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 년 만에 부활한 ‘유령 증류소’ [김지호의 위스키디아]

2024. 4. 1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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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주위에 위스키를 좋아한다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입맛은 제각각이고 위스키 종류는 수천 가지. 본인의 취향만 알아도 선택지는 반으로 줄어듭니다. 주정뱅이들과 떠들었던 위스키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당신의 취향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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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라섬 포트 엘런 증류소 모습. 2024.3.1 /김지호 기자

아일라섬에 ‘유령 증류소’가 40여 년간의 침묵을 깨고 부활했습니다. 수많은 위스키 마니아들이 학수고대하던 포트 엘런(Port Ellen) 증류소가 다시 가동에 들어간 것입니다. 유령 증류소란, 문은 닫았지만 여전히 어딘가에 숙성 중인 위스키 오크통을 보관하고 있는 증류소를 말합니다. 증류소가 간판을 내렸다고 멀쩡하게 숙성되고 있는 제품까지 폐기할 이유는 없겠죠. 이러한 위스키 중 일부는 ‘한정판’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출시되는데 대부분 희소성이 높아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령 증류소의 탄생

1999년, 폐허가 된 포트 엘런 증류소 모습. /Graham Fraser

‘재의 수요일’로 불리는 1983년 2월 16일 수요일. DCL(Distillers Company Ltd : 오늘날 디아지오)이 530명의 직원을 해고하고 11개의 위스키 증류소와 1개의 곡물 공장을 폐쇄한다고 발표한 날입니다. 존 헤이그 사의 위스키 병입 공장 인원 500명 중 340명이 정리해고된 지 불과 2주 만에 결정된 사안이었습니다. 이는 위스키의 과잉생산과 세계 경제의 불황이 겹쳐 수많은 위스키업계 종사자들이 생계를 잃은 비극적인 날이었습니다. 이 중에는 포트 엘런 증류소와 직원 17명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500년 넘는 스카치위스키의 역사는 꽤 변덕스러웠습니다. 사회적 분위기나 사람들의 입맛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수많은 증류소가 흥망성쇠를 겪으며 생존 경쟁을 벌여 왔습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위스키는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해 잊혀졌고 이는 곧 증류소의 매출 감소로 이어졌습니다. 증류소는 운영비용 감축과 정리해고를 단행할 수밖에 없었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증류기와 숙성고 내 재고까지 처리해야 했습니다. 1825년 처음으로 문을 연 포트 엘런 증류소도 이러한 상황을 피해 갈 수 없었던 것이죠.

하지만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1987년, 포트 엘런은 아일라 증류소와 신사협정(Concordat of Islay Distillers Gentlemen's Agreement)을 맺고, 맥아 생산량의 일정 분량을 아일라 증류소에 공급하는 조건으로 간신히 생명력을 연장합니다. 디아지오 소속 자회사에 맥아 공급을 위해 1973년 새로 증축한 포트 엘런 몰팅스(Port Ellen Maltings: 맥아 공장)가 빛을 발했던 것이죠.

포트 엘런 몰팅스는 플로어 몰팅 대신 자동화된 대형 드럼 몰팅으로 대량으로 맥아를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손수 삽으로 보리를 뒤집어가며 맥아의 발아를 유도하던 증류소와는 물리적으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늘 맥아 부족 현상에 시달렸던 아일라 증류소와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당시 계약이 더이상 유효하진 않지만, 포트 엘런 몰팅스는 연간 2.2만 톤의 맥아를 생산하며 아드벡, 라프로익, 라가불린 등 여러 아일라 증류소와 맥아를 거래하고 있습니다. 아일라 피트 몰트의 최대 90%는 포트 엘런 몰팅스에서 나온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된 것이죠.

◇40여 년 만에 부활

경매업체 '소더비'(Sotheby's)에 올라온 포트 엘런 증류소 제품들. /소더비

인간의 DNA에 새겨진 회귀본능 때문일까요? 1990년대, 전 세계적으로 다시 싱글몰트 붐이 일어나면서 포트 엘런 제품들이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위스키 마니아들이 유난히 술맛이 좋았던 1960~80년대 위스키를 찾아 나선 것이죠. 뜻하지 않게 오크통에서 인고의 세월을 견뎌야 했던 위스키들은 대부분 숙성연수가 높았고, 희소성까지 더해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포트 엘런 증류소 폐업 당시, 소위 저점 구매에 성공한 디아지오는 화색이 돌았습니다. 가물에 콩 나듯 출시되던 포트 엘런 제품들이 매년 정기적으로 출시되기 시작했고 업계의 컬트(Cult)로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유령처럼 육신은 사라졌지만, 스피릿만큼은 살아서 돌아온 셈이죠. 그렇게 2017년, 디아지오는 포트 엘런 증류소의 재건을 발표했고 2024년 3월, 약 1억 8500만 파운드의 투자 끝에 포트 엘런의 재개장을 알렸습니다.

포트 엘런 증류소의 증류기 모습. 2024.3.1 /게티이미지코리아

지난 3월, 먼발치에서 바라본 포트 엘런 증류소는 막바지 작업으로 분주해 보였습니다. 포트 엘런의 상징적인 숙성고 옆에는 천장부터 바닥까지 내려오는 대형 창문 사이로 두 쌍의 구리 증류기가 보였습니다. 첫 번째 증류기인 ‘피닉스’(The Phoenix Stills)는 서양배 형태로 기존 포트 엘런 증류기를 그대로 복제한 제품이었습니다. 이는 아일라 특유의 전통적인 스모크 위스키를 만드는 데 사용될 것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작은 증류기는 새로운 스피릿을 발견하기 위한 실험적인 증류를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보통 일반적인 증류소에서는 스피릿을(Spirit: 증류액) 초류, 본류, 후류로 구분하는 반면, 포트 엘런의 실험용 증류기는 10개의 각기 다른 관들이 스피릿 세이프(Spirit Safe: 증류장치)로 연결돼 있다고 합니다. 이는 최종 증류액을 더욱 세분화 시켜서 채취하는 용도라고 합니다. 아쉽게도 증류소 투어는 6월부터 가능해서 입맛만 다시고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아일라섬 포트 엘런 증류소 모습. 우측 회색 건물이 맥아 공장인 포트 엘런 몰팅스. 2024.3.1 /김지호 기자

시대를 잘못 타고난 증류소가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스카치위스키는 규정상 최소 3년은 오크통에서 숙성 과정을 거쳐야 세상에 나올 수 있습니다. 엔트리급 위스키의 구색을 갖추기까지는 10년 넘는 세월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겠죠. 어쩌면 기존에 잠들어 있던 고숙성 위스키들이 새롭게 꽃단장하고 시장에 나타날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잊힌 과거의 유산이 현대의 기술과 만나 옛 영광을 다시 찾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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