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서 피어나는 초록 우산…소나기 맞고 꽃 피우네 [ESC]

한겨레 2024. 4. 1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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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자S의 열두달 식물일기
메이애플
미국 메릴랜드주 스미스소니언 식물 연구소 숲속에 피어있는 메이애플. 4월 초 잎이 올라오는데 마치 초록색 우산이 펴지는 모습이다.

4월에 싹 틔우고 비바람 견뎌
5월에 사과 모양 열매 맺는 봄꽃
뿌리 옆으로 뻗어 개체 늘리는 방식

4월만 기다렸다. 3월에 봄이라고 들떴는데 날이 너무 추웠기 때문이다. 겨울에 무장했던 마음만 느슨해져 섣불리 가볍게 옷을 입고 나갔다가 오들오들 떨며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내가 지내고 있는 이곳 미국 메릴랜드는 한국의 부산과 비슷한 날씨라고 들었다. 겨울을 지내보니 확실히 서울보다 따뜻해서 3월이면 금방 따뜻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넣어둔 겨울옷을 다시 꺼내입으며 4월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4월이 시작되니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비는 세차게 쏟아졌다. 보슬보슬 내리는 한국의 봄비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여름 장맛비처럼 굵은 빗방울이 내내 쏟아지더니 새벽에는 바람과 함께 기세가 더해졌다. 이러다가 숲속에 핀 봄꽃이 다 떠내려가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숲의 봄은 바닥에서부터

3일 동안 비가 오더니 4일째 드디어 해가 났다. 아침 기온은 3월보다 뚝 떨어져 있었다. 따뜻한 날씨만 기다리다가는 부지런한 봄꽃을 놓칠 것 같아서 두꺼운 옷을 챙겨입고 숲에 갔다. 많은 비로 여기저기 물웅덩이와 늪이 생겼지만 말끔히 씻긴 하늘과 숲은 아름다웠다. 키 큰 나무 아래 작은 덤불엔 이미 연두색 새싹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키 작은 풀꽃도 피어있었다. 숲은 바닥에서 봄이 먼저 시작된다. 키 큰 나무들이 잎으로 하늘을 덮어 햇빛을 차지하기 전에 먼저 광합성을 시작하는 키 작은 식물들에게서 말이다. 특히 재빠르게 꽃을 피우는 풀꽃은 무척 부지런해서 모든 것을 빨리 시작한다. 잎도, 꽃도, 열매도. 모든 생애를 봄 혹은 여름에 마치기도 한다. 한창 숲속에 잎이 우거졌을 때 그 식물들은 이미 씨앗을 퍼뜨리고 흔적조차 없다. 우리나라에서 이른 봄꽃으로 대표되는 복수초나 바람꽃류도 그런 풀꽃이다. 그래서 그런 부지런한 봄꽃을 보려면 추위가 가시기 전에 숲에 가야 한다.

연구소 숲속에서 내 눈을 가장 사로잡은 건 메이애플(mayapple)이었다. 메이애플은 북미에서는 흔히 자라 쉽게 만날 수 있는 봄꽃으로 한국에서는 관상용으로 종종 심는다. 메이애플이라는 이름은 5월에 꽃을 피우고 열매가 사과처럼 둥글게 달려 유래했다고 한다. 4월 초 잎이 올라오기 시작해 5월이 되면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노랗게 열매가 익는데 그 전 과정이 흥미롭다. 특히 새싹이 올라올 때부터 아주 매력적이다. 잎은 대개 한개가 올라오고 꼭 우산처럼 생겼다. 땅에서 올라올 땐 마치 접은 우산 같다. 조금 펼쳐졌을 땐 버섯 같기도 하다. 그리고 다 자라면 잎이 활짝 펼친 우산처럼 된다. 이들은 무리지어 솟아나기 때문에 숲속 낙엽 위에 작은 초록 우산들이 옹기종기 펼쳐진 모양새다. 그 모습을 보면 우산을 쓴 요정들이 모여있는 것 같다. 비가 온 뒤에 물방울이 송송 맺혀있는 모습은 더욱 귀엽다. 그렇게 4월 내내 접은 우산들이 솟아나고 펼쳐지다가 5월이 되면 마침내 꽃을 피운다.

