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100년 전 여학생 기숙사를 가다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4. 4. 1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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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온수 나오는 목욕탕, 빨래 서비스에 또래와의 공동생활,’에덴 낙원의 선녀놀음’,
정신여학교 기숙사는 세탁실이 별도 건물에 있었다. 옷을 삶는 커다란 솥까지 있었다고 한다. 조선일보 1925년 4월22일자

1930년 9월 여학교 기숙사를 탐방한 연재기사가 실렸다. 조선일보 ‘부인면(婦人面)’기획이었다. 딸을 진학시킨 학부모 입장에선 자식이 어떻게 먹고 자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당시로선 극소수였던 인텔리 여성의 일상에 일반인들도 관심을 가졌을 법하다.

◇온수 나오는 목욕탕, 방처럼 깨끗한 화장실

첫회는 숙명여학교 기숙사였다.교사와 강당 뒤에 새로 지은 붉은 단층 기와집이었다,'얼른 보기에는 깨끗한 목재로 단정하게 꾸며논 것이 모두 일본제 비슷'했지만 ‘내부는 서양식,조선식까지 절충한 화양(和洋)잡종식’이었다. 남료(南寮), 중료(中寮), 북료( 北寮) 세채가 나란히 서있었다.

마루를 앞에 끼고 방들이 늘어서있는데,한방엔 최대 4명씩이었다. 정원 67명에 현재 64명이 입주했다. 방 내부는 조선식 온돌에 한쪽 벽에 벽장 4개가 설치돼 소지품은 모두 벽장안에 보관했다. 책상도 학교에서 마련해준 것으로 색깔과 모양이 같아서 한층 더 정돈돼 보였다. 채광이 잘돼 위생상 매우 좋아보였다고 썼다.

식당의 식탁엔 한 상에 8명씩 앉게 돼있다.식당 옆은 목욕탕이었다. '목욕탕은 전부가 돌로 되어 위생상으로 보든지 모양으로 보든지 실로 이 기숙사의 자랑거리가 될만하였다.' '10분 가량으로 물이 더워진다고 한다'

목욕탕 뒷방은 세면소와 화장실.'깨끗하기가 방과 같아 죄다 맨발도 통하게 되었다. 기자는 '사실 이 학기에 처음 들린 집이라 깨끗한 것이 이 기숙사의 특징'이라고 썼다. 외출은 수,금,일요일, 주 사흘 가능했다.(‘새로 지은 깨끗한 집에 가정적인 것이 특색’, 1930년 9월5일자)

숙명여학교는 1930년 기숙사를 신축했다. 목욕탕에 온수가 나오고, 화장실은 방처럼 깨끗한 게 자랑거리였다./조선일보 1930년 9월5일자

◇ ‘2층 양옥 넓은 집속에 호사스러운 그들’

이화여학교 기숙사는 2층 양옥이었다.한 방에 2~3명씩 100명을 수용했다. ‘무엇보다 주방이 밝고 넓은 것이 보는 이에게 깨끗한 감을 주었다.’ ‘빨래는 월요일 세탁하는 사람이 걷어 빨아온다.’ ‘한칸 반쯤 되는 방 양쪽에는 침상, 가운데는 책상 2개와 방석이 나란히 놓여있다.’ 식비는 월 11원, 기숙사비 2원이었다. 매일 오전6시 기상, 밤10시 취침에 미션 스쿨이라 매일 아침 기도회가 있다. ‘다 쓰러져가는 우리 집들에 비해서는 호사스러운 생활이었다’는 게 기자의 인상이었다. (’이층 양옥 넓은 집속에 호사스런 그들의 생활’,9월7일자)

◇식당 메뉴 선정부터 운영까지 학생 자치

진명여학교 기숙사의 특징은 '무엇이든지 학생의 손으로 경제와 자치적 정신을 양성'하는 데 있었다. 한달 식비와 사비를 합쳐 12원.'찬을 정한다든지 상을 본다든지 하는 것도 전부 학생의손으로 되어 있으며 빨래와 그 밖에 모든 것을 죄다 학생의 손으로 하게 하여 없는 우리 살림에 할 수있는대로 경제해나가도록 하는 동시에 자치를 주관으로 한다'는 설명이었다. 학생들의 자립심도 길러주고, 인건비 등 경비도 절약하는 묘책이었다.

