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古代)에서 날아온 정령(Spirit)과 풍경 속을 거닐다

심정택 칼럼니스트 2024. 4. 12. 09:0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상경 작가 개인전 《소녀와 레후아》, 4월12일까지 떼아트갤러리에서 개최

(시사저널=심정택 칼럼니스트)

'니가 가라 하와이!'는 영화 《친구》가 낳은 유행어다. 김상경 작가(55)는 2018년 가족들과 함께 태평양 한가운데의 섬 하와이를 방문했다. 네 개의 섬 중 와이키키 해변을 가진 오아후섬, 할레아칼라 국립공원이 있는 마우이섬 등 세 곳을 방문했다. 첫인상은 제주도와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작업 대상에 대한 이 첫 마주침은 김 작가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처음 당도하는 장소의 인상을 사진으로 기록한 후 작업실에서 당시 느낌을 되살려 스케치를 한다. 대형 작업들은 처음에는 4~15호(33×21~65×50cm) 크기의 에스키스(esquisse·초벌그림)로 방향을 분명히 잡고, 본래 크기 화폭에서 첫 느낌이 충분히 드러나게 작업한다.

ⓒ시사저널 임준선
ⓒ시사저널 임준선

까마귀를 도상으로 선택하는 작가 드물어

무엇보다 자연의 생명력 넘치는 풍경은 작가에게 창작 의욕을 북돋는 계기를 만든다. 2010년 암 수술 직후, 제주도의 오름과 삼나무 숲에서 맞닥뜨린 까마귀가 그랬다. '바둥바둥 살려는 의지'가 강해 그런지 청랑하고 서늘한 공기, 인적 없이 탁 트인 공간, 키 높은 삼나무 숲을 오감으로 호흡했다. 날카롭게 거슬리지만 포개진 공기 층 사이에서 나는 까마귀 울음소리는 낯선 방문객에게 '너희는 뭐니?'라고 말을 거는 듯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나무가 발산하는 향과 습기로 가득한 초록 잎 무성한 숲속 멀리 머리 위에서 들리는 소리는 낯설었으나 신비스러웠다. 까마귀는 숲을 지키는 정령(精靈)으로 다가왔다."

김상경에게 '자연의 힘'을 대변하는 존재로 다가온 까마귀는 고대(古代)의 길조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삼족오'가 그렇다. '견우와 직녀' 설화에도 까마귀는 선한 영물(靈物)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다시 살아났다'고 말한 작가에게 까마귀는 아들의 태몽에 나타난 독수리이며 인간의 기원이 담긴 '영험한 동물' 반열에 올라있다.

미술시장을 고려하면 까마귀를 도상(圖像)으로 선택하는 작가는 많지 않다. 하지만 카스파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1774~1840)로 대표되는 독일 낭만주의에서 나무와 까마귀는 당대의 전형적 도상이었다.

하와이에는 제주도보다 강렬한 햇볕과 키 큰 나무들, 다양하고 화려한 식물군들이 자생한다. 그는 자연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에서는 강렬함을 누구러뜨리고 화려한 색채로 표현했다. 아울러 제주와 하와이에 자생하는 까마귀를 내륙과 대륙의 생태계와는 단절된 섬 안에 엉클어져 살아가는 동식물과 함께 풍경 속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인간의 언어가 존재하지 않을 때 동굴에 날아든 새가 박제된 고대 생물이 되살아나 그림 속 화자(話者)가 된 것이다.

작가는 하와이에서 제주도와의 연관성, 유사한 점을 찾은 듯했다. 식물, 토양의 색, 피부에 와닿는 햇빛 등. 까마귀를 찾아보니 보호종으로 지정돼 있었다. 사회문화적인 매개체로서 그 지역의 정령으로 이해했다.

김상경에게 '그리고자 하는' 열망은 풍경(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선)이 바뀌었기 때문에 생길 수 있었다. 그녀의 풍경에는 살아 숨 쉬는 경계에서 죽음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슬픈 두려움'조차도 감싸는 힘이 있다. 풍경은 캔버스 프레임 안에 있으나 작가의 지향점은 광대하다. 색은 살아 움직이듯, 화산의 용암이 분출하듯 흘러 넘친다. 작가는 '자기만의 색을 가지고 다닌다'는 표현을 한다. 전시 《소녀와 레후아》에서는 대지가 산호 빛을 띠고 있다.

어릴 적 딸 모티브로 소녀의 얼굴 그려

현대미술의 살아있는 신화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1937~)가 숲속 빛의 물결을 그렸다면, 김상경은 세상만물의 모태(母胎)인 대지의 기운을 드러냈다. 2023년 근작들은 하와이섬의 토종 식물 오히아레후아를 배경으로 소녀와 새들이 소재이며, 카우(여름)에서 후이로(겨울)로 넘어가는 계절 변화를 암시하는 몽환적이면서도 뚜렷한 색감을 특징으로 한다.

《오히아레후아(Ohia lehua)와 소녀》에 등장하는 소녀는 수술 전에 병실을 찾았던, 차분하지만 심각한 표정의 어릴 적 딸이 모티브다. 작가는 본능적으로 딸의 동작과 표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생과 사의 엇갈림에서 스쳐 지나가듯 체득한 감각은 스케치로 옮겨져 '소녀의 얼굴'이 된 이래 10여 년이 지나서도 동일한 모습을 띠며 작가의 페르소나가 됐다.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1856~1939)는 인간이 의식의 촛불을 끈 채 무의식의 존재인 흙이나 돌로 돌아가고자 하는 (죽음)충동, 즉 타나토스(thanatos)가 있다고 봤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1901∼1981)은 이를 인간 스스로의 고된 노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본능으로 이해했다. 김상경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타나토스를 쫓지 않았다. 진리 너머 실재인 '완전하게 충만된 본질'을 풍경으로 그렸다. 전시 《소녀와 레후아》는 서울 종로구 평동 '떼아뜨갤러리'에서 4월12일까지 열린다.

Copyright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