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공백 와중에 출간된 ‘영등포 슈바이처’ 이야기

김한수 기자 2024. 4. 13.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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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간 가난한 자에 헌신… 선우경식 원장 전기 나와
요셉의원 선우경식 원장은 "여기서 마지막을 맞을 것"이라고 했다. /조인원 기자

남수단에 이태석(1962~2010) 신부가 있었다면 영등포역 쪽방촌엔 선우경식(1945~2008) 원장이 있었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행려병자, 노숙인, 쪽방촌 주민 등을 헌신적으로 돌보다 63세의 아까운 나이에 선종(善終)한 요셉의원 선우경식 원장의 전기 ‘의사 선우경식’(위즈덤하우스)이 출간됐다. 저자는 ‘간송 전형필’ ‘혜곡 최순우’ ‘김대건, 조선의 첫 사제’ ‘아, 김수환 추기경’ ‘신부 이태석’ 등을 펴낸 전문 전기 작가 이충렬씨.

선우경식 원장이 지난 2003년 요셉의원에서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평생 행려병자, 노숙자 등 극빈층을 돌봐온 그는 생전에 "가장 무능력한 환자가 나에겐 선물"이라고 말하곤 했다. /조인원 기자

책을 펼치면 ‘비현실적’ 인물의 삶이 펼쳐진다. 가톨릭의대 졸업 후 미국 내과 전문의 자격을 따고 서울 종합병원의 진료부장까지 지낸 그는 평생 ‘돈은 안 되고 힘만 드는 일’을 찾아다녔다. 1987년 서울 신림동에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부설 무료 병원으로 문을 연 요셉의원 원장을 맡을 때 생각은 ‘3년 만’이었다. 그 ‘3년 만’은 21년간 1997년 영등포 이전 후까지 이어졌다. 바탕엔 천주교 신앙이 있었다. 그는 프랑스 출신으로 사하라 사막 원주민을 위해 일생을 바친 샤를 드 푸코(1858~1916) 성인을 따르는 ‘예수의 작은 형제회’ 재속 회원이었다.

1997년 9월 요셉의원이 서울 신림동에서 영등포역 옆으로 옮겨 재개원할 때 방문한 김수환(오른쪽) 추기경과 선우경식(왼쪽) 원장. 낮고 어두운 곳일수록 밝게 웃었던 김 추기경이 가장 환하게 미소 지은 곳이 요셉의원이다. /조선일보DB

요셉의원 원장이라는 자리는 구걸이 일이었다. 뉴욕에서 사업하는 동생이 보내준 비행기표로 미국에 건너가 옛 동료 의사들에게 호소해 무료 샘플약을 30㎏짜리 캐리어 2개 가득 담아오는 것은 차라리 쉬운 일. 자원봉사 의료진이 자신들의 근무처에서 퇴근해 요셉의원으로 출근하는 저녁 7시까지 오후 시간에 환자를 맞이하는 것은 오로지 원장인 그의 일이었다. 씻지 않은 몸에서 나는 악취와 술냄새, 시비와 싸움이 일상이지만 선우 원장은 찌푸리지 않았다. 환자들은 육체 이전에 마음이 먼저 무너진 경우가 대부분. “가장 무능력한 환자가 나에겐 선물”이라고 한 선우 원장은 그 마음까지 안아주려 애썼다. 백방으로 부탁해 환자들이 무료로 수술받도록 도왔다. 요셉의원뿐 아니라 전북 고창의 한센 환자 시설, 서울의 성매매 여성 쉼터 등도 시간 날 때마다 찾아 진료했다. 그가 마지막을 돌봤던 간암 노숙인은 자신의 시신 기증을 부탁하기도 했다. 환자들이 노숙 생활을 벗어나 자활하는 것은 선우 원장의 가장 큰 보람이었다.

이런 모습에 후원 회원과 익명 독지가의 후원이 잇따랐고 호암상을 비롯한 상금은 모두 병원 운영에 보탰다. 그의 결혼을 위해 부모님이 모아둔 자금도 1997년 요셉의원의 영등포 이전 자금으로 쓰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든든한 울타리였다. 2010년 2월 요셉의원엔 ‘주님 부활의 기쁨이 가득하기를. 천국에서 김수환 추기경’이라고 쓰인 봉투가 도착했다. 봉투 안에는 200만원이 들어 있었다. 비서 수녀였던 노 율리안나 수녀가 “김 추기경이 생전에 부탁했던 일”이라며 1주기 추모 행사를 마치고 남은 금액을 보내온 것. 김수환·염수정 추기경 등이 요셉의원 미사에서 가장 많이 인용한 성경 말씀은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는 마태오복음 구절이었다.

2007년 10월 요셉의원 20주년 기념 행사.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빠진 선우경식 원장이 참석자들에게 요셉의원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선우 원장은 이듬해 선종했다. /김한수 기자

정작 자신과 주변에 대해서는 소홀했다. 부친이 간암 말기에 이르도록 발견하지 못하고 2000년 이별해야 했던 그는 “한 집에 살면서 위중한 병환을 눈치조차 채지 못한 나는 아들 이전에 부끄러운 의사였다”고 고백했다. 자신의 위암 또한 놓쳤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작은 재 한 조각 남기지 않은 완전연소의 삶, 장엄한 낙조를 연상케 한다.

'의사 선우경식' 표지.

책 마지막에는 그의 손글씨 고백이 사진으로 실렸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지 않고 다른 길로 가고 있다. 나는 나의 양들인 환자를 잘 돌보지 않고 양의 털을 깎아 먹는 데만 열중하고 있다. 나는 칭찬받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올바른 충고를 듣기 싫어한다. 나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면서 단것만 찾아다닌다. (...) 나는 선량한 힘없는 사람과 손을 잡고 일하기를 피하고 도둑 같은 힘 있는 사람과 손잡고 일하기를 원한다. 나는 사랑, 사랑하면서 사랑의 말을 입술에서 떠나지 않게 말하지만 사랑하지 않고 있다.”

선우경식 원장이 손으로 쓴 고백의 글. 전기를 통해 처음 공개됐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선우 원장 모습과는 정반대의 고백이다. 설립 이후 지금까지 요셉의원이 돌본 환자는 연인원 75만명이다. 책의 인세는 요셉의원에 기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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