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위를 걷다 지장산] 무주와 진안 어디쯤…현지인도 모르는 산에 들다

김광명 여행작가 2024. 4. 11.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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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와 진안 경계의 자연미 넘치는 774m 전망대
넓고 훤하게 트인 지장산 정상 전망대의 모습. 토요일 오후 부지런한 백패커들이 이미 올라 자리를 잡았다. 오른쪽으로는 잔잔한 용담호의 정취를, 왼쪽으로는 웅장한 덕유지맥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저물녘 용담호 위로 곱게 이는 물비늘과 일몰이 장관이다.

지리산의 '지智'와 내장산의 '장藏'을 쓰는 산이다. 전북 무주와 진안 경계에 있는 지장산(774m)은 이름이 생소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워진다는 지리산의 '지' 자, 그리고 산 안에 숨겨진 것이 무궁무진하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내장산의 '장' 자가 합쳐진 이름이다. 나는 어느새 지리산의 지혜로움과 내장산의 숨겨진 아름다움이 그득한 지장산의 모습을 상상하며 푹 빠져 버렸다.

지장산은 진안군의 용담면 송풍리, 안천면 삼락리와 무주군 부남면 고창리에 걸쳐 있다. 지도를 살펴보니 세 고을 모두 지장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었다. 어느 곳에서 산행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행복한 고민이었다. 산행의 시작은 들머리로부터가 아니라 산행을 준비하는 바로 그때부터이다. 나는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향토지에 의하면, 지장산은 산의 형세가 왼손에는 연꽃을, 오른손에는 구슬을 들고 중생을 교화하는 자애로운 지장보살의 모습과 같고 무주와 진안을 가로지르며 늘어선 산봉우리가 마치 나한들이 연달아 서 있는 듯하여 이름 붙었다고 한다. 그 형상이 단번에 떠오르지 않아 골똘히 생각하다가, 한라산 영실코스의 오백나한을 떠올렸다. 우뚝 솟은 수백 개의 기암괴석이 마치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모여든 500명의 나한이 서 있는 모습 같다고 하여 붙여진 그 이름. 나한은 소승불교에서 수행자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에 있는 이를 말한다. 오백나한에 비하면 지장산은 다섯 명의 나한이 늘어선 정도나 될까. 쌍교봉(633m)과 지장산(774m), 지소산(442m)으로 이어지는 서너 개의 봉우리를 머릿속에 그려보니 그 모습이 문득 앙증맞게 느껴졌다.

무주군 부남면 대소리 등산로 입구의 안내판.

현지인도 모르는 미지의 산

무주와 진안, 어느 곳에서 산행을 시작할지 내내 고민하다가 무주로 향했다. 서울에서부터 세 시간을 달려 무주에 도착했다. 무주 방면에서 지장산을 오르는 길은 세 가지이다. 부남면 대소리와 고창마을 앞 건너들, 율현을 지나 당곡마을 등산로가 바로 그것이다. 우선 부남면 대소리 입구에 들러 안내판을 확인하려 발걸음을 뗐다. 그와 동시에 소스라치게 놀란 고라니들이 껑충껑충 뛰어올랐다. 인적이 드물어 등산로라기보다는 고라니들의 놀이터 같았다.

발길을 돌려 고창마을 앞 건너들로 향했다. 마을 입구에 도착하자 꽤 그럴싸한 등산로 종합안내도가 있었다. 작은 마을을 지나자 금이 가고 색이 심하게 바래서 도무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안내판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엉성한 등산로를 살피느라 이미 시간이 꽤 많이 흘렀기에 오늘 산행은 건너들로 올라 지장산 정상에 이른 뒤 쌍교봉 방면으로 넘어가 당곡마을로 내려가기로 했다. 보통 진안의 용담댐 물박물관이나 삼락리 방면에서 새목이골로 오르는 코스가 짧고 평이하지만 무주와 진안에 걸쳐 있는 산의 양면을 모두 만끽하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었다.

무주군 건너들 등산로 입구의 종합안내도.

전북 진안군 안천면의 율현2 교차로에서 핸들을 틀면 곧바로 무주군 부남면이 된다. 신기하고 이상한 마을이다. 우리는 그 마을에 차를 세워 두고, 진안군 택시를 타고 들머리인 건너들로 다시 한 번 이동하기로 했다.

"아니, 이 산을 어떻게 알고 오셨대요? 10년 동안 택시 하면서 지장산 고객은 처음이에요. 거긴 나도 잘 몰라. 한 번도 가본 적도 없고, 친구 중에 가봤다는 사람도 없어."