진명에는 바느질을 하거나 야간 소등후에도 쓸 수있는 '자유의 방'이 있었다.'공부가 하고 싶어도 불끈 후에는 자기 방에서 못하게 되니까 그런 경우에라도 하고싶은 사람은 언제나 여기 와서 할 수있게 새로 된 것'이라고 했다. 면회실을 따로 마련해 방과후 면회가 가능하고, 전화가 걸려오면 이곳에서 받도록 했다.(‘무엇이든지 학생의 손으로 경제와 자치적 정신을 양성’, 9월10일자)

이화여학교 기숙사는 2층 양옥에 100여명이 지냈다. 한방에 2명~4명이 썼다. 매주 월요일 빨래를 걷어가는 론드리 서비스까지 있어서 '호사스럽다'는 얘기까지 들었다./조선일보 1930년 9월7일자

◇옷 삶을 수있는 세탁실이 자랑거리

60여명이 사는 정신여학교 기숙사는 4층 건물의 3층에 있었다.이 기숙사의 자랑거리는 세탁실이었다. 독립 건물로 마련한 세탁실은 시멘트 바닥에 넓다란 돌을 깔아 빨래판 대신 썼다. 옷을 삶을 수 있는 커다란 솥도 3개를 걸어놔 한 자리에서 세탁을 끝낼 수있었다. 주방은 당시로선 첨단설비인 가스를 사용해 음식을 조리했다.식비 9원과 사비2원, 도합 11원을 냈다.(‘학교와 기숙사가 함께 있어 설비 완전한 것이 자랑’, 9월11일자)

◇태화여자관 연합기숙사

여러 학교 학생이 함께 사는 연합 기숙사도 있었다. 태화여자관이 운영하는 태화여학교 기숙사였다.많을 때는 11개교 학생이 있었는데, 취재 당시엔 7개교 여학생이 머물렀다.

옛날 한옥을 개조한 집이었다.'전체가 옛날 집이었으나 높고 넓은 것이 섣부른 2층집보다는 시원해보였다.’ 정원은 30명으로 한방에 2명 또는 4명씩 지냈다. 목욕탕이 없고,가끔 강도가 들어 담을 새로 쌓았다고 소개했다.(’학생이면 다 있을 수 있는 ‘내집’셈인 공개기숙사’, 9월9일자)

◇외출은 1주일에 2번, 사감이 편지 검열

금남의 집인데다 당시 여학교에 대한 외부 시선을 의식한 탓인지 규율은 꽤 엄격했다. 외출은 주3회에서 격주 1회까지 제한했다. 소설 ‘B사감과 러브레터’처럼, 서신왕래도 대부분 사감을 거쳐야했다.그래도 구식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또래끼리 처음으로 공동생활을 꾸린 여학생들은 대만족이었던 모양이다.

1931년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한 소프라노 채선엽은 호남 부잣집 출신이다. 기숙사가 불편했을 법하다. 하지만 기숙사를 낙원으로 기억했다. '여기서 우리들은 기숙사 방을 아름답게 꾸미고 사는 방식을 배웠으며 예수의 정신 안에서 가족같이 서로 사랑하는 생활을 터득했으며 방 언니가 되는 경험에서 남의 위에 선 사람은 어떻게 전체의 화목을 도모해야 하는지 또 공동 생활에서 길러진 자기 희생적,봉사적 정신이 사회에 나갔을 때 또 가정을 이루었을 때 그대로 산 지식이 되어주었다'고 회고했다 그리하여 '우리들에게는 낙원이었던 기숙사 생활,그러기에 졸업을 하는 학생들은 학교를 떠나가는 것이 서러워서 우는 것보다도 정말은 이화 기숙사를 하직하는 설움이 커서 졸업을 하고 기숙사에서 짐을 가지고 나가는 전날 밤엔 눈이 붓도록 우는 것이었다'고 했다.

◇ ‘에덴 낙원의 선녀놀음’

채선엽의 동기생 모윤숙은 새학기초 전국에서 모인 학생들이 고향에서 가져온 푸짐한 간식을 나눠먹는'팔도간식파티'를 기숙사생활의 별미로 꼽았다. 평양 출신이 가져온 찹쌀로 빚은 떡 '노티',개성의 강정,함흥 출신인 모윤숙이 가져온 콩가루를 묻힌 수수엿 등이 나왔다. 평양 노티가 제일 인기였다고 한다. 어느 배화학교 학생은 또래들과 어울린 공동생활의 재미가 ‘기숙사의 거친 밥도 맛있게’ 느껴질 만큼 ‘에덴 낙원의 선녀놀음’(‘언니야, 아우야’,조선일보 1924년11월1일)이라고 했다. 구식(舊式)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 근대 교육을 받던 여학생들에게 기숙사는 신세계이자 ‘에덴 낙원’이었던 셈이다.

◇참고자료

김초강 외 지음, 이화기숙사 110년 이야기, 이화여대출판부,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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