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버린 ‘베트남전 국군포로’ 고 유종철…현충원에도 못 묻히나

고경태 기자 2024. 4. 12.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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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 전사처리로 비석 세운 뒤 파묘…51년간 비워놔
국립현충원 “결격사유 발견…안장 여부 불확실해”
전우회 “전사처리는 국가 잘못…본래 자리 묻혀야”
서울 동작동 서울국립현충원 제3-1묘역에 고 유종철씨의 비석이 1년간 세워져 있던 묘역 자리가 비어있다. 해당 묘역은 51년간 이렇게 비어 있었다. 고경태 기자

‘월남에서 전사’라고 새겨진 비석들이 줄지어 이어지다가 뚝 끊긴다. 한 자리가 눈에 띄게 비어있다. 서울 동작동 서울국립현충원 제3-1묘역. 3994에서 시작한 비석 번호는 4022까지 갔다가 4024로 하나를 건너뛴 뒤 4184까지 이어진다. 현충원 관계자는 “4023번은 파묘지”라고 말했다. 이 자리는 51년간이나 비어있었다.

이 묘역의 주인공은 베트남전에서의 전투 중 실종됐으나 지휘관의 허위보고로 전사 처리됐다 북베트남군 포로 석방으로 풀려난 맹호부대 기갑8중대원(일병) 출신 유종철씨다. 베트남전 당시 최초의 국군 포로로 이름을 알렸던 그가 지난 6일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원래 자신의 묘역에 돌아올 수 있을지가 주목된다. 고인의 가족들은 “발인을 마치고 서울국립현충원에 안장 신청을 했다”고 말했다. 유씨가 속해 있던 전우회 관계자도 “당연히 본인 자리에 돌아와 묻혀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현충원 관계자는 “불확실하다”는 입장이다.

서울국립현충원 김성근 안장팀장은 “유씨의 경우 신원조회 결과 결격사유가 드러나 보훈부 안장대상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야 하는 것으로 안다. 5월 중순에 결과가 나온다”고 말했다. 또한 “안장 대상으로 결정돼도 본인의 원래 자리에 모실지 납골당인 충혼당으로 갈지도 검토를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심의를 거쳐 현충원에 안장돼도 반드시 본인 묘역으로 돌아오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인데, 이에 대한 자세한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결격사유가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고, 1975년의 일이라고만 했다. 서울국립현충원은 현재 국방부 소속으로, 오는 7월부터는 보훈부로 이관된다.

유종철 일병의 귀환 소식을 알리는 1973년 3월28일치 동아일보 1면 기사.

고 유종철씨는 1972년 4월 북베트남군이 기습 점령한 퀴논 인근 638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안케패스 전투에 참여했다가 포탄을 맞고 기절해 적군에게 포로로 잡혀 330일간 포로수용소 등에 억류됐다. 유씨는 억류 중 탈출을 기도하다 잡혀 가혹행위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 중대에서는 유씨의 시신을 찾지 못해 서무병 김아무개씨가 실종자 처리를 하려 했으나 지휘관이 전사 처리를 강행해 병사들의 강력한 반발을 샀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1972년 4월19일 유씨의 가족에게 전사통보가 이뤄졌고, 4023 묘역에 유종철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세워졌다. 비석 아래에는 다른 전사자의 유골을 나눠 넣었다고 한다.

하지만 1년 뒤인 1973년 3월25일 북베트남(베트남 민주공화국) 정부는 미군 포로 566명과 함께 유일한 한국군 포로로 유씨를 석방했다. 미국·북베트남·남베트남(베트남공화국)이 파리 평화회담에서 ‘베트남전쟁 종결과 평화회복’에 합의한 직후였다. 3월15일 전 병력 철군과 함께 “베트남전에서 포로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발표한 한국군 당국으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국방부 장관은 국군 포로라는 사실이 부각되지 않도록 3월27일 대한항공편으로 귀국하는 유종철씨에게 민간인 복장을 입히도록 하기도 했다.

고 유종철씨. 유족 제공

이런 사정 탓에 호적초본에 ‘부활’이라고 적히게 된 유씨는 생전 “묘비를 파내고 내가 언젠가 죽었을 때 이 자리에 묻혀서 같이 싸우다 전사한 동료들과 함께 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당시 국방부나 현충원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비석 없이 해당 묘역을 비워놓았다. 그는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베트남전 국군 포로였으나 국군 포로로 인정은 받지 못했다. 이로 인해 평생 울화에 시달렸고, 관공서 민원실에 찾아가 항의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유씨 별세 직후에도 국방부 장관은 빈소에 조화를 보내지 않았다.

안케패스 대혈전 전승 전우회 이필영 운영위원장은 “유씨는 당시 국가의 명백한 잘못으로 긴 억류생활을 했다. 실종자를 찾기 위한 협상조차 하지 않고 전사자로 처리해버렸다. 그 어떤 결격사유가 있는지 모르지만 현충원 본래 자리에 묻게 해줘야 한다. 역대 현충원장들도 그렇게 약속하고 자리를 비워놓은 것으로 안다”고 했다.

유족들은 8일 발인을 마친 뒤 고인의 유골을 경남 밀양 만어추모공원에 임시 안치해놓은 상태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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