진안에서 태어나 택시를 운전한 지 10여 년도 더 되었다는 박재명씨는 우리가 지장산에 간다는 사실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1년 열두 달 주말이면 많은 등산객이 진안을 찾는다며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대체 지장산은 어떻게 알았느냐 되레 물었다.

지장산 정상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덕유산 설경. 겨울잠 자던 개구리가 꿈틀거린다는 경칩이 코앞인데 덕유산은 만년설 덮인 듯 여전히 새하얗다.

두말하면 입이 아픈 마이산부터 운장산이며 구봉산, 하다못해 부귀산이라든지, 더 좋은 산이 많지 않으냐며 따져 묻다가 이내 구봉산 구름다리가 인기가 많아 택시 운영도 호황을 누렸었는데 최근에는 원주 소금산 출렁다리와 순천 용궐산 하늘길 등이 열리며 등산객들이 줄었다며 아쉬운 표정을 짓고는 말끝을 흐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들머리인 무주군 부남면 고창리 건너들에 도착했다. 그는 우리의 산행을 응원하며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나는 학창 시절 읊조리던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시 한 구절을 떠올렸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풀이 더 많이 자라 있고 사람의 자취가 적은 길을 선택해 내 발걸음이 다음 사람에게 길잡이가 되어주길 바라며 산으로 향했다.

모험과 위험, 그 사이를 거닐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지장산 등산로 종합안내도를 살핀 후 산행을 시작한다. 환상이 너무 컸던 탓일까. 야속하게도 건너들에서 지장산 정상으로 오르는 내내 제대로 된 조망처가 단 한 곳도 없었다. 게다가 등산로는 몇 해는 묵은 듯한 낙엽이 수북이 쌓여서 애당초 길이 있던 게 맞을까 싶은 정도였다.

건너들 등산코스는 길이는 짧지만 고도가 아주 가파르고 낙엽이 수북이 쌓여 쉽지 않다. 한 걸음 한 걸음 산길을 천천히 오르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길을 잘못 들어 천 길 낭떠러지 같은 비탈길을 나뭇가지와 돌부리를 부여잡고 올랐다. 해묵은 듯한 낙엽 더미와 밟을 때마다 바스러지는 푸석푸석한 흙 때문에 고작 2km의 거리가 마치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것처럼 힘겨웠다. 등걸에 걸터앉아 기어오르듯 오른 길을 돌아봤다. 무모한 도전이었을까. 등산로가 잘 정비되지 않은 것을 보고는 진작에 발길을 돌려야 했을까.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모험'의 사전적 의미는 '위험을 무릅쓰고 어떠한 일을 한다'는 뜻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모험의 유의어에 '도박'이 있다. 세상에, 도박이라니! 나는 지금 지장산에서 도박을 즐기고 있는 것인가. 모험과 위험, 그 사이에서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해야 했다. 파뜩 정신을 차리고 종이지도와 전자지도를 펼쳐 현 위치와 능선 방향을 확인했다.

다소 전투적인 표정으로 '흠-흠!' 목소리로 가다듬었다. 모험 자체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니, 언제든 위험한 순간이 닥쳐올 수 있다.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더 신중하게 발을 디뎠다. 지장산의 모험가가 된 듯 힘차게 오르다가도 괜스레 군청이 야속해졌다. 누군가 길을 잃고 헤매지 않도록 안내판을 세워 주었더라면. 잠시 앉아 쉬어 갈 수 있는 벤치가 있었더라면. 하지만 이내 힘찬 발걸음을 다시 뗐다.

용바위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스틱으로 용의 얼굴을 대강 가리켜본다.

가지만 앙상한 겨울나무 사이로 얼핏 정상의 전망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건너들에서 능선으로 가까스로 올라오자, 숨통이 좀 트였다. 지장산 정상 전망대 계단을 오르며 그제야 활짝 웃어본다. 오른쪽으로 구불구불 드넓게 펼쳐진 진안의 용담호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해묵은 산길에서 느꼈던 갈증이 완벽히 해소됐다.

고개를 돌려 눈으로 뒤덮인 높은 설산이 아스라이 줄지어 있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덕유산이었다. '아! 험난한 모험의 보상이 이런 절경이라면 두 번 세 번도 마다하지 않겠어.' 전망대에 오르자마자 저간의 고단함을 모두 잊은 채 정상 풍경에 푹 빠져버렸다. 그야말로 진경이었다.

