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열망했던 ‘외도’…샌드백 때리며 권투에 빠지다 [ESC]

한겨레 2024. 4. 13.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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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하루운동 주짓수
양민영 작가(왼쪽)가 다리로 상대의 한쪽 어깨와 상체를 제압하는 방어 자세를 취하면서 타격을 시도하고 있다. 함록희 제공

주짓수에서도 글러브 끼고 훈련
공격·입식 기술 배우고자 양다리
고독하지만 원초적 타격 ‘재미’

글러브가 문제인 걸까. 손가락 골절을 예방하는 이 보호구만 착용하면 모두가 흥분한다. 일반적으로 주짓수는 타격을 배제하는데 굳이 글러브를 끼는 건 실전성 때문이다. 주짓수 기술의 특성상 바닥에 눕거나 상대의 몸 아래로 들어가는 움직임이 많은데 이때 얼굴이나 후두부를 주먹으로 맞으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은 주짓수에 타격을 추가한 ‘파이트 시뮬레이션’이라는 이름의 훈련을 진행한다.

이 시간만 되면 주짓수는 내가 아는 그 주짓수가 아니라 다른 종목이 된 것처럼 낯설다. 원래대로라면 아무리 타격이 더해져도 주짓수의 기본인 방어와 컨트롤 위주로 움직여야 한다. 주먹은 상대의 방어막을 뚫기 어려운 상황에서나 가끔 써야 하는데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고 했던가. 글러브만 끼면 ‘때리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타격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으니 마음만 앞선다. 어쩌다가 일어서서 본격적인 주먹 싸움이 시작되면 어떻게 공격하고 방어해야 하는지 모르는 백지상태가 되곤 했다. 결국 공격 기술을 향한 강한 호기심과 서서도 싸워보고 싶은 욕심에 가까운 권투 도장을 찾았다.

집에도 샌드백이 있으면

이쯤에서 고백하면 꾸준하게 애정을 쏟은 건 주짓수지만 마음 한편에 두고 열망한 상대는 권투다. 운동광들은 똑같은 운동만 하자니 지루하고 감흥이 없을 때를 ‘운동 권태기’라고 하는데 사실 권태는 핑계다. 바람의 진짜 원인이 ‘바람을 피우고 싶어서’인 것처럼 새로운 운동에 기웃거리는 건 새로운 운동을 하고 싶어서다. 바람은 도덕적으로 지탄받지만 운동은 얼마든지 한눈을 팔아도 되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그렇게 아무런 가책 없이 양다리를 걸쳐보기로 했다. 어느 쪽이 더 매력적인가는 천천히 따져볼 문제이고 접근성이 쉬운 쪽은 권투다. 주짓수보다 훨씬 대중적이고 비용도 저렴한 편이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한 건 순전히 두려워서였다. 권투를 하면 맞아야 한다는 사실이 상상을 초월하는 겁쟁이에겐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또 속된 말로 견적을 내봐도, 권투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종목이 아니다. 쉬지 않고 스텝을 밟고 댄서처럼 리듬을 타야 하며 반응속도가 빨라야 하고 바람에 날릴 듯 가벼운 동시에 날카로운 권투 선수는 나라는 사람과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존재라고 확신했다.

부담을 견디며 찾아간 권투 도장의 첫인상은 기묘했다. 스무살 때부터 권투를 배운 친구의 말로는 권투 도장은 인테리어가 추악할수록 잘 가르치는 곳이라고 한다. 체육관에서 미감을 찾는 건 부질없는 짓이나 권투 도장이 확연하게 추악한 건 사실이다. 온갖 더러운 빨래가 켜켜이 쌓인, 쿠션이 납작하게 내려앉은 낡은 소파, 너덜거리는 비닐 포장이 덮인 당구대, 누가 연주하기에 거기 있는지 알 수 없는 드럼 세트, 신경을 긁는 후크송의 집합체가 권투 도장이다.

