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건조만 최소 10년…0.1g 차이에도 바이올린 소리 달라요"

유영규 기자 2024. 4. 11.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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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깎을 때 나는 '사각사각' 소리, 커피 향처럼 은은하게 퍼지는 나무 냄새…. 작업에 집중할 때 느껴지는 이 모든 걸 좋아해요."

400년 전 근대 바이올린의 형태와 구조를 탄생시킨 아마티 가문부터 이를 정착시킨 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네리 가문이 자리 잡은 이탈리아 북부 도시 크레모나.

이곳에서 20년간 전통 방식으로 현악기를 만들어 온 한국인 제작자가 있습니다.

바로 크레모나에서 공방을 운영하는 이승진(45) 씨입니다.

2018년부터 한국에서 해마다 한 번씩 자신이 만든 현악기 전시를 하는 이 씨는 올해도 오는 27∼28일 서울 서초구 음악플러스 아트홀에서 전시를 엽니다.

연주자들을 직접 만나 소통도 하고, 과거 자신에게서 악기를 사 갔던 이들의 악기 상태를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이 씨는 지난 8일 언론사와 전화 인터뷰에서 "전통 제작 방식은 기계로 찍어내거나 스프레이로 칠하지 않고 모든 제작 과정을 수작업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며 "100명이 만들면 100개 악기가 다 다른 소리를 낸다"고 자기 일에 대한 자긍심을 드러냈습니다.

이 씨는 2005년 이탈리아 굽비오 현악기 제작 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고, 크레모나의 현악기 제작 명문가인 모라시 가문의 공방과 6년간 함께 일하며 실력을 쌓았습니다.

현악기 제작 국제 콩쿠르에서도 여러 차례 우승했고, 현재는 자신의 공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가 만든 악기를 찾는 이들은 예중·예고를 준비하는 학생부터 유럽에서 활동하는 프로 연주자들까지 다양합니다.

그는 현악기 제작자가 된 배경에 대해 "어렸을 때 바이올린을 배우기도 했고,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걸 좋아해서 자연스럽게 이 길로 흘러들어오게 된 것 같다"며 "첫 악기를 완성하고 내 손으로 만든 바이올린 연주를 들었을 때의 짜릿함을 잊을 수가 없다"고 회상했습니다.

현악기 제작은 악기의 기본 틀을 만들어 여러 번 붓으로 칠하고 말린 뒤 부품 등을 조립하는 셋업까지 보통 석 달 정도 걸리지만,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재료인 나무를 고르고 보관·관리하는 것도 제작자의 몫입니다.

이 씨는 "크레모나에는 슈퍼마켓처럼 현악기 제작을 위한 가게들이 있는데 그중 나무를 전문적으로 파는 곳도 있다"며 "이런 가게에서 파는 나무는 수분이 빠져나간 정도고, 제작자가 이를 구입해 최소 10년 이상은 관리하면서 건조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이 건조 과정을 잘 거쳐야 악기가 완성되고 몇 년이 지나도 뒤틀리거나 터지는 일이 없다"며 "제작자들은 입문 단계에서 나무에 관한 이론들도 많이 배우고, 나무를 취급하는 법을 경험적으로 익히게 된다"고 덧붙였습니다.

10여 년 뒤 만들 악기의 재료를 사서 꼼꼼하게 관리하는 것부터가 현악기 제작의 시작인 셈입니다.

이 씨도 공방에 덩어리로 잘린 나무 80세트 정도를 보관하면서 매년 상태를 확인합니다.

이 씨는 "현악기 제작자가 가장 무서워하는 존재는 나무를 갉아먹는 좀벌레"라며 "좋은 햇살과 그늘에 정성 들여 건조한 뒤 드디어 나무 속을 파내며 제작에 들어갔는데 좀벌레를 발견하면 그 허무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현악기 제작자 이승진 씨가 만든 바이올린


다행히 지금까지 이 씨는 좀벌레로 재료가 크게 손상된 적은 없지만, 공방에 사다 둔 나무 의자에서 부식 현상이 나타나 대청소를 벌였던 적이 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이처럼 재료부터 오랜 기간 꼼꼼하게 관리해야 하고, 재료를 자르고, 깎고, 붙이고, 구부리는 등의 작업에 정교함을 요구하는 일이 피곤하지는 않을까 했는데 이 씨는 이런 일이 천성에 맞는다고 했습니다.

"현악기 제작이란 아주 오랜 시간 숙련하고 갈고 닦아야 하는 직업이라 그에 따른 인내심과 끈기가 매우 필요해요. 단기간에 열심히 한다고 특출난 결과가 보이는 일이 아니죠. 주변 제작자들을 봐도 대부분 차분하고 묵묵한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많아요."

최근에는 공장에서 만드는 저렴한 보급형 악기도 많아졌지만, 이 씨는 아주 작은 부분까지 정성 들여 손으로 만드는 악기를 따라올 수 없다고 자부했습니다.

이 씨는 "세상이 바뀌면서 장인정신이 깃든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도 많이 줄어들었지만, 역으로 장인이 아주 잘 만든 악기의 가치는 더 높아졌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나무는 플라스틱이나 강철같이 규격화된 물질과 달리 소리로, 빛으로 보고 어떻게 다뤄야 할지 최종 결정을 하게 된다"며 "만드는 과정에서 0.1g 차이가 나도 결과물에 크게 영향을 주기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스트라디바리, 과르네리처럼 제 이름을 걸고 만든 악기가 후대에까지 남아서 연주된다는 게 참 매력적이에요. 요즘은 현악기 제작이 상향 평준화돼서 수준이 높아요. 시간이 100년, 200년 지난 뒤에도 소리뿐만 아니라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운 악기를 만들고 싶어요."

(사진=이승진 제공, 연합뉴스)

유영규 기자 sbsnewmedi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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