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맞선 흑인 성악가에 공연장 이름 헌정…340억원 통 큰 기부

임석규 기자 2024. 4. 11.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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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공연시설, 명명권 활용해 후원받는 사례 많아
자산가 기부 뒤 자기 이름 아닌 ‘마리안 앤더슨 홀’ 명명
미국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상주하는 공연장이 2500만 달러 후원을 받고 ‘버라이즌 홀’에서 ‘마리안 앤더슨 홀’보 이름이 바뀐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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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오는 6월8일 열리는 ‘마리안 앤더슨 홀’ 헌정 개막식이 화제다. 그동안 ‘버라이즌 홀’로 불리던 2500석 규모의 이 대형 공연장은 이날부터 ‘마리안 앤더슨 홀’로 간판을 바꿔 단다. 이곳에 상주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이날 저녁 야닉-네제 세갱의 지휘로 기념 콘서트도 연다. 공연장 명칭 사용 권한인 명명권(네이밍 스폰서십)을 활용해 거액을 후원받은 사례다. 서울시향 등 콘서트홀을 짓거나 리모델링을 추진 중인 국내 공연장들에도 참고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공연장은 2001년 개관 당시 통신 기업 버라이즌으로부터 1450만달러를 받고 ‘버라이즌 홀’이란 명칭을 사용하게 했다. 이 명명권 계약이 지난 1월 종료됐다. 이번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이사회 의장을 지낸 자산가 리처드 월리와 그의 아내 레슬리 밀러가 2500만달러를 후원했다. 이 부부는 이 공연장에 자신들의 이름을 내세우는 대신, 필라델피아 태생 흑인 알토 가수 마리안 앤더슨(1897~1993)의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인종 차별이 심하던 1955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서 흑인으로는 첫 주역을 맡은 전설적 성악가다. 통 큰 기부자 리처드 월리는 “마리안 앤더슨은 투지와 우아함으로 차별에 맞서 승리한 인물”이라며 ”사람들이 ‘마리안 앤더슨 홀에서 만나요’라고 말할 때마다 그녀의 이름이 언급될 것”이라고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1962년 케네디 미국 대통령 집무실을 찾은 성악가 마리안 앤더슨.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누리집

뉴욕 필하모닉이 상주하는 공연장도 명명권으로 거액을 기부받았다. 링컨센터에 자리 잡은 이 공연장은 원래 ‘에이버리 피셔홀’로 불렸는데, 2015년 개보수 과정에서 미국 연예산업계 거물 데이비드 게펜에게서 1억달러를 기부받고 ‘데이비드 게펜 홀’로 바꿨다. 앞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홀의 이름을 변경하지 못한다는 영구 명명권 계약이었다.

기업은 명명권을 통해 공연장 명칭만 사용할 수 있을 뿐, 구체적인 프로그램 기획이나 공연장 운영에는 관여하지 못한다. 다만, 기업 브랜드가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고 관객들에게 회자되면서 기업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만들고, 인지도를 높일 수 있다. 공연장으로선 명명권을 새로운 수입원으로 활용해 재정을 더욱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된다.

국내에서도 공연장이 명명권 계약을 맺고 명칭을 바꾼 사례가 더러 있다. 기업은행은 2011년 600석 규모로 문을 연 예술의전당 아이비케이(IBK)챔버홀에 45억원을 후원하고 20년간 명칭 사용 권한을 행사한다. 예술의전당은 오페라하우스에 있는 1004석 규모의 씨제이(CJ) 토월극장을 2013년 개보수하면서 150억원을 후원받고 씨제이그룹에 20년간 명칭 사용 권한을 넘겼다. 예술의전당이 2020년 개관한 103석 규모의 인춘아트홀은 인춘재단으로부터 10억원을 후원받아 만들었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복합 공연장 블루스퀘어는 명명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삼성전자홀, 삼성카드홀, 마스터카드홀, 인터파크홀, 신한카드홀 등으로 여러 공연장 명칭을 바꿔왔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최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국내 공공시설들도 음향과 조명 등을 개보수하면서 명명권을 활용하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 있는 시설들의 경우 공연장으로 활용되는 곳들이 많은데, 명명권을 활용해 전문 공연장 개조 비용 일부를 충당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올림픽역도경기장은 우리금융의 후원을 받아 1184석 규모의 뮤지컬 전문공연장으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우리금융아트홀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예술의전당은 2020년 103석 인춘아트홀을 개관하면서 인춘재단으로부터 10억원을 후원받고 공연장 이름을 사용하게 했다. 예술의전당 제공

전용 홀 신축을 추진 중인 서울시향과 언젠가 리모델링을 거쳐야 하는 예술의전당도 명명권을 활용하자는 얘기가 나온다. 한정우 에투알클래식 대표는 “공연장을 신축하거나 음향과 무대 시설을 개조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데 여기에 명명권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며 ”서울시향이나 예술의전당이 적극적으로 검토할 만하다”고 말했다. 서울시향은 세종문화회관 리모델링을 통해 오는 2029년 대극장 남쪽에 1800석 규모의 콘서트홀과 500석 규모의 챔버홀을 갖추게 된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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