열매에만 없는 독성

메이애플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정확히 계획하고 그에 맞게끔 자신의 모습을 구조화한 식물이다. 물론 모든 식물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계획하고 자라나지만 메이애플을 관찰하다 보면 놀라울 때가 많다. 메이애플이 옹기종기 모여 솟아나는 것은 그 아래 뿌리가 길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꽃이 피면 암술과 수술의 성숙 시기가 다르다. 이것은 자신의 꽃가루가 자신의 암술에 옮겨지는 자가수정을 막기 위한 지혜다. 자가수정을 하지 않으면 유전적으로 건강한 씨앗을 얻을 수는 있지만 멀리서 꽃가루를 구하지 않고도 쉽게 씨앗을 맺는 자가수정의 장점은 얻지 못한다. 그래서 메이애플은 자가수정을 통한 번식 대신 길고 옆으로 뻗는 뿌리를 통해 개체를 늘려가는 방법을 택했다.

꽃이 필 줄기는 새싹이 날 때부터 쉽게 구별할 수 있다. 대부분 하나의 잎만 올라오는 것과 달리 꽃이 피는 줄기에는 꼭 잎이 두개씩 달리기 때문이다. 꽃과 열매가 없어 상대적으로 에너지가 덜 필요한 줄기와 달리 꽃과 열매를 맺는 줄기는 두개의 잎에서 충분한 에너지를 생산한다. 꽃과 열매는 두개의 잎사귀 아래, 땅바닥에서 한뼘 정도 높이에 맺힌다. 우산 아래 숨겨진 꽃과 열매는 위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꽃가루를 옮겨줄 땅벌과 열매를 먹고 씨앗을 퍼뜨려줄 상자거북에게는 딱 맞는 높이다.

메이애플은 이른 봄에 올라와도 초식동물의 공격을 받지 않아 잎이 모두 우산 모양을 잘 유지한다. 강한 독성 때문에 초식동물이 먹지 않기 때문이다. 메이애플은 식물 전체에 강한 독성이 있지만 딱 한군데, 노랗게 잘 익은 열매에만 독성을 없앤다. 씨앗을 퍼뜨려줄 동물에게는 해를 입히지 않기 위해서다. 열매는 사람도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찾아보니 평가는 제각각이었는데 잘 익은 멜론·레몬과 무화과를 섞은 맛, 많이 익은 파인애플 맛 등 다양했다. 나는 그 맛이 궁금해 올여름에 열매를 먹어볼 요량이다. 독성이 강해 겁이 나지만 메이애플의 철저한 계획과 실행 능력은 믿을 만한 것 같다.

영어로 ‘4월의 소나기는 5월의 꽃을 부른다’(April showers bring May flowers)는 속담이 있다. 나는 빗방울이 맺힌 메이애플의 잎사귀를 보며 그 속담은 메이애플을 위한 문장이라 생각했다. 소나기를 맞는 우산 같은 모양새와 5월에 피는 꽃 때문도 있지만, 메이애플의 현명한 생존방식이 속담의 뜻과 어울린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속담에서 소나기는 시련이나 역경을 의미한다고 한다. 5월의 꽃은 그 이후 한층 성숙하거나 좋은 날이 온다는 의미다. 메이애플은 다가올 수 있는 역경에 대한 모든 준비를 마친 식물인 것 같다. 4월의 소나기와 추위 속에서 메이애플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그 속에 숨어 있는 지혜를 되새긴다. 5월의 꽃은 쉽게 탄생하지 않는다. 숲속에는 지금도 매일 작은 우산들이 하나씩 펼쳐지고 있다.

글·사진 신혜우 식물분류학자

미국 스미스소니언에서 식물을 연구하고 있다. ‘식물학자의 노트‘, ‘이웃집 식물상담소’를 쓰고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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