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윤’ 정치…이중의 환멸 속에서 [김명인 칼럼]

한겨레 2024. 4. 12.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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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언필칭 진보세력들은 현재 한국 사회구조의 진정한 피해자들을 대변해줄 제대로 된 대안 담론도 생산해내지 못하고 있으며 그에 따른 정치사회적 행동도 조직해내지 못하고 있다. 대신 그들은 ‘민주당=진보’ 등식에 나태하게 편승하거나 아니면 냉소주의라는 또 다른 안전지대에 숨는다. 비루와 비겁 사이의 왕복이다.

김명인 | 문학평론가·인하대 명예교수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마무리되었다. 이미 선거 국면 막판에 들어서며 각종 여론조사나 전문가들이 예측한 바와 같이 더불어민주당이나 조국혁신당 등 정권심판론을 내세운 범야권 ‘반윤동맹’ 세력이 절반을 훌쩍 넘는 절대다수의 의석을 차지하는 결과가 나왔다. 집권여당의 과반 의석 확보라든가 범야권의 3분의 2 이상 의석 확보 같은, 향후 정국을 요동치게 할 극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 총선은 냉정히 평가하자면 여야 정치세력이 헛힘만 쓰고 만 제자리걸음 총선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현 정권 2년에 넌더리가 나 심판표를 던진 다수의 국민에게는 이런 정도의 결과가 도저히 성에 차지 않겠지만 결과만으로 본다면 반윤동맹의 승리이기는 하다. 현 윤석열 정권은 집권 중반임에도 국민의 지지는커녕 사실상 불신임에 가까운 옐로카드를 받아든 셈으로 향후 국정운영에서 어떠한 주도권도 행사하기 힘든 식물 상태를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집권여당인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당선자는 당선자대로, 비당선자나 공천 탈락자는 그들대로 더 이상 윤 대통령에게 충성을 바칠 일말의 동기도 사라져버려, 아마도 단순한 레임덕을 넘어 상당한 내분과 심지어 하극상까지도 만연할 것이 명약관화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행태로 볼 때 총선에서 과반을 얻지 못했다고 해서 윤 정권, 아니 정확히 말해 윤 대통령이 변화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직 행정부 권력을 장악하고 있고 무엇보다 내치·외치에 걸쳐 정책 기조를 바꿀 의지도 능력도 의심스러운데다가 거부권 행사라는 전가의 보도도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은 3년 동안 또 다른 극적인 변화가 없는 한 거대 양당의 ‘적대적 공존’을 기본 골격으로 하는 지금과 같은 지루한 혼란상만 끝없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이번 총선은 여당이 절반을 넘는 비상사태가 일어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절반의 성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또 한번의 선거가 끝났다. 그리고 한국 정치에 대한 또 한번의 환멸이 추가되었다. 이번 선거 역시 한국 현대정치사를 관통하며 끈질기게 작동해왔던 민주/반민주 구도에서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했다. 현 정권의 ‘검찰독재’에 가까운 신종 공안통치가 어렵게 형성된 민주질서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으며 여기에 국제정치 지형에서의 친미·친일 편향, 현대사 해석에서의 급격한 극우 편향이라는 위험한 도박이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게다가 대통령이라는 최고 권력기관에서 연거푸 발생하는 예측불허의 사건·사고들 역시 민주주의의 지속가능성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정권심판론의 정당성과 시급성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본다면 현 정권의 특수한 성격에서 오는 이러한 민주주의의 위기는 일시적이고 단기국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는 기후위기는 물론이고 저성장·저임금·고금리·고물가의 수렁에 빠진 경제위기, 불평등·불공정 분배에서 오는 양극화와 계급 갈등, 저출생과 고령화, 젠더 및 세대 갈등 같은 사회위기로 이루어진 이런 다중위기 상황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직면한 보다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도전으로, 이번 총선은 이런 중대한 위기적 의제들이 전면에 내세워졌어야 하고 이를 기준으로 투표 행위가 이루어졌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의제들은 이번 총선에서 정권심판론의 기세에 가려 가뭇없이 실종되었다. 서로 적대적으로 의지하며 권력을 주고받는 것으로 정치 과정의 모든 것을 대체해버린 수구보수-중도보수 양당 체제에서 이러한 본말전도 현상은 이제 차라리 익숙한 현상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견고한 양당 체제에 균열을 내고 다양한 이해집단과 의제들이 의회정치의 영역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채택되었으나 이 역시 거대 양당의 위성정당 창당이라는 편법에 의해 형해화하고 말았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오던 소수 진보정당들 역시 거대 양당의 톱니바퀴에 끼여 갈 곳을 잃고 존재조차 희미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 정치에 대한 환멸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환멸이 뒤를 잇는다. 그 많던 진보세력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왜 이러한 정치지형을 바꾸지 못하고 선거 때만 되면 ‘비루하게’ 이 양당 체제의 정치놀음에 일개 하수인들로 참여해 일희일비하거나, ‘비겁하게’ 무기력한 냉소적 방관자의 위치에 머무르고 마는 것일까. 이른바 진보세력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무명 소졸에 불과한 나로서도 제 발이 저린다. 할 말이 없다.

변명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관철된 이후 포퓰리즘을 제외한 어떤 진보 담론도 지배적 정치권력으로 현실화된 사례가 없다. 진보적 담론은 있되 진보적 실천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포스트 마르크시즘 담론들의 내부에는 진보세력의 정치세력화와 권력 획득 과정에서 충분히 예측되는 집단적 전체주의화와 소외, 타자화 등에 대한 근원적 기피와 과장된 공포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개인들을 끝없이 집단과 공동체로부터 분리하여 일개 원자화된 소비주체로 환원시키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안팎으로 작용하여 거대한 패배주의와 무기력증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절대다수의 진보세력이 이미 신자유주의 체제 계급 구조의 상부에 안착했다는 한국적 특수성도 제대로 한몫을 한다.

엄밀히 말하면 현재 한국의 언필칭 진보세력들은 현재 한국 사회구조의 진정한 피해자들을 대변해줄 제대로 된 대안 담론도 생산해내지 못하고 있으며 당연히 그에 따른 정치사회적 행동도 조직해내지 못하고 있다. 대신 그들은 ‘민주당이 무슨 진보냐’라고 개탄하면서도 사실은 중도보수 정치세력인 민주당에 자신의 모든 정치행동을 위탁하며, ‘민주당=진보’ 등식에 나태하게 편승하거나 아니면 냉소주의라는 또 다른 안전지대에 숨는 것이다. 비루와 비겁 사이의 왕복이다. 물론 악조건 속에서도 이 신자유주의의 막장과 기후위기의 절벽 끝에 몰린 절대다수의 타자들과 기꺼이 운명을 함께하고 있는 이름 없는 전사들의 헌신과 희생은 예외로 해야 한다. 이 총체적 환멸의 시대에도 별이 없어도 항해를 할 수밖에 없고, 이기지 못해도 저항과 행동을 멈출 수 없는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막막한 환멸로 가득한 세상이지만 그들이 승리자가 되는 세상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는 믿음까지 잃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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