고작 2km 남짓한 거리에 기진맥진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정상에서부터 쌍교봉까지의 길도 이처럼 힘들다면 한밤중에야 산행을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산행의 기본은 뭐니 뭐니 해도 안전이다. 일행과 상의 끝에 하산 방향을 바꾸어 삼락리로 내려가기로 했다. 안내판 하나 없지만 그 모습이 꿈틀거리는 용과 같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용바위를 지나 삼락리 방면으로 거침없이 내려간다. 종착지는 13번국도 도로변이다. 이곳에는 흐릿한 등산로 안내판 하나와 진안고원길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정상 바로 아래 위치한 용바위를 지난다. 정상에서 삼락리 방향으로 내려가면 용의 꼬리부터 몸통, 머리 순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지장산 아래에서 하룻밤을 머물기 위해 진안군의 섬바위를 찾았다. 섬바위는 옛 지도에 섬 도島, 바위 암巖인 '도암'이라 기록되어 있다. 금강은 정취 가득한 용담호와는 또 다른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강 한가운데 우뚝 섬바위가 솟아 있고, 그 위로 천년송이 자라고 있었다. 낭만이었다. 모험은 지장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날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진눈깨비는 곧 함박눈으로 변해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었다. 지장산에도 눈이 소복이 쌓였을 테지.

그럼에도 지장산을 타야 하는 이유

두 번째 모험을 준비했다. 계절마다 곳곳의 산을 함께 다니는 소풍 산행 친구들인 이미림, 조희현과 동행했다. 이번에는 지장산에 더 오래 머물고 싶었다. 우리는 율현 당곡마을로 올라서 쌍교봉을 지나 정상에 이른 뒤 지소산으로 내려서는 코스로 진행하기로 했다. 서울에서 무주행 첫차를 타고 길을 나섰다. 무주 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들머리인 율현 2교차로 위 당곡마을로 향했다. 율현은 밤고개라는 뜻이다. 고개 주위에 밤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택시에서 내리자 어디선가 이른 밤꽃 향기가 은근히 풍기는 듯했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우뚝한 중계탑을 지나 맨 구석까지 들어섰다.

3지장산 정상에 오르면 나란히 솟은 두 암봉의 모습이 말의 귀와 비슷하다고 이름 붙여진 마이산(암마이봉, 숫마이봉)이 조망된다.

마을길이 끊어지는 곳에서 왼편으로 발길을 돌리면 은색 송신탑이 보인다. 송신탑을 오른편에 두고 쌍교봉에 향해 올랐다. 설명하자면 이렇게 간단한 들머리인데, 실제로는 안내판이 하나도 없어 들머리로 들어서는 데만 1시간 넘게 헤맸다. 등산로에는 해묵은 낙엽보다 더 아찔한 가시덤불과 잡목이 헝클어져 있었다.

"악-!"

짧고 강한 외마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요리조리 피해 보려 했지만 나도 굵고 긴 가시에 허벅지가 찔리고 말았다. 가시덩굴과 잡목을 헤치고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들어서자 비로소 안심했다. 완만한 길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길이 편안해지자 생각이 많아졌다.

지장산 아래 섬바위에서의 하룻밤. 간밤에 내린 눈 때문에 텐트가 폭삭 쓰러질 듯하다.

근래 나의 산행 패턴을 돌이켜보니, 편하고 쉬운 산 또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산만 좇아다녔더랬다. 쉽고 아름다운 산만 있을 수는 없다. 국립공원의 닳디 닳은 산길이 아닌, 잊힌 고즈넉한 산길을 걷는 내가 꽤 만족스러워졌다.

아름다운 경관을 좇는 산행이 다소 지루해졌거나 바글바글 인파로 정신없는 명산에 다소 지쳤다면 날것 그대로의 산을 느낄 수 있는 지장산으로 가보자. 주말 한낮 오로지 나와 우리 일행만이 이 산에 머무를 수 있는 특혜를 받은 것처럼 고즈넉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등산이 아닌 모험 같은 산행이 떠나고 싶은 그대에게 지장산을 권한다. 쌍교봉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서울에서부터 싸 온 김밥 한 줄을 다 먹었더니 힘이 불끈 났다. 왼편으로 도라마을이 내려다보였다. 도라마을은 본래 도래실이라 이름 불렸다. 멀리서 바라볼 때 복숭아처럼 생겼다고 해서 복숭아 '도桃' 자를 썼다고도 하고, '돌아가는 곳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했다. 저 아래에 마을 사람이 있었더라면 후다닥 내려가 묻고도 싶었다. 하지만 이날 산에서 아무도 마주치지 못했다.

