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개엔 능이·싸리·밀 버섯 가득…냄비 밥과 15가지 찬도 줘유

오윤주 기자 2024. 4. 12.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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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소문나면 곤란한데
청주 버섯찌개전문점 오정식당
청주 오정식당 버섯찌개와 반찬. 오윤주 기자
관광객을 상대하는 북적이는 ‘TV 맛집’은 사절합니다. 지역의 특색있는 숨은 맛집, 누가 가장 잘 알까요? 한겨레 전국부 기자들이 미식가로 이름난 지역 공무원들에게 물었습니다. 대답을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한두 군데 마지못해 추천하면서 꼭 한마디를 덧붙이네요. “여기, 소문나면 곤란한데.”

충북 청주의 봄은 무심천 벚꽃과 함께 온다. 무심천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버들가지에 물이 오르면 비로소 봄이다. 추적추적 봄비까지 내려 딱 국물을 부르는 지난 1일, 김성일(57) 충북도 보도팀장, 박순화(56) 미디어홍보팀장을 만나 청주의 맛집으로 향했다. “육거리 오정식당으로.” 충북도청 식객인 둘에게 두 달 전 숨은 맛집을 주문했다. 괴산이 고향인 박 팀장, 괴산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김 팀장은 애초 괴산의 올갱이(다슬기)식당과 칼국수를 추천했는데 두 곳 모두 허탕을 친 터라 기대감은 더 커졌다.

청주 오정식당. 오윤주 기자
청주 오정식당. 뒤로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는데 이곳은 애초 옛 도심이었다. 오윤주 기자

‘오정식당’은 옛 도심인 청주시 상당구 대성로(서운동) 길옆에 있다. 저녁 7시가 조금 넘었는데 길 건너 주유소 빼곤 주변이 암흑이다. 멀리 고층 아파트의 불빛이 쇠락한 옛 도심을 내려보는 듯해 씁쓸하기까지 하다. 서운동 성당 근처에 와 택시에서 내리니 불빛도 없는 ‘오정식당’ 간판이 어스름이 보인다. 안에서 새 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자연산 버섯찌개 전문’이라는 색바랜 글자를 비추지 않았다면 지나쳤을 것이다.

유리문에 붙은 ‘미세요’에 따라 문을 밀었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식당 앞을 지나던 이가 혼잣말하듯 던진다. “옆으로 미는건디.” 잽싸게 그 말을 주워 옆으로 밀었더니 ‘스그그극’하는 마찰음과 함께 빡빡한 문이 열렸다. 세 평 남짓한 공간, 꽃망울을 터뜨린 철쭉 등 화분이 눈에 들어온다. 벽에 걸린 2단 선반엔 접시, 냄비가 가지런하다. 가스레인지까지 있지만 주방이라고 하기엔 단출하다.

청주 오정식당 내부 공간. 오윤주 기자

헌데 식탁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구두 두 켤레, 앞 막힌 낡은 슬리퍼 하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밖으로 나가 다른 입구를 찾았을 것이다. 족히 1m쯤 되는 봉당 같은 문턱을 딛고 올라 다시 삐걱거리는 문을 열자 두런두런 소리가 들린다. 대여섯 걸음 걸었더니 방인 듯, 마루인 듯, 거실인 듯한 공간이 나타난다. 온기 남은 난로 옆엔 연탄이 가지런히 쌓여있다. 요샌 좀체 보기 드문 구조다. 문 열린 방 안에서 김 팀장, 박 팀장과 더불어 발갛고 동그란 얼굴의 오정식당 사장 오정재(78)씨가 수다 삼매경이다.

“좀 늦었네유. 이분들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는디. 여기 앉아유.”

시대를 알 수 없는 빛바랜 팔폭 병풍, 검은색 앉은 식탁, 빨간 방석이 묘하게 조화롭다. 냄비엔 넘칠 듯 가득 담긴 찌개가 빗소리와 어우러져 식욕을 돋운다. “후래 삼배 알지유.” 느닷없는 오씨의 한칼에 자리가 웃음으로 가벼워졌다.

뽀얀 접시에 담긴 반찬이 정갈하다. 아삭하게 잘 익은 김치가 중심을 잡고 가로 다섯 줄, 세로 세줄 열다섯 가지 반찬이 줄을 맞춘 듯 가지런하다. 냉이·뽕잎 등 연두색 봄나물, 시래기·고구마 줄기·취나물 등 묵나물, 깻잎·마늘종 등 절임, 콩자반·다시마 부각 등 밑반찬이 조화롭다. 셋의 젓가락이 춤을 춘다.

“장모께서 음식을 잘하시는데 꼭 그 맛이네요.” 김 팀장이 운을 떼자, 박 팀장은 “모든 찬이 원재료 제맛을 지니고 있어요. 간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아 좋아요. 울 엄마 맛”이라고 받았다. 박 팀장은 “엄마가 평소 음식 만들 때 양념 제대로 넣지 않는듯한데도 감칠맛이 났다. 5년 전 요양원에 모셔 이제 그 손맛을 못 느낄 줄 알았는데 오늘 그 맛을 느낀다”고 했다. 오씨가 ‘도청 이쁜이’로 부르는 박 팀장의 눈가에 물기가 비친다.

청주 오정식당 오정재씨와 충북도청 박순화 팀장. 오윤주 기자
청주 오정식당 오정재 사장. 오윤주 기자

“뭐 따로 넣는 것은 읍써유. 그냥 울 애덜 먹인다는 마음으로 정성껏 하니 다들 좋아해 주시는 거지유. 잘 드시는 분이 제일 이쁘니께 많이들 드셔주면 고맙쥬.”