그 안에서 새로 배운 동작을 서툴게 따라 하는데 주짓수에 익숙한 나에겐 모든 게 낯설기만 했다. 우선 주짓수를 손으로 한다면 권투는 발로 한다. 두발로 서서 폐활량이 허락할 때까지 가볍게 뛰면서 이동한다. 또 주짓수가 자세보다 수 싸움이 더 중요하다면 권투는 폼으로 시작해서 폼으로 끝난다. 권투 기술의 종류는 손에 꼽히게 단출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실력이 붙는다.

미트 훈련이나 스파링을 제외하면 혼자 연습하는 게 기본인 이 운동은 고독하고도 고독하다. 어떻게 보면 고독을 넘어서 미련하기까지 하다. 전신거울로 도저히 봐줄 수 없는 나를 지켜보면서 허공에 양팔을 휘두르면 온몸에 돋은 소름이 가실 줄 모른다. 실로 오랜만에 가소롭고 웃긴 초보 신세로 전락한 셈인데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또 이 무지한 초보도 느낄 수 있는 권투만의 원초적인 재미가 있다. 특히 집에도 샌드백이 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샌드백을 때리는 데 매료됐다. 파란색의 두꺼운 컨텐더(권투 용품 전문 브랜드) 글러브를 끼고 샌드백을 두들길 때, 과장해서 말하면 원래 내 모습을 찾은 것 같았다. ‘남자애들을 그만 때려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듣고 스누피와 스파링하던 만화 ‘피너츠’의 루시가 영혼의 단짝이라고 믿던 시절의 대책 없는 말괄량이를.

주짓수에서 파생된 UFC

다시 파이트 시뮬레이션의 밤이 돌아왔다. 관장님의 입에서 “글러브를 착용하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도장 내의 기류가 묘하게 달라진다. 스파링 분위기가 과열되면 부상의 위험도 함께 커지는 법. 가뜩이나 관원들을 진정시키는 게 일인 관장님은 차도로 내달리는 아이를 말리는 보모처럼 외친다. “충돌하지 않게 조심하세요!” 타격에 대비해 방어 능력을 키운다는 본래의 취지는 오간 데 없고 다들 상대를 때리느라 여념이 없다.

이 거칠고 혼란한 싸움은 역사상 가장 크게 성공한 격투기 종목인 종합격투기와 닮았다. 현대 종합격투기의 출발점이 다름 아닌 주짓수다. 주짓수의 본고장인 브라질에는 포르투갈어로 ‘무엇이든 허용한다’는 뜻의 ‘발리투도’(Vale Tudo)라는 종목이 있다. 말 그대로 무규칙 싸움인데 주먹, 발차기, 몸싸움, 후두부 가격을 전부 허용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잔혹하게 싸운다.

브라질의 전통 격투기쯤으로 통하던 발리투도는 1993년 주짓수의 주창자인 엘리오 그레이시의 아들인 호리온 그레이시가 미국에서 판을 벌이면서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이때의 성공으로 세계 최초의 종합격투기 단체인 유에프시(UFC)가 탄생했다. 폭력적이고 자극적이고 그래서 가장 크게 성공한, 21세기 판크라티온(잔인하기로 유명한 고대 그리스의 격투기)의 막이 오른 셈이다.

권투의 단순하고 직선적인 공격은 주짓수의 우회적이고 복잡한 방어만큼이나 매력적이다. 지난 두달간 주먹을 쥐고 팔을 길게 뻗을 때마다 연초부터 나를 뒤흔든, 불만과 분노에 관해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는데도 간절하게 무엇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과 죽을 때까지 잠재울 수 없는 허기와 갈망 같은 것을.

“어서 배워서 주짓떼로(주짓수를 수련하는 남성)들을 때려야죠.” 혼자 외롭게 샌드백을 때리고 있으면 코치가 다가와서 악마처럼 속삭였다. 아직은 한심한 실력이지만 “물론이죠”라고 대답했다. 나에게 주먹 말고 발도 남아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양민영 작가

사회적기업 운동친구의 대표이며 ‘운동하는 여자’를 썼다. 페미니즘과 여성의 운동에 관한 콘텐츠를 만들고, 못 하는 일에 도전하기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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