적 인물들을 신으로 숭배한다. [국립민속박물관·송석하 기증사진]
무당은 병치료를 공언했다가 처벌받기도 했다.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 씨(1642~1684)도 미신에 빠졌다. 1683년(숙종 9) 임금이 천연두를 앓자 대비 명성왕후가 치병을 위해 대궐로 무당 막례(莫禮)를 불러들였다. 막례는 무엄하게 가마를 타고 대궐을 출입했다. 그녀는 명성왕후에게 아들을 살리려면 고기를 금하고 차가운 샘물로 목욕을 해야한다고 했다. 명성왕후는 이 말을 따르다가 독감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숙종실록> 1684년(숙종 10) 2월 21일과 1711년(숙종 37) 12월 20일 기사에 따르면, 막례는 기도를 하면서 임금의 곤룡포를 입기도 했고 그러면서 써 없앤 경비가 셀 수 없었다. 막례를 죽이라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왕의 특명으로 감형돼 섬으로 유배됐다.

무속은 여인들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조선은 유교국을 천명했지만 놀랍게도 국가가 주관해 무속의례를 행하는 성수청(星宿廳)을 별도로 뒀다. 성수청은 국무(國巫·나라 제사를 담당하는 무당)가 소속돼 왕실의 안녕, 기우(祈雨)와 기청(祈晴) 등의 국가제사를 행했다. 사림들이 중앙 정치무대에 본격 등장한 성종(1457~1494·재위 1469~1494)의 치세에 성수청 폐지 논쟁이 뜨거웠다. <성종실록> 1478년(성종 9) 11월 30일 기사에 따르면, 홍문관 부제학 성현(1439~1504)이 상소를 올려 포문을 연다. 그는 “간사스럽고 음란하고 요망한 것들이 성명(聖明·성군) 아래에서는 용납되지 않게 하소서”라고 했다. 경국대전을 반포해 유교 통치시스템을 완성한 성종이었지만 이같은 사림의 요청을 거부했다.

성수청은 성종의 아들 연산군(1476~1506·재위 1494~1506) 때 오히려 전성기를 맞았다. <연산군일기> 1505년(연산 11) 2월 22일 기사에서 연산군은 “성수청에 성을 쌓아 문을 내고 임숭재(1475~1505·연산군때 간신)의 집 북쪽에도 작은 문을 내어 서로 통하게 하라”고 했다. 이어, 1506년 3월 6일 연산군은 “성수청 도무녀(都巫女·으뜸 무녀)와 이하 무녀의 잡역을 면하라”고 명했다.

국가 관청도 청사 안에 부근당 짓고 제사에 수백금 허비, 일부 사당 성기 숭배로 물의
연산군은 유학의 전당 태학도 굿당으로 바꿔버렸다. <연려실기술>은 “(연산군이) 유생들을 쫓아내 태학을 비운 뒤 무당을 모아놓고 난잡한 제사를 벌렸다”고 했다. 연산군은 아예 자신이 무속인이 됐다. <연산군일기> 1505년(연산 11) 9월 15일 기사는 “(왕이) 굿을 좋아하여 스스로 무당이 되어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하고 춤추어 폐비(친모 윤 씨)가 빙의한 형상을 하였다”고 했다.

남산과 북악산에도 나라 굿당이 설치됐다. <태조실록> 1395년(태조 4) 12월 29일 기사는 “이조에 명해 백악을 진국백(鎭國伯)으로,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삼아 나라의 제사를 지내게 했다”고 했다. 남산 굿당은 국사당(國師堂·현재 팔각정)으로 불렀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규경(1788~1856)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는 “(국사당에서) 기도가 자못 성행하여 나라도 금하지 못했다”고 했다. 1925년 일제가 국사당 아래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현재의 인왕산 선바위로 이전했다.

국가 관청에 성기(性器)를 숭배하는 사당도 존재했다. 청사 별로 내부에 부근당(付根堂)을 별도로 마련해 부근신을 모셨다.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서울에는 관청마다 신사(神祀)가 있으니 이름하여 부근당이라 한다. 이것이 와전되어 부군당(府君堂)이라고도 한다. 한번 제사하는 비용이 수백금이나 된다. … 네 벽에 남자의 성기처럼 나무로 만든 막대기를 많이 매달아놓았는데 심히 음란하고 외설적이었으며 … ”라고 했다.

조선 전반에 걸쳐 “무당 추방” 명령 무수히 있었지만 소용 없어···무속 논란 지금도 진행형
동묘(보물). 종로 숭인동의 동관왕묘이다. 1601년(선조 34) 중국의 요구로 건립됐다. [문화재청]
동묘 내 관우상. [문화재청]
인왕산 국사당. 국사당은 애초 남산 팔각정에 있었지만 1925년 일제가 국사당 아래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현재의 인왕산 선바위로 이전했다. 인왕산 국사당에서는 지금도 사업번창을 비는 경사굿, 부모의 극락왕생을 비는 진오귀굿, 병굿, 우환굿 등이 벌어진다. [문화재청]
북한산 국사당. 북한산 밤골공원(고양시 덕양구 효자동)에 위치한 북한산 국사당. 인적이 드문 곳이지만 언제나 방울, 징, 북소리가 들린다. 무속논란은 오늘날도 진행형이다. [배한철 기자]
무속의 생명력은 질겼다. <조선무속고>는 “세종 때 무격(巫覡·여자와 남자 무당)을 도성 밖으로 내쫓기 시작한 이래로 여러 세대를 통하여 무당을 내쫓는 명령이 몇 백 번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도성 내 음사는 여전하다”고 개탄했다.

최첨단 과학의 시대인 요즘, 뜻밖에도 무속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MZ세대들이 미래가 불안하다며 신점·사주를 찾는다고 한다. 인간이 나약한 존재임을 새삼 느낀다.

<참고문헌>

1. 조선무속고 : 역사로 본 한국무속. 이능화(서영대 역주). 창비. 2008

2. 한국불교와 민간신앙의 습합현상. 한국불교학 제75집. 장정태. 한국불교학회. 2015

3. 조선왕조실록. 매천야록(황현). 소호당집(김택영). 좌계부담. 연려실기술(이긍익). 오주연문장전산고(이규경)

4. 조선후기의 무속. 한국무속학 제17집. 손태도. 한국무속학회. 2008

5. 도시와 무속 : 서울굿을 중심으로. 실천민속학연구 제9호. 홍태한. 실천민속학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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