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네 사회생활의 시작 [똑똑! 한국사회]

한겨레 2024. 4. 8.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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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4일 서울 영등포구 문래초등학교에서 입학식을 마친 1학년 4반 신입생들이 교실에서 필기구를 정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송아름 | 초등교사·동화작가

그라츠라는 도시를 여행한 적이 있다. 오스트리아 제2의 도시지만, 한국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지명이다. 나도 그라츠에서 유학하는 친구가 없었다면 아마 가지 않았을 것이다. 가톨릭 신학생이었던 친구는 가는 곳마다 제일 먼저 성당에 들러 벽에 걸린 성화의 내용과 성상의 이름을 알려주었는데 그라츠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 넘게 달려 도착한 시골 마을 탈에서도 성당이 첫번째 목적지였다. 탈 성당은 그동안 보아온 고딕 성당과 달리 현대적인 건축물로, 바닷속에 들어온 듯 파랗고 영롱한 기하학무늬들이 굉장히 특이했다. 그렇다고 이 성당 하나를 보자고 여기를 온 건가 싶어 조금 허무했는데, 친구가 학교처럼 보이는 건물을 가리켰다. 건물 벽에는 누가 장난이라도 친 것처럼 커다란 그라피티 문장이 독일어로 쓰여 있었다. ‘아널드 슈워제네거, 그의 사회생활의 시작.’ 그곳은 배우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다닌 초등학교였다.

내가 그라츠를 여행했던 2011년에 이미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다. 50여년 전 그 마을에 살았던 어린 아널드가 자신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알았을지 궁금해졌다. 미국으로 가 보디빌더 세계 챔피언이 되었고, 배우로 활약했으며, 케네디가의 여성과 결혼해 정치에 입문했고,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당선되어 일했던 그 긴 여정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시작이 어디였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그 벽을 마주한 순간은 3주간의 유럽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었다.

학교와 사회생활이라는 말은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학교와 사회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공부를 마치면 사회로 나가고, 그때부터 사회생활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때 나는 첫 학교에 발령받아 우당탕 초임 교사 시절을 보내는 중이었지만, 교실은 작은 사회고 그 사회가 무수히 많은 다른 사회와 이어져 있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 문장이 반가웠고, 아이들에게 자주 들려주었다. 매일 반복하는 사소한 일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는 아이에게, 지금 여기에 집중하며 즐겁게 배우는 것보다 시험 한번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 아이에게 거듭 말해주었다. “여기가 네 사회생활의 시작이야.”

아널드 슈워제네거를 좋아하지도,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었지만, 그 벽 덕분에 노년에 접어든 근육질 배우의 반짝이던 어린 시절을 상상해보았다. 교사가 되어 가장 행복한 순간은 바로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고 느낄 때다. 맞춤법 틀리며 삐뚤빼뚤 글씨를 썼던 아이가 12월에는 제법 글다운 글로 감사 편지를 써줄 때, 3월 첫날 잔뜩 긴장한 얼굴로 친구에게 어떻게 말을 걸지 몰라 눈동자마저 흔들리던 아이가 학년 마지막 날 단짝 친구와 손을 꼭 잡고 순한 웃음을 띠며 교실을 나설 때. ‘앞니 빠진 중강새’였던 녀석들이 몇년 사이에 코 밑이 시커먼 소년이 되어 학교를 떠나고, 교복을 입고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선생님을 만나러 올 때다. 마법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성장의 순간들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함께하는 어른으로 서 있는 날들은, 다른 어디서도 경험하기 힘든 선생님들만의 기쁨이다. 나는 그 벽을 보며 거꾸로, 내가 만난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갈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마음이 벅차올랐다.

이제 탈의 초등학교에는 더 이상 그 벽이 남아 있지 않고,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그 문장을 자주 떠올린다. “여기가 네 사회생활의 시작이야”라는 말에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꾹꾹 눌러 담는다. 교실은 하나의 사회고, 우리는 그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배우고 어울리며 성장해가는 과정에 있다고. 그러니 사과하는 것도, 용서하는 것도, 배려하는 것도, 감사하는 것도 같이 배워가자고. 앞으로 펼쳐질 길고 긴 너의 인생에서 이 시작을 기억하고 늘 응원한다고. 세상 모든 선생님의 마음을 대신하여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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