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침대에 누워있다고 상상하니 어색했다… 다시 뜨거워질 수 있을까[소설, 한국을 말하다 2]

장상민 기자 2024. 4. 8.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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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정진영
섹스리스 - 가족끼리 왜이래
일러스트 = 변영근 작가

남편 대혁이 밴드 스매시의 재결성 공연 티켓 예매에 성공했다고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을 때, 수연은 마치 로또에 당첨되기라도 한 듯 흥분했다. 밴드 멤버들이 다시 한 무대에 서는 모습을 보는 날이 오기를 오랫동안 간절하게 기다려왔으니 말이다. 밴드의 재결성 소식도 놀라운데, 대혁이 발 빠르게 나서서 공연 티켓까지 확보하다니. 수연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나오려는 입을 손으로 막았다. 공연 일자는 두 달 뒤, 장소는 밴드가 9년 전 고별 공연을 열었던 부산시민회관 대극장이었다. 팬들에게 작별을 고했던 장소에서 열리는 재결성 공연이라니, 이보다 더 극적인 귀환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대혁이 보낸 다음 메시지가 끓어올랐던 수연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9년 만에 부산으로 내려가는 건데, 공연 끝나고 해운대로 움직이자. 포차거리에서 한잔하고 근처 호텔에서 하룻밤 자면 딱이겠네. 어때? 옛날 생각도 나고 재미있겠다.

수연은 대혁에게 답을 하려다가 멈칫했다. 호텔? 하룻밤? 호텔에는 보통 더블베드 침대 하나가 놓여 있지 않나? 수연은 대혁과 한 침대에 누워있다고 상상하니 몹시 어색했다. 한발 더 나아가 대혁이 분위기를 잡으며 진한 스킨십을 시도하는 모습을 떠올리니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1분, 2분, 3분……. 수연은 대혁에게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한 채 휴대전화를 덮었다. 수연은 자신을 둘러싼 공기가 어색하고 낯설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수연이 대혁과 각방을 쓴 세월을 헤아려보니 6년이 넘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대혁과 연애한 지 2년 만에 결혼했고 바로 아이가 생겼는데 쌍둥이였다. 입덧은 육아에 비하면 고생도 아니었다. 둘이 서로 번갈아 가면서 한 시간마다 깨어나는 통에 밤을 새우기가 일쑤였다. 새벽 1시쯤에 먼저 깨어난 첫째 이언을 30∼40분에 걸쳐 수유하고 트림시키고 재우면, 둘째 이서가 깨어나 울었다. 이 같은 과정이 몇 차례 반복되면 어느새 창밖에선 동이 텄다. 둘이 동시에 깨어나 울기라도 하는 밤에는 종교가 없는데도 신을 찾곤 했다.

전쟁 같은 나날에서 조금이나마 해방될 수 있었던 계기는 시어머니와의 합가 덕분이었다. 시어머니는 40년 가까이 어린이집을 운영하다가 은퇴한 뒤 홀로 전원주택에서 소일했다. 대혁은 수연에게 시어머니께 도움을 요청해 보자고 조심스레 제안했다.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 적적하게 지내시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평생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봤던 분이니 이보다 적임자가 누가 있겠느냐면서.

만약 대혁이 결혼 전에 그런 제안을 했다면, 수연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파혼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혼자 자취한 세월이 길어서 어쩌다 명절에 친정 부모와 한 공간에 있을 때도 어색한데, 시어머니와 한 공간에 있다? 수연은 상상만 해도 숨이 막혔다. 하지만 자기 코가 석 자였다. 이언과 이서에게 번갈아 가며 밤낮없이 시달리다 보니, 시어머니와 한 공간에서 지내도 충분히 견딜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어머니는 흔쾌히 수연과 대혁의 제안에 응하며 전원주택 생활을 청산했다.

