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고통의 바다… 또 다른 모험 ‘고래’와 맞설 용기가 필요해

김용출 2024. 4. 9.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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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역판 개역 출간된 허먼 멜빌 ‘모비딕’
김석희 작가, 150여개 역주 추가 보완
등장인물 소개·역자 대담까지 더해
13년 만에 작품의 다면적 이해 도와
포경선 경험 바탕 기반 19C 중반 집필
사후 최고의 모험·해양소설로 재평가
인간과 우주에 관한 철학적 사유 가득

포경업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1820년 11월20일, 서경 119도의 적도 바로 남쪽인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미국 포경선 에섹스호가 보트를 풀어 고래 떼를 추적하고 있었다. 이때 거대한 수컷 알비노 향유고래 한 마리가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본선을 향해 달려들었다. 향유고래는 머리를 이용한 강력한 박치기 공격을 해왔다. 한 번, 두 번. 선체에 구멍이 뚫리면서 238t의 에섹스호는 10분 만에 침몰하고 말았다.

일등항해사 오웬 체이스를 비롯해 에섹스호 선원 21명은 배가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침몰하자 작은 보트에 의지하면서 구조를 기다려야 했다. 식량이 부족해 죽은 동료의 인육을 먹기도 했다. 다행히 지나가는 배에 의해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살아 돌아온 체이스는 얼마 뒤 ‘포경선 에섹스호의 놀랍고도 비참한 침몰기’를 펴냈다.

출간 당시 어렵고 낯설다는 이유로 외면당했지만 멜빌 사후 최고의 모험소설이자 해양소설로 재평가받은 ‘모비딕’. 완역판으로 큰 인기를 모은 김석희 작가의 완역판이 13년 만에 개역 출간됐다. 사진은 작가 허먼 멜빌. 작가정신 제공
당시 칠레 남부 모카섬 인근에는 ‘모카딕’이라는 거대한 흰색 알비노 향유고래가 포경선을 공격해 악명이 높았다. 길이 26, 몸무게 80t에 달하는 모카딕은 포경선을 보면 도망가기에 급급한 일반 고래와 달리 배로 돌진해 머리를 이용한 박치기나 큰 꼬리지느러미를 이용한 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1838년 모카딕이 포경선에 잡혔을 때 그의 몸에는 무려 19개의 작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에섹스호가 침몰한 이십 년 뒤인 1841년 1월, 스물두 살의 청년 허먼 멜빌은 매사추세츠주 페어헤이븐에서 선원으로서 포경선 ‘애커시넷호’를 타고 태평양으로 항해했다. 이때 우연히 체이스의 글을 읽게 됐다. 그는 미 해군 수병까지 3년간 뱃사람 경험을 했다.

소설 ‘타이피’와 ‘오무’, ‘레드번’ 등을 발표하며 소설가가 된 멜빌은 1850년 여름부터 자신의 포경선 경험과 체이스 아들을 만나서 얻은 정보 등을 바탕으로 필생의 역작을 쓰기로 결심했다. 모비딕에게 다리를 잃은 복수의 화신 에이해브 선장이 선원들을 이끌고 저 멀리 태평양까지 추적을 거듭한 끝에 모비딕과 최후의 결전을 벌이는 이야기를. 그는 이를 이듬해 10월 런던 리처드벤틀리출판사에서 세 권짜리 삭제판인 ‘고래’라는 이름으로, 이어서 11월 뉴욕 하퍼앤브라더스출판사에서 한 권짜리 ‘모비딕’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모비딕’은 출간 당시 어렵고 낯설다는 이유로 외면당했지만 그의 사후 최고의 모험소설이자 해양소설로 재평가받으며 현대 미국의 대표작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어판은 1954년 로버트 딕슨의 축약본을 바탕으로 을유문화사에서 처음 번역 출판됐고, 1959년 양병탁씨의 완역판이 처음 출간됐다. 이후 출간이 이어진 가운데, 독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김석희 작가의 완역판 ‘모비딕’(작가정신)이 최근 13년 만에 개역 출간됐다. 기존 완역판에서 150여개의 역주를 추가할 정도로 ‘결정판’으로 손색없도록 보완했고, 등장인물 소개와 작가연보는 물론 역자 대담까지 추가돼 작품에 대한 다면적인 이해를 돕고 있다. 자, 김 작가의 개역판 ‘모비딕’ 속으로….

화자인 이슈메일은 육지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거대한 고래를 직접 만나기 위해서 뉴욕 맨해튼을 떠나서 뉴베드퍼드에 도착한다. 여인숙에서 거구의 괴기한 야만인 퀴퀘그를 만난 뒤 동부 낸터컷으로 가서 함께 문제의 포경선 ‘피쿼드호’에 탑승한다.

“어쨌든 그건 모두 정해져 있고 예비된 일이야.” 일라이저라는 광인으로부터 운명에 대한 이 같은 경고를 들은 이슈메일 일행은, 추운 크리스마스 날 운명의 항해에 나선다. 출항 며칠 만에야 선장 에이해브를 처음 보게 되는데, 한쪽 다리를 잃은 선장은 고래뼈로 만든 의족을 하고 모비딕을 향한 복수의 일념을 불태운다.

