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디아스포라 작가 고 민영순…‘한국인 정체성’ 치열하게 파고들어

한겨레 2024. 4. 11. 18:3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가신이의 발자취] 재미 미술작가 민영순을 추모하며
민영순이 1989년 내놓은 흑백사진콜라주 연작 ‘자기 만들기(Make Me)’의 일부분. 이 작품의 민영순 바탕 사진은 이정진 작가가 찍었다. 2014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민 작가가 참여한 재외한인여성작가 3인전의 출품작으로 전시되었다. 김홍희 제공

재미 미술작가 민영순(1953-2024)이 지난 3월12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영면했다. 유방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민영순의 죽음을 애도하고, 작가로서, 인간으로서 치열한 삶을 살아온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지난 22년간 맺어온 각별한 만남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고인은 유년기에 미국 캘리포니아 주 몬테레이로 이주했다. 이후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 들어가 미술을 전공하며 동문인 차학경(미국명 테레사 학경 차)을 만나게 된다. 이민의 경험을 공유한 친구이자 동료로서 이들은 이주의 상실감, 정체성의 혼란을 토대로 서구 또는 미국을 상대화하는 후기식민주의적 작품세계를 일궈낸 대표적인 1세대 디아스포라 작가로 자리매김되었다. 자신이 속한, 그러나 결코 속할 수 없는 공간에서 인종적, 국가적, 젠더적 타자의 입장에 처하는 한편, 이민 당국이 수행하는 민족적 동일화에 맞서 차이를 선언하는 이들의 작업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민영순의 정치 의식은 1979년 부마항쟁,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등 한국의 암울한 정치상황으로 인해 한층 심화되었다. 1981년 뉴욕으로 거주지를 옮긴 이후, 아시아계 미술연맹과 한국계 문화조직 비나리 그룹에 가입했다. 1990년대에는 유엔의 ‘탈식민지화(Decolonization)’ 선언(1960)에 고무되어 탈식민주의, 다문화주의, 유색인 페미니즘에 경도되면서 이른바 ‘문화행동주의자’의 길을 걷는다.

내가 처음 민영순을 만난 것은 2002년 ‘멈춤’을 주제로 열린 제4회 광주비엔날레 전시의 일환으로 그가 기획한 ‘저기: 이산의 땅’ 전을 통해서였다. 이 전시에서 그는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 작가들의 출품작과 아카이브 자료를 통해 만주, 미국, 중남미 등으로 뻗어 나간 한국인 이주의 역사를 가시화하는 한편,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해답을 현지·모국 문화의 갈등과 변증법적 조화에서 찾고자 했다.

실로 이산 작가 민영순에게 정체성의 문제는 피할 수 없는 숙명적 테마였다. ‘나의 얼마만큼이 한국적인가’라는 실존적 물음에서 비롯된 ‘반쪽의 모국’(1986)과 ‘자기 만들기’(1989), ‘결정적 순간들’(1992) 등 대부분의 초기작들은 자신의, 모국의 불안정한 정체성을 은유한 심리적 초상에 다름 아니었다.

2002년의 만남이 인연이 되어 2004년에는 쌈지스페이스에서 민영순의 개인전 ‘XEN(젠)ㅡ이주, 노동과 정체성’을 열게 되었다. 정체성의 화두를 아시아와 이주 노동자의 문제로 확장한 이 전시를 위해 작가는 일년간 한국에 머물며 이주 노동자들과의 인터뷰를 담은 다큐멘터리 비디오 ‘무빙 타깃’을 제작, 발표했다. 전시 제목 ‘XEN’은 ‘손님' ‘외국인' ‘이방인'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어근으로, 젠으로 발음되는 동양의 선 사상 ‘Zen’과 동음이의어이다. 이러한 언어 게임을 통해 작가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방인(Xen)을 명상(Zen)의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권유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2014년, 나는 서울시립미술관 기획전 ‘노바디(No Body)’ 전에 민영순을 초대했다. 3인 그룹전(민영순, 윤진미, 조숙진)으로 행해진 이 전시에 민영순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역사를 입다’를 선보였다. 위안부라는 아픈 역사를 매일 입는 옷, 몸의 일부로 기억할 것을 종용하며, 연도를 적은 숫자들과 텍스트가 쓰여진 티셔츠를 입고 관객들과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대화 퍼포먼스를 수행했다. 문화행동주의적 실천으로 일본 정부를 향한 비판적 발언을 대신한 것이다.

민영순이 1989년 제작한 사진콜라주 작품 ‘메이크 미(Make Me)’의 전체 연작이 전시된 모습. 바탕 사진들은 이정진 작가가 찍었다. 김홍희 제공
지난 2003년 민영순이 펼친 침대 대화 퍼포먼스 ‘평화를 위한 의지’의 실연 장면. 비틀스 멤버 존 레논과 전위작가 오노 요코의 60년대 반전 평화시위 퍼포먼스 ‘침대에서’를 차용한 작품이다. 김홍희 제공

나는 10년 간격으로 행해진 이 두 개의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또한 민영순의 한국 방문 때 조우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사상, 삶의 태도, 예술관을 이해하고, 특히 책을 통해서만 인식했던 후기식민주의 페미니즘의 실상을 보게 된 소중한 기회들이었다.

최근에 나는 ‘한국 페미니즘 미술’에 관한 책의 출판을 목전에 두고 있는데, ‘북미 대륙의 디아스포라 작가들’이란 책의 한 챕터가 민영순이 그간 보여주고 들려준 예술적 행적의 소산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펴내기 위해 가끔씩 민영순과 질문, 답변을 주고받은 이메일 서신이 올해 1월 말까지 이어졌다. 그 최후의 시간들에 내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에 숙연해하며 새삼 그와의 만남, 그 신비스러운 인연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이것이 백남준이 말하는 “인류의 뇌세포를 풍요롭게 하는” 우연적이고도 필연적인 카르마적 인연이 아닐까.

김홍희/미술사가·백남준문화재단 이사장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