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은 땅에 쓰는 詩… 미술관에 일군 거장의 정원

허윤희 기자 2024. 4. 12.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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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조경가 정영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첫 조경 전시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 ‘희원’ 대나무숲 전경. 담 안의 풍광에 머물지 않고 바깥 경치를 끌어들이는 전통 정원의 차경(借景) 원리를 바탕으로 옛 지형을 복원한 걸작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시(詩)를 쓰고 싶었던 문학 소녀는 종이가 아니라 땅을 택했다. 백일장을 휩쓸던 그가 영문과 장학생으로 뽑히고도 난데없이 농대를 선택했을 때 어머니는 단식투쟁을 했다. 아버지의 지기(知己)였던 시인 박목월 선생이 부모를 설득해 그의 꿈을 열어줬다. 땅을 일구고, 나무와 꽃을 심고, 전쟁 후 헐벗은 우리나라 산천을 되살리겠다는 꿈. “경북 경산 할아버지 과수원에서 태어나 사과 꽃 만발한 언덕에서 뛰어놀던 기억, 할아버지가 언제나 정결하게 가꾸시던 꽃밭 풍경을 가슴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었다.”

한국 조경계 대모(代母)이자 1세대 조경가 정영선(83)의 삶과 작업을 조명하는 전시 ‘정영선 :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다. 국립미술관에서 조경 전시를 여는 건 처음이다. 1970년대 대학원생 시절부터 현재 진행형인 프로젝트까지 반세기 동안 펼쳐온 조경 활동을 총망라했다. 그의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도 17일 개봉한다.

한국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의 대표작 선유도 공원. 17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의 한 장면이다. /진진

산업화 시대를 지나고 세계화의 시대를 거쳐 21세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 조경 역사를 일군 산증인이다. 아시아 선수촌 아파트, 예술의 전당, 국립수목원,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 대전엑스포, 광화문광장 재정비, 경춘선 숲길, 여의도 샛강 생태 공원, 선유도 공원, 국립중앙박물관…. 우리나라 대표적인 건축물, 공원, 조경 사업이 그의 손을 거쳤다.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 희원에 서 있는 석물. /국립현대미술관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 희원에 서 있는 석물. /국립현대미술관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의 ‘희원’은 그가 4년을 공들여 완성한 걸작이다. 석단, 정자, 연못, 담장 등 정원과 건축 요소가 서로 숨겨주고 드러내며 살아 숨 쉬는 듯한 공간을 연출했다. 호암미술관이 수집해온 석탑과 석물 등을 친근하게 배치해 우리 고유의 정원을 재발견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술관 측은 “당시 개막식에 구름처럼 몰려든 국내 재계 총수와 부인들이 희원에 반해서 이후 짓는 건축물마다 정영선을 찾게 됐다”고 귀띔했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그때 새로 취임한 이건희 회장님과 홍라희 관장님이 세부적인 것들을 하나하나 챙기면서 전폭적 지지를 해주셨다. 회장님 어록을 전부 기억했다가 나중에 ‘이건 한국적이지 않아서 제가 뺐고, 이런 건 넣었다’고 일일이 설명 드렸더니 회장님이 내 별명을 ‘인간 컴퓨터’라 붙였다”며 웃었다.

여의도 샛강 생태공원 전경, 2023. 사진 정지현. /국립현대미술관
제주 오설록 이니스프리 전경, 2013. 사진 김용관. /국립현대미술관

우리나라 최초의 생태 공원인 여의도 샛강 생태 공원은 그의 고집과 집념으로 완성됐다. “여의도 샛강을 주차장으로 만들겠다길래 눈앞이 캄캄했다. 한강을 인위적으로 개발한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샛강까지 그렇게 만든다니. 그래서 내가 큰돈 안 들이고 샛강을 물고기도 살고 풀도 사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만들겠다면서 공무원들한테 김수영 시인의 ‘풀’을 읽어줬다.” 서울아산병원 조경에도 사연이 있다. “신관을 짓는데 조경 도면이 아무리 봐도 아니더라. 병원에는 환자도 보호자도 ‘울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숨어서 안 보이게 울 수 있는 정원, 기왕이면 왕성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나무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색적인 전시장 전경. 천장엔 파노라마 영상을 둘러 계절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정원을 볼 수 있게 했고, 60여 개 프로젝트에 대해 설계 도면과 사진, 모형, 그림 등 아카이브를 바닥에 까는 파격을 시도했다. /뉴스1

이색적인 전시다. 천장엔 파노라마 영상을 사방에 둘러 계절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시간성을 담았고, 60여 개 프로젝트에 대한 도면과 사진, 모형, 영상, 그림 등 아카이브를 바닥에 까는 파격을 시도했다. 이지회 학예연구사는 “정영선 선생이 작업에 자주 사용하는 방지(네모난 연못)에서 영감을 받았다. 관람객들은 투명 유리를 밟으며 고개를 숙이거나 바닥에 앉아 자료를 보면서 ‘땅을 읽는 행위’를 하게 된다”고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중정 전시마당에 조성된 정원. 정영선이 한국 고유의 자생식물을 심어 직접 조성했다. 미술관은 앞으로 3년간 이 정원을 유지하겠다고 했다. 사진 정지현. /국립현대미술관

조경 전시의 장점을 살려 ‘미술관 속 정원’을 만끽할 수 있게 했다. 서울관 야외 종친부 마당과 중정의 전시 마당에 작가가 직접 정원을 조성해 한국 고유의 자생식물을 심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꽃이 피고, 정원이 무르익으면 오감 체험이 더 풍성해진다. 정영선은 “조경으로 전시를 한다는 것만도 저한테는 황홀한 일이자 기적”이라며 “조경은 늘 건축의 뒷전으로 여겨졌는데, 우리 후배들의 길을 열어준다는 생각으로 이번 전시에 임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국 정원은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원래 한국 미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이 말이 한국 정원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에 딱 맞는다. 내가 추구하는 조경도 바로 그런 것이다.” 전시는 9월 22일까지. 관람료 2000원.

정영선

☞정영선

한국의 1세대 조경가이자 여성 1호 국토개발기술사. 반세기에 걸친 그의 작업 궤적이 1970년대 국토 개발과 함께 전격 도입된 한국 조경의 역사다. 국토 경관 계획부터 공원, 수목원 등 국가 주도의 공공 프로젝트, 민간이 의뢰한 정원까지 다수 조경이 그의 손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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