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용의 물건만담] 진짜 책은 안 팔리는데, 모형 책은 왜 인기인가

박찬용 아레나 옴므 플러스 피처 디렉터 2024. 4. 1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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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 책은 인테리어나 손님몰이용 바람잡이… 코엑스 별마당을 보라
리뷰엔 “지저분한 곳 가려” “책값의 10%” “지성 한 스푼 떨어뜨린 느낌”
이게 요즘 독서 현실… 차라리 ‘멋진 삶의 징표’로 포장하면 좀 나을까
일러스트=이철원

서점을 운영하는 지인에게 요즘 인테리어용 모형 책이 인기라는 말을 들었다. 실내 장식용 모형 꽃이나 모형 과일도 있는데 모형 책이라고 없으란 법이 없다. 이 소식을 전해준 지인의 서점도 보통 책보다 값비싼 해외 디자인 서적이나 사진집을 취급한다. 지인은 그렇게 특수한 책을 취급하기 때문에 오히려 영업이 된다고 했다. 뭐든 보통 책은 잘 안 팔리는 게 시대의 경향이다.

며칠 뒤 모형 책을 검색해 보았다. 과연 많았다. 어떤 쇼핑몰에서는 모형 책 종류가 50종이나 구비되어 있었다. 이런 물건은 누가 어떤 마음으로 사나 싶어 현대 사회 익명 문학의 산실인 리뷰 페이지를 살펴보았다. 애서가나 출판업 종사자에게 들려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한 소감들이 빼곡했다. ‘지저분한 곳을 가려준다’ ‘깔끔하다’ ‘감성 인테리어에 좋다’ ‘허전한 공간에 세워둔다’. ‘책값의 10%다’…. 인테리어 쇼핑몰 ‘오늘의집’에 800개 가까이 쌓인 리뷰 일부다.

‘카페 분위기다.’ 모형 책 리뷰 중 가장 많았던 이 말을 보면 서양의 ‘커피 테이블 북’이 생각난다. 커피 테이블 북은 이름처럼 커피 테이블 위에 올려두는 반쯤은 장식용 책을 말한다. 이 이름에는 사실 두껍고 예쁘기만 한 책에 대한 약간의 무시도 있다. 다만 책을 만드는 내 입장에서 보면 커피 테이블 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훌륭한 대형 책도 많다. 거기 더해 서양에도 여전히 인테리어용 모형 책이 종류도 다양하게 출시되고 있으니 한국도 장식용 책 시장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따르는 셈이다.

제품으로의 책 모형도 세분화되고 다양화되는 추세다. 제품군 안에서는 저렴한 것도 있고 상대적으로 비싼 것도 있다. 저렴한 건 펼쳐지지도 않는 책 모양 직육면체다. 고가형은 자석식으로 탈부착되어 간단한 수납이나 전선 등을 보이지 않게 정리하는 용도로도 쓸 수 있다. 이쯤 되면 왜 장식용 수납함이 책의 모양이어야 하는지가 궁금해지는데, 그 답도 오늘의집 리뷰에 나와 있다. ‘지성 한 스푼 떨어뜨리는 느낌.’

모형 책 유행도 서양이 앞서 겪었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 증거 장면이 나온다. 주 등장인물 닉 캐러웨이는 파티 초대를 받아 찾아간 개츠비의 대저택에서 헤매다 자택 도서관에 들어간다. 그 안에 있던 올빼미 안경 남자는 “이 책이 다 (가짜가 아닌) 진짜”라며 흥분한다. 실제 1920년대 미국에는 가짜 책으로 집을 채운 졸부가 많았다고 한다. 개츠비도 졸부였으나 그의 책은 진짜였으니 적어도 그는 멋을 아는 졸부였다.

한국에서 이미 책은 그 안의 내용을 넘어선 인테리어나 ‘지성 한 스푼’ 느낌으로 쓰이고 있다. 상업 부동산 개발에서 서점의 역할은 손님몰이용 바람잡이다. 코엑스와 스타필드의 별마당 도서관이 대표적이다. 그곳의 상징적인 책꽂이 중 실제로 사람 손이 닿아서 읽을 수 있는 책은 전체 서가의 3분의 1 정도다. 즉 그 도서관 책의 3분의 2는 장식용이다. 책으로 뭔가 해보겠다고 말하던 아크앤북이나 스틸북스는 문을 연 자리에서 5년을 넘기지 못했다.

책으로 공간을 채우는 사람뿐 아니라 책을 만드는 사람들도 장식적인 책을 출간해 왔다. 일반 출판사가 아니라 디자인 에이전시나 콘텐츠 에이전시에서 만드는 책 중 그런 게 많다. 책을 만드는 사람이 보기에는 내용이 부실한 책들도 판매량은 괜찮았고 나름 팬도 생겼다. 이 역시 시대의 요청에 호응한 한국형 커피 테이블 북의 한 분류다. 모형 책의 등장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볼 곳은 예쁜 저품질 책을 만들어오던 에이전시들일지도 모른다.

독서 관련 지표를 따라가면 오늘날 독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독서 인구와 1인당 독서 권수는 계속 줄어든다. 모형 책 시장은 꾸준히 지속되고 점점 고도화된다. 이를 어쩌나 싶으면서도 역시 고전에 답이 있다. ‘위대한 개츠비’ 속 개츠비처럼, 진짜 책을 ‘멋진 삶의 증표’로 포장하면 어떨까. 좋은 책을 사고, 책을 읽는 행동이 멋있어 보인다면 독서 인구도 자연히 늘어나지 않을까.

가식적이고 본질을 벗어난 것 아니냐고? 지금처럼 SNS에서 독자 탓이나 하면서 실제 독자의 목소리는 듣지 않고, 밑도 끝도 없이 정부 탓은 하면서도 기우제 하듯 정부 보조금이나 바라는 일부 출판인의 행태보다는 능동적이고 진취적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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