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길 위에서] 시칠리아 소울푸드 ‘스트리트 음식’

경기일보 2024. 4. 12.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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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섬 ‘시칠리아’ 다층적 문화 유혹
카포 시장서 ‘음식 여권’ 받고… 본격 투어
아란치니, 고기·밥·치즈 ‘환상의 조합’ 자랑
리코타치즈 가득 ‘카놀리’ 마지막 도장 ‘쾅’
(왼쪽부터) 테아트로 그레코, 카놀리. 김남희 여행작가

 

여행 다닐 때마다 달라진 한국 음식의 인기를 실감한다. 지금은 어느 나라에서든 김밥만 말아 팔아도 먹고살 거라는 소문이 돌 정도다. 유럽은 이제 작은 도시에서도 한식당은 물론이고 ‘K-mart’나 ‘K-food’ 같은 이름의 식료품점을 종종 볼 수 있다. 서울의 거리에서 떡볶이나 어묵을 먹고 있는 외국인의 모습도 더는 낯설지 않다.

음식은 한 나라를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이기에 편견 없이 어떤 음식이든 도전하는 이들을 보면 나까지 즐거워진다. 어떤 상황에서도 숟가락의 힘에 번번이 굴복하고 마는 사람인 탓에 낯선 나라를 여행할 때면 끼니마다 설렐 수밖에 없다. 예산을 아껴 한 번쯤 괜찮은 식당에서 기념할 만한 식사를 하는 일도 좋지만 그 나라 사람들이 즐기는 길거리 음식에 도전해 보는 일도 재미있다.

피자와 파스타로 세계를 장악한 이탈리아에서도 길거리 음식이 특별했던 곳은 시칠리아였다. 제주도보다 14배 가까이 큰 시칠리아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의 배경이 된 섬이다. 그리스와 로마, 비잔틴과 아랍, 노르만과 스페인 왕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명의 세례를 받은 이종교배의 산물이 시칠리아다. 이탈리아인데 이탈리아가 아닌 듯한 다층적인 문화야말로 시칠리아가 지닌 가장 큰 매력이다. 시칠리아의 ‘모든 것들은 마치 인간의 눈과 정신, 상상력을 유혹하려고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는 모파상의 찬사대로였다.

시칠리아에서는 흐르는 시간의 매분 매초가 아까웠다. 아침잠 많은 필자가 7시면 숙소를 나서서 오후 10시가 돼서야 돌아오곤 했다. 에트나 화산의 연기가 어디서나 눈에 들어오던 타오르미나, 고대 그리스 시대에 세워진 원형극장으로 유명한 시라쿠사, 아그리젠토에 남아있는 그리스 신전,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된 아랍-노르만 양식의 몬레알레 대성당, 17세기 말 대지진 후에 다시 지어진 바로크 타운들.... 눈을 두는 모든 곳이 경이로웠지만 오감을 자극하는 시칠리아 요리야말로 나를 사로잡았다. 이탈리아에서도 시칠리아는 ‘신의 부엌’이라 불린다.

속이 붉은 오렌지와 레몬, 올리브와 토마토, 신선한 해산물로 유명할 뿐더러 과일에 설탕이나 와인을 넣어 얼린 그라니타와 계피 과자 안에 크림치즈를 넣은 카놀리, 라구 소스 같은 다양한 재료를 넣고 튀긴 밥 아란치니가 시칠리아에서 태어났다. 특히 아랍인의 영향으로 시칠리아의 음식은 이탈리아 본토와는 다른 음식으로 재탄생했다.

시칠리아의 주도인 팔레르모에는 “길거리 음식 투어(Street Food Tour)’가 있었다. 재미있을 거라는 예감에 얼른 신청했다.

봄날 아침, 팔레르모의 대극장 앞에서 8명의 외국인과 현지인 가이드가 만났다. 가이드 나디아는 큰 목소리와 활발한 몸짓에 이탈리아인다운 열정이 배어 있다. 나디아는 눈앞의 거대한 극장 마시모 테아트로를 가리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남희 여행작가