걷기 좋은 길이 나오면 절로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봄이 오는 소리에 맞춰 사뿐사뿐 걸어본다.

산행은 계속됐다. 어쩌면 지장산 정상의 전망대보다 전망이 뛰어난 치마바위봉에 이르렀다. 특별한 안내판은 없었지만, 지장산에 오른 몇몇 사람들은 이곳을 치마바위라 불렀다. 그도 그럴 것이 비탈진 암벽의 모습이 꼭 짧은 치마 모양 같았다.

치마바위봉에 올라서면 우리가 지나온 쌍교봉부터 구왕산, 적상산부터 만년설 덮인 듯 여전히 흰 눈 가득 쌓인 덕유산 연봉까지 한눈에 바라보인다. 장관이었다. 큰 산의 연봉을 파노라마처럼 조망할 수 있는 곳이 많던가?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장수의 장안산에서 바라보는 지리산도 아름다웠고, 경기 고양시 노고산에서 바라본 북한산의 전경도 뛰어났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지장산에서 바라보는 덕유산 풍경이 제일이었다.

산행길에 만나는 바위는 종종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기도 한다. 우리는 이곳에 앉아 도란도란 작은 이야기꽃을 피웠다.

길을 잃을라치면 조희현씨가 주황색 산악회 리본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광명아, 저쪽이야! 저쪽에 산악회 리본 보인다! 낙엽에 덮였지만 그래도 길이 희미하게 연결된 것 같아. 산악회 리본이 이렇게 소중할 줄이야! 평소에는 보지도 않잖아."

그렇다. 평소에는 쳐다보지도 않던 산악회 리본이 우리의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했다. 우리는 리본에 의지해 길인 듯 길 같지 않은 길을 따라 산행을 이어갔다. 마치 진짜 모험가가 된 듯 기분이 꽤 짜릿했다. 그러다 걷기 편한 길이 나오면 또 그렇게 신이 날 수 없었다. 성큼 정상 바로 아래 있는 용바위를 지나 정상에 도착했다. 넓고 탁 트인 전망대에 오르자 이미림씨가 환호성을 치며 말했다.

오늘의 산행 코스를 종이지도를 보며 확인하고 있다. 가끔 종이지도가 휴대폰지도보다 매력적이다.

"우와! 진짜 너무 힘들었는데, 너무 예쁘다! 갑자기 일상이 막 감사해지는 것 같아. 산악회 리본도 정말 소중해. 우리를 이 산에 데려와 준 광명이한테도 고마워."

고생 끝에 즐거움이 온다더니. 힘겹게 오른 산 정상에서 물비늘 아른거리는 용담호의 풍경과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눈 덮인 덕유연봉을 바라보면서 연신 기념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고단한 것도 금세 잊어버렸다.

용담호 수면 위로 뉘엿뉘엿 해가 저문다. 발걸음을 재촉한다.

지장산의 몇몇 조망처 중에서도 사방으로 탁 트인 정상 조망은 단연 백미다. 마치 히말라야의 로지(여행자 숙소)에서 만년설로 덮인 안나푸르나산군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아름답다. 호수의 고요함과 덕유산 연봉의 웅장함을 한 곳에서 조망할 수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일몰까지 10분 남았습니다. 하산을 준비하세요.' 알람이 울렸다. 이미 용담호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해가 뉘엿이 넘어가면서부터 고요한 용담호가 퍽 쓸쓸해졌다. 멀리 지소산을 그윽이 바라보지만 그림의 떡이다. 산속에서 맞이하는 일몰은 순식간이다. 하산을 서둘러야 했다. 우리는 용담교 방면으로 내려갔다.

치마바위봉에 올라 바라본 전경. 이곳에 서면 바로 앞에 보이는 쌍교봉부터 적상산, 그리고 만년설 덮인 듯 여전히 흰 눈 가득 쌓인 덕유지맥까지 한눈에 바라보인다.