“나는 희망봉을 돌고 혼곶을 돌고 노르웨이의 마엘스트롬을 돌고 지옥의 불길을 돌아서라도 놈을 추적하겠다. 그놈을 잡기 전에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 대륙의 양쪽에서, 지구 곳곳에서 그놈의 흰 고래를 추적하는 것, 그놈이 검은 피를 내뿜고 지느러미를 맥없이 늘어뜨릴 때까지 추적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항해하는 목적이다.”(250쪽)

에이해브 선장은 무리한 항해를 말리는 일등항해사 스타벅의 충고를 뿌리치고 모비딕을 끝까지 쫓는다. 대서양에서 인도양으로, 급기야 태평양으로. 에이해브 선장과 선원들은 끝없는 항해 끝에 마침내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모비딕과 대면하게 된다.

“지나간 내 생애의 거센 파도여, 저 아득한 곳에서 밀려와 내 죽음의 높은 물결을 더욱 높게 일게 하라! 모든 것을 파괴할 뿐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에게 달려간다. 너와 끝까지 맞붙어 싸우겠다. 지옥의 한복판에서 너를 찌르고, 내 마지막 입김을 너에게 증오를 담아서 뱉어주마. 관도, 상여도 모두 같은 웅덩이에 가라앉혀라! 어떤 관도, 어떤 상여도 나에겐 소용없다. 저주받을 고래여, 나는 너에게 묶인 채 너를 추적하면서 산산이 부서지겠다. 자, 이 창을 받아라!”(760쪽)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문제적이다. 우선 구약성서 ‘열왕기’에서 폭군으로 등장하는 ‘아합’에서 유래한 복수의 화신 에이해브 선장이 그렇다. 일부 영웅적인 면모도 읽을 수 있겠지만, 그의 광기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같은 광기 어린 인물을 비판할 때 그가 자주 비유되는 이유일 것이다. 이성적이면서도 끝내 에이해브 선장을 배신하지 못하는 일등항해사 스타벅, 에이해브와 정반대로 늘 낙관적인 이등항해사 스터브, 아메리카 토착민 추장의 아들이자 순수하고 이타적인 퀴퀘그, 유일한 생존자이자 화자인 이슈메일….

재미있는 것은 타이틀 캐릭터인 모비딕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할 것인가에 따라서 소설의 성격, 인물 해석, 가능성이 180도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모비딕은 에이해브와 선원들의 추격 대상이지만, 한편으론 작가의 우주론적 상상력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이 녹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약 신비로운 신의 본성을 대변하는 존재로 이해한다면 에이해브 선장은 신성한 권위와 질서에 도전하는 신성모독적 존재가 되고, 반대로 비이성적인 거악으로 바라본다면 에이해브는 도리어 거악에 맞서 싸우는 외로운 영웅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소설은 선장 에이해브와 스타벅, 스터브 등의 항유고래 추적기이고, 화자 이슈메일의 고래와 포경에 대한 지적 탐색기이며, 고래 모비딕을 통해 펼쳐 보이는 작가의 우주론이자 세계 존재론이다. 단순히 광기 어린 선장 에이해브와 선원들의 고래 추적기로만 해석하면 안 되는 이유다. 책은 고래와 포경업에 대한 지식적 탐색과 아울러 인간과 우주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명상으로 가득 차 있다.

1819년 미국 뉴욕시에서 의류와 직물을 수입하는 무역상을 하는 스코틀랜드계 아버지와 네덜란드계 어머니 사이의 8남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난 멜빌은 1846년 소설 ‘타이피’를 출간하면서 소설가로 데뷔했다. 이후 소설 ‘오무’, ‘마디’, ‘레드번’, ‘하얀 재킷’, ‘모비딕’, ‘사기꾼’, ‘필경사 바틀비’ 등을 차례로 발표했다. 생전에 성공한 작가가 되지 못했지만, 탄생 백주년을 맞아 재조명받으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가 됐다. 아직도 그의 영혼은 ‘모비딕’ 속에서 분투하는 선원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갑자기 ‘고래가 물을 뿜는다!’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면 불쌍한 선원들은 화들짝 놀라 당장 또 다른 고래와 싸우러 달려가서, 진저리나는 그 일을 처음부터 다시 되풀이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오! 친구들이여, 이것은 정말로 사람 죽이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인생이다. 우리는 오랜 고생 끝에 이 세상에서 가장 덩치 큰 동물에게서 비록 적지만 매우 귀중한 경뇌유를 뽑아낸 뒤, 녹초가 되었지만 참을성 있게 몸에 묻은 오물을 씻어내고, 영혼의 임시 거처인 육신을 깨끗이 유지하면서 사는 법을 배우자마자, ‘고래가 물을 뿜는다!’ 하는 외침 소리에 영혼은 용솟음치고, 우리는 또 다른 세계와 싸우러 달려가, 젊은 인생의 판에 박힌 일을 처음부터 다시 되풀이하는 것이다.”(581쪽)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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