마피아가 시칠리아를 지배하던 1970~90년대 초반까지 마피아의 문화 말살 정책으로 극장은 내내 문을 닫았다. 그러던 어느 밤, 예고도 없이 극장의 문이 열렸다. 마피아들이 영화 ‘대부 3’을 단체 관람하기 위해서였단다. 마피아는 19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시칠리아인들의 삶에 고통스러운 기억을 문신처럼 새겨 놓았다. 팔레르모 공항의 이름이 마피아와의 전쟁을 벌이다 사망한 두 판사의 이름을 딴 것처럼 시칠리아에는 마피아의 어두운 그림자가 여전히 배어 있다. 마피아의 긍정적인 공이 하나 있다면 디저트 카놀리를 세계에 알린 점이 아닐까. 영화 ‘대부’에서 마피아 조직원은 살인 직후 부하에게 이렇게 말한다. “총은 버리고 카놀리나 챙겨!” 카놀리는 ‘대부 3’에서도 독이 든 디저트로 재등장했다.

시칠리아의 부엌이라 불리는 카포 시장에서 본격적인 음식 투어를 시작하기 전 나디아가 종이를 한 장씩 나눠줬다. ‘음식 여권’이었다. 여권에는 다양한 길거리 음식이 그려져 있는데 한 가지씩 먹을 때마다 도장을 찍어줬다. 첫 음식은 팔레르모에 살던 아랍인들이 만든 아란치니. 쌀과 치즈, 소고기를 주재료로 튀긴 주먹밥이다. 오렌지 아란치나와 비슷한 색깔이라 아란치니라는 이름이 붙었다. 갓 튀긴 오렌지색의 아란치니는 그야말로 ‘겉바속촉’이었다. 고기와 밥, 치즈가 놀랄 만큼 잘 어울리고 간이 딱 맞았다. 아란치니에 이어 파넬레와 카칠리가 나왔다. 파넬레는 병아리콩 가루와 파슬리를 물과 함께 반죽해 페이스트를 만든 후 납작하게 튀긴 것. 카칠리는 민트와 감자로 만든 크로켓. 카초(고환)에서 이름을 따왔는데 그 모양이 닮아서란다. 파넬레와 카칠리는 소금과 후추를 뿌려 먹거나 빵 사이에 끼워 먹는다. 고소하면서도 담백한 맛에 자꾸 손이 갔다.

스트리트푸드 투어의 시험대는 내장 버거 파니카메우사. 소의 허파와 비장이 주재료인 내장 버거는 거무스름한 비주얼부터 만만찮았다. 이 음식은 팔레르모 유대인들의 발명품. 장사 수완이 뛰어난 이들답게 자신들은 먹지도 않는 내장을 햄버거로 만들어 팔았다. “길거리 음식은 가난한 서민의 음식이라 극단적인 것들이 있어요. 원하지 않는다면 안 먹어도 돼요”라는 나디아의 말에 여덟 명 중 네 명이 포기했다. 나는 일행의 버거를 딱 한 입만 맛보는 용기를 발휘했다. 한 입으로 충분한 맛이었다. 입안에 남은 텁텁한 맛과 강한 냄새를 씻어내자며 찾아간 곳은 시장 부근의 오래된 선술집 타베르나. 로컬 와인을 파는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술은 주정강화 와인 마르살라였다.

이 동네 남자들은 저렴하고 도수 높은 이 와인을 선 채 마신 후 나가곤 했다. 나디아가 준비해온 음식을 펼쳤다. 마르살라와 함께 스키티키오를 즐길 차례였다. 가볍게 집어먹을 수 있는 것들로 차린 일종의 피크닉 음식이다. 올리브와 치즈, 몬레알레의 빵, 매콤하게 절인 선드라이드토마토. 거칠고 딱딱하면서도 구수한 빵 몬레알레와 말린 토마토, 양젖 치즈가 놀랄 만큼 잘 어울렸다. 스트리트푸드 투어의 마지막 순서는 카놀리. 바삭하게 튀긴 계피향 나는 과자 안에 크림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리코타치즈를 채운 카놀리를 마지막으로 내 음식 여권에 모든 도장이 찍혔다. ‘미션 클리어’가 된 셈이었다.

다음날 아침 혼자 팔레르모의 어시장을 찾아갔다. 새벽 바다에서 갓 잡은 해산물을 가판에 쌓아놓고 나이 든 어부들이 큰 목소리로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삶의 활기가 펄펄 뛰는 시장 근처 식당에 앉아 아란치니를 주문했다. 수많은 침략과 마피아의 폭압에도 끝끝내 살아남은 시칠리아의 사람들처럼 나도 남은 날을 살아낼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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