식탁을 가득 채운 나물 반찬은 오씨의 고향 보은에서 오고, 건어물 등은 식당에서 100m 남짓한 육거리시장이 주 구매처다. 보은에서 온 나물을 손질해 냉장고 다섯개에 보관하다가 때에 맞춰 버무려 낸다.

오씨는 보은읍 이평에서 나고 자랐다. 전엔 뱃들이라고 불렀다. 서울에서 잠깐 직장 생활을 하다 대전을 거쳐 청주에 정착했다. 1980년 지금의 식당 자리에서 아이를 업고 음식 장사를 했다. 무엇보다 버섯찌개가 인기를 끌어, 1995년부터 메뉴판도 없이 버섯찌개 하나만 판다. “아는 사람만 와유. 옛날 음식 좋아하는 공무원·기업인 등도 제법 찾아오곤 했쥬. 그 덕에 입에 풀칠하고, 애들 잘 키웠으니 원도, 한도 없어유.”

청주 오정식당에 걸린 시화. 오정재 사장의 딸이 쓴 글인데 20여 년째 벽에 걸려있다. 오윤주 기자

식당의 벽 곳곳엔 액자가 걸려있다. 음식을 먹고 간 유명인들의 사인 액자 사이로 시화 두 개가 유난히 도드라진다. “아픔으로 맺힌 당신 생이 큰 기쁨으로 숨 쉬는 바다를 만날 때까지 함께 흘러가리요”(어머니의 눈물-나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아무런 조건 없이 내가 이 길을 걸어온 까닭은 항상 나의 동반자가 되어 주신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여~”(나의길)

“지금은 마흔다섯살이 된 우리 딸이 쓴 것이니 20년 훨씬 넘게 걸려 있었시유. 저게 내 자랑이고, 힘이유.” 오씨가 액자를 보며 말했다.

오정식당 버섯찌개엔 능이·싸리·밀 버섯 등이 들어가는데 모두 보은 회인·마로, 경북 상주 등의 산에서 나는 자연산이다. “보은에서 식당 하는 언니가 주변 산사람들한테서 사서 주면 염장해서 쓰는데 요즘 버섯이 들쭉날쭉해 넉넉히 장만 못 하고, 값도 쎄유. 그러니 정말로 소문나는 것 안 좋아해유. 그냥 아는 사람들, 단골들 밥해주는 재미로 하는 거지유.”

고춧가루를 품은 찌개는 칼칼한 듯 부드러운 감칠맛 속에 쌉쌀함이 배어 있다. 오씨가 찌개의 불을 줄였다 키우기를 반복하며 틈틈이 이야기 반찬까지 곁들이는데 정겹다. 오씨는 “한번은 법원장인가 하는 높은 양반이 다녀간 뒤 그 아랫사람이 다짜고짜 ‘음식에 뭘 넣었길래 설사를 하셨다’고 쏘아붙이길래, 버섯하고 정성밖에 안 넣었다고 맞받았다”며 “며칠 뒤 그 법원장이 ‘아랫사람이 무례했네요. 덕분에 돈 안 쓰고 장청소 잘했으니 고맙습니다’라고 한 뒤 단골이 됐다”고 말했다.

청주 오정식당 오정재 사장이 냄비밥을 뜨고 있다. 오윤주 기자

반찬과 찌개만으로도 이미 거한데 오씨가 펑퍼짐한 냄비 하나를 들고 왔다. 뚜껑을 열자 뽀얀 김과 구수한 밥 냄새가 눅눅한 방안을 덮는다. 뚜껑을 밀어낼 듯 양이 엄청나다. “이걸 누가 다 먹어요”라고 하자, “남으면 낼 아침 먹으면 되지유. 밥배, 찬배 따로 있슈”라며 오씨가 밥을 뜬다.

도저히 못 먹을 줄 알았는데 밥이 들어간다. 덤으로 내온 고추 부각과 들기름 바른 김이 밥 도둑이다. 고추는 입은 맵다는데 젓가락을 멈출 수 없는 마법을 지녔다.

오씨는 지금껏 냄비 밥을 고수한다. 찌개와 나물 반찬엔 찰진 압력솥 밥보다 고슬고슬한 냄비 밥이 제격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냄비 밥 비법도 공개했다. “밥이 끓으면 불을 줄이고, 끓는 밥을 주걱으로 이리저리 뒤집은 뒤 불을 줄여서 뭉근하게 뜸을 들이는 게 중요해유. 좁고 움푹한 냄비보다 펑퍼짐한 냄비에 안쳐야 불기운이 골고루 번져 설익거나 쉬이 타지 않쥬.” 이 비법은 야외에서 코펠로 밥을 지어야 하는 캠핑족이 써도 좋을 듯하다.

냄비 밥 강의에 취해 눌은밥 담긴 숭늉까지 비우고, 시꺼먼 냄비 바닥과 빈 반찬 접시를 본 뒤에야 일어섰다. 방을 나서면서 옆 방을 흘끔 했더니 아무도 없다. 폐백 때 펼쳐놓는 듯한 빨간 병풍 앞에 식탁 두 개가 놓여 있다. “원체 예약 손님만 받는데 요샌 힘도 들고 해서 될 수 있으면 아는 손님만 받으려 해유.”

오씨는 평생 함께한 오정식당이 대성로 확장 계획에 편입돼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혼자 몸으로 자식 키우고 지금도 좋은 사람들과 추억 나누며 잘살고 있고, 바로 앞 성당에서 하느님이 지켜준 탓인지 도둑 한번 들지 않아 나한텐 천하의 명당”이라며 “그동안 아껴준 이들에게 따순 밥 한술 대접하고 조용히 사라지면 좋겠다”고 했다.

오윤주 기자 st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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