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주고 폰 맡기고, 빠지면 벌금 내고… '자제력' 구매하는 세상

김하나 기자 2024. 4. 9.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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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천태만상 세태+
디지털 기기 사용 불가 카페 화제
카페 나설 때까지 기기 사용 못해
디지털 디톡스 원하는 방문객 늘어
온라인상에도 ‘금욕상자’ 상품 판매
벌금제 스터디·관리형 독서실 등
같은 맥락의 경제 현상 나타나
돈 써가며 ‘자제력’ 사는 사람들

스마트폰을 의무적으로 반납해야 이용할 수 있는 카페가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 돈을 더 내더라도 관리자가 출석 여부를 체크하는 관리형 독서실도 성행한다. 하물며 불참 시 벌금을 내는 스터디 모임까지 인기를 끌고 있다. 자제력을 구매하는 시대가 낳은 새로운 트렌드다.

디지털 디톡스 카페 방문객은 입장과 동시에 디지털 기기를 반납해야 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디지털 디톡스 카페. 휴대전화를 포함한 모든 디지털 기기의 사용을 금지하는 카페가 젊은층 사이에서 인기다. 애초에 일반 북카페로 문을 열었던 서울 역삼동의 '욕망의 북카페'는 디지털 디톡스 카페로 전환하면서 인기몰이에 성공하고 있다.

카페 매니저 이인하(28)씨는 "책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 디지털 디톡스 카페로 전환했다"고 밝혔다. "처음 일반 북카페를 열었을 땐 책을 읽는 분들도 있었지만 노트북이나 휴대전화를 하는 분들이 더 많았어요. 취지에 맞게 책에 몰입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고, 그래서 디지털 디톡스 카페로 새롭게 문을 열었죠."

카페 이용 방법은 간단하다. 이용객은 금고 형태의 보관함에 스마트폰을 포함한 디지털 기기를 모두 반납한다. 카페를 나설 때까진 사용 불가다. 도난과 분실을 우려하는 이용자를 위해서 '몰입의 방'이라고 이름 붙인 개별 보관함도 마련했다. 일종의 '금욕상자'와 같은 건데, 이용자가 직접 타이머로 설정한 시간이 지나야만 디지털 기기를 꺼낼 수 있다. 설정 시간 전에 꺼낼 수 있는 방법은 망치로 깨부수는 것뿐이다.

이런 전략은 적중했다. 욕망의 북카페는 현재 평일과 주말 모두 웨이팅이 발생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전국 곳곳에서 이용객이 몰리면서 올해 여름엔 더 넓은 공간으로 이전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카페를 찾은 대학생 박규영(가명ㆍ25)씨는 "휴대전화 사용을 줄이기 위해 집에 두고 외출하거나 전원을 끄기도 해봤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면서 "카페 내 모든 사람이 휴대전화를 강제로 제출해 사용하지 못하니, 불안감을 덜고 책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이용객 윤다영(33ㆍ직장인)씨는 "디지털 디톡스 카페는 의도적으로 환경을 설정해주는 곳"이라며 말을 이었다. "저 혼자만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는 점이 특별한 듯해요. 다음에 또 방문할 생각이에요."

'몰입의 방'이라고 이름 붙인 금욕상자. 타이머가 종료할 때까지 잠금장치를 열 수 없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디지털 디톡스를 내세운 서비스는 '오프라인' 공간에만 있는 건 아니다. 비슷한 콘셉트의 서비스나 상품은 온라인 쇼핑몰에도 숱하다. 예컨대, 온라인 쇼핑 플랫폼 네이버쇼핑에서 금욕상자를 검색하면 2만여 개에 이르는 상품이 쏟아져 나온다. 이를 찾는 사람이 차고 넘친다는 방증이다.

그럼 사람들이 자기 돈을 써가면서까지 스스로를 옥죄는 까닭은 뭘까. 곽금주 서울대(심리학)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주변에 유혹이 너무 많은 세상입니다. 무언가를 절제하는 게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시대죠. 특히 어린 시절부터 스마트폰을 통해 중독성 강한 콘텐츠를 많이 접해온 젊은 세대는 조절 능력이 더 약한 듯해요. 그래서 '욕망의 북카페'든 '금욕상자'든 절제를 강제하는 서비스나 상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봅니다." 휘발성 강한 콘텐츠에 길들여진 젊은 세대가 돈을 주고 '자제력'을 구매하고 있다는 건데, 사례를 좀 더 살펴보자.

최근 젊은층에서 유행하는 '벌금제 스터디 모임'.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는 스터디 모임에 벌금제를 도입한 방식이다. 쉽게 말해, 스터디에 빠지고 싶은 욕구를 '벌금'이란 도구로 자제하는 거다.

벌금제 스터디 모임의 운영자인 윤준건(31ㆍ직장인)씨는 "일반 스터디 모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와해했지만 벌금제 스터디는 1년 이상 유지하고 있다"면서 말을 이었다. "정말 피곤해서 가기 싫은 날에도 벌금 생각을 하면 스터디에 참여하게 되더라고요. 벌금제 스터디를 운영하면서 벌금과 같은 강제성이 없이는 스스로 절제하고 자제하면서 뭔가를 실천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새삼 느낍니다."

'관리형 독서실'이 우후죽순 생겨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관리형 독서실이란 종합적인 관리 시스템을 갖춘 독서실을 의미한다. 가령, 스마트폰을 의무적으로 반납하기도 하고, 관리자가 독서실 출석 여부와 공부 진도를 체크하기도 한다. 관리형 독서실은 이용 가격이 월 30만~40만원으로 일반 독서실보다 비싸지만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올해 1월부터 관리형 독서실을 이용하고 있는 대학생 박다미(가명ㆍ25)씨는 "비용이 더 들더라도 집중이 잘되는 공간이 필요했다"면서 "집이나 일반 독서실의 경우 스스로를 제어하기 어려울 때가 많아서 비용이 더 들더라도 관리형 독서실을 좀 더 이용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관리형 독서실 관계자는 "공부에 집중해야 하는데 자제력이나 의지가 부족할 때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도움을 받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헬스장에서 혼자 운동하지 않고, 고가의 퍼스널 트레이닝(PT)을 받는 것도 궁극적으론 자제력을 구매하는 것과 다름없다. 한동안 중단했던 PT를 최근 다시 시작한 직장인 황이준(가명ㆍ27)씨는 "트레이너와 만나는 PT 일정이 없으면 마음이 해이해져서 일주일에 3번 갈 운동을 1번만 가곤 했다"면서 "내 몸에 비싼 돈을 투자했다는 생각으로 PT만은 빠지지 않도록 절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돈을 들여서라도 삶과 일상을 절제하려는 이들이 가파르게 늘고 있다. 디지털 디톡스든 벌금형 스터디든 PT든 형태는 다르지만 맥은 똑같다. 이 때문인지 '자제력'을 구매하는 행위를 새로운 트렌드로 해석하는 전문가도 있다.

김보름 한성대(문학문화콘텐츠학) 교수는 "지금 젊은 세대는 '도파민(쾌락ㆍ욕망 등에 영향을 주는 호르몬) 디톡스'를 위해 금욕상자에 물건을 넣어놓고 그 모습조차 인증하는 세대"라면서 "트렌드란 순환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또 변화하겠지만, 자제력 구매 시장이 당분간은 커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하나 더스쿠프 기자
nayaa1@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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