새목이골로 내려서자 구불구불 지장산에서부터 삼락리까지 이어진 임도가 늘어서 있다. 서울행 막차를 놓친 우리를 데리러 온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뉘엿뉘엿 지는 해에 애타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헐레벌떡 임도를 거꾸로 올라오고 있었다. 터덜터덜 힘 빠진 발걸음에 힘이 났다. 내리막길을 내달려 아버지 품에 폭 안겼다. 가시덤불과 잡목을 헤치고 숱한 낙엽을 바스러뜨리며 힘겹게 오른 지장산 산행이 끝났다. 근래에 이렇게 마음에 쏙 드는 산이 있었을까. 거칠지만 아름답고 고단하지만 행복했다.

어느덧 4월이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내고'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토머스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이 말한 대로 봄은 잔인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푸릇푸릇한 봄산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다. 봄꽃 흐드러지게 핀 산을 찾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걸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한다. 엉성했던 그 길이 언젠간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길로 남게 될 테니. 오래 보아야 예쁘고 자세히 보아야 아름다운 산이 있다. 지장산이 그렇다.

아담한 지장산 정상석 옆에 나란히 앉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산행길잡이

지장산에 가려면 용담댐 물박물관 새목이골을 들머리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4월 15일까지 새목이골과 삼락리에서 오르는 등산로 모두 입산이 통제된다. 지장산을 오랫동안 즐기는 방법으로 밤고개 율현으로 올라서 쌍교봉과 치마바위봉을 지나 지장산 정상에 이르는 등산로를 권한다. 하지만 가시덤불과 잡목, 낙엽 등으로 등산로가 훼손된 구간이 많으므로 산행시 안전에 유의해야한다.

율현 2교차로에서 당곡마을로 들어서면 마을 가운데 중계탑이 우뚝 솟아 있다. 중계탑을 오른편에 두고 마을 임도가 이어진 곳까지 걷는다. 임도가 끝나고 흙길이 나오면 고개를 들어 은색 송신탑을 찾자. 송신탑을 안고 돌면 억새와 소나무 숲이 보인다. 등산로가 잘 갖추어 있지 않아 헤맬 수 있지만 멀리 바라보면 희미한 길이 보인다.

울창한 소나무 숲과 수북이 쌓인 낙엽길을 몇 차례 지나면 쌍교봉에 이른다. 쌍교봉은 정상석이 별도로 없기 때문에 자칫 놓칠 수 있다. 쌍교봉을 지나 하산하듯 내려갔다가 2km 정도 가파른 경사를 치고 올라간다. 이곳에서 쌍교봉과 적상산, 덕유산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치마바위에서 다시 약 2.5km를 지나면 정상의 전망대에 도착한다. 전망대는 넓고 탁 트여 조망이 매우 좋다. 한낮에는 햇볕과 바람을 피할 곳이 없으므로 모자와 선크림은 필수다.

교통

내비게이션에 '무주위성항법사무소(무주군 당곡길 41)'를 검색하면 당곡마을 아담한 주차장이 나온다. 대중교통으로 가려면 서울남부터미널에서 무주행 시외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하행은 평일과 주말 5회(7:40, 9:20, 10:40, 14:35, 18:00), 상행은 3회(14:40, 15:35, 17:45) 운행하며, 2시간 10분 정도 소요된다. 무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당곡마을까지 15분 정도 걸리며 택시 요금은 약 2만5,000원. 하산 20분 전 연락을 하면 들머리로 마중을 나오기도 한다고 하셨다(무주 개인택시 나건채씨, 010-8890-0041).

진안 방면에서 오르려면 대중교통보다는 자차가 용이하다. 용담댐 인근의 생태공원과 조각공원, 봄이면 벚꽃이 만발하는 용담호 드라이브 코스와 메타세쿼이아 길 등 산행 전후로 둘러볼 곳이 많기 때문.

맛집

용담호를 둘러싼 진안마을에는 매운탕과 어죽이 유명하다. 안천면 인근에 있는 부뚜막(063-432-3548)과 섬바위 근처의 섬바위가든(063-433-7804)의 빠가탕과 쏘가리탕이 맛 좋기로 소문이 났다.

삼락교를 지나 용담댐 오토캠핑장 옆에 있는 '삼락 쉼터(0507-1357-3453)'는 지난해 12월에 오픈했다. 3월부터 10월까지는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운영한다. 무인 카페로 운영되며 음료 가격은 3,500~4,000원. 야외 분위기와 용담호 전망이 좋다.

무주시외버스터미널 옆 콩수레두부(063-323-7272)도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유명하다. 서울행 버스에 올라타기 전에 얼큰한 두부 짜박이와 구수한 순두부찌개를 맛보아도 좋다.

등산 지도_특별부록지도 참조

월간산 4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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