시어머니 덕분에 수연과 대혁은 빠르게 생활에 안정을 찾았다. 수연은 출산휴가 3개월 뒤 곧장 회사로 복귀해 승진까지 할 수 있었고, 대혁도 회사에서 비중 있는 프로젝트에 참여해 성과를 내며 인정받았다. 이언과 이서는 시어머니의 정성을 다하는 보살핌 속에서 무탈하게 자라났다. 수연은 언젠가부터 친정 부모보다 시어머니가 더 편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언과 이서도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시어머니를 가장 먼저 찾았다. 수연은 그런 시어머니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문제는 수연과 대혁의 부부 관계였다. 시어머니와의 합가 후 둘만의 공간이 사라졌다. 안방은 수연과 쌍둥이의 차지가 됐고, 어머니는 작은방을 썼다. 안방에서 쫓기듯 나온 대혁은 거실에 이부자리를 폈다. 휴일에도 대부분의 일상이 이언와 이서를 중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수연과 대혁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일이 드물었다. 이렇게 몇 년이 흐르자 자연스럽게 둘 사이의 스킨십도 뜸해졌다. 어쩌다 대혁이 수연에게 슬쩍 스킨십을 시도하면, 수연은 “가족끼리 왜 이래?”라고 너스레를 떨며 대혁에게 핀잔을 주기도 했다.

수연은 고민에 빠졌다. 설마 내가 살갗이 닿는 게 싫을 정도로 남편을 싫어하는 걸까? 그건 절대 아니었다. 수연은 대혁을 사랑했다. 아니, 대혁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수연은 지금 부산에 내려가서 대혁과 한 침대에 누워있을 미래를 걱정하는 자신이 어처구니없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심리인지 자신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수연은 마지막으로 부부 관계를 한 게 언제인지 기억을 더듬어봤다. 기억은 시어머니와 합가하기 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갔다. 정말? 그렇게 오래됐다고? 수연은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듯 멍해졌다.

한때 수연에게도 대혁과 눈만 맞으면 불이 붙었던 시절이 있었다. 수연은 스매시 고별 공연이 끝난 후 해운대 포차거리에서 대혁과 처음 만났다. 공연이 끝난 후 수연이 느낀 감정은 슬픔이나 아쉬움보다는 분노였다. 소문에 따르면 밴드의 활동 중단 원인은 멤버 간 불화였고, 나중에 기사를 통해 소문은 일부 사실로 확인됐다. 당시 스매시는 음악적으로나 인기 면으로나 절정을 달리고 있었다. 데뷔 때부터 스매시를 응원했던 수연은 갑작스러운 밴드의 활동 중단 선언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수연은 혹시라도 밴드가 활동 중단을 번복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 고별 기념 전국 투어 마지막 공연이 열리는 부산까지 찾아왔지만 그런 건 없었다. 그대로 끝이었다. 그때 수연이 가슴 속의 화를 달래려고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곳이 해운대였다.

수연은 해운대 해변에서 잠깐 바다를 구경하고 포차거리에 들러 홀로 골뱅이에 소주를 마시다가 대혁을 만났다. 수연은 대혁이 목에 두른 공연 기념 수건을 보고 아는 체했다. 공교롭게도 대혁 또한 스매시의 오랜 팬이었고, 고별 공연 후 헛헛함을 견디기 어려워 포차거리를 찾은 터였다. 둘은 만난 첫날부터 과음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결국 그날 밤에 한 이불을 덮었다. 다음 날 둘은 돼지국밥 노포에서 함께 해장하며 서로를 쑥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 그렇게 연애를 시작했던 우리가 10년도 안 돼 섹스리스가 됐다니. 이게 실화인가? 수연은 생각할수록 어이없고 우스웠다.

대혁은 지난 몇 년을 어떻게 참은 걸까? 수연은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대혁은 그동안 수연에게 딱히 관계를 요구하지 않았다. 사실 요구했더라도 해결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수연과 대혁의 동선은 거의 집과 회사로 고정돼 있는데, 집 안에는 둘이 마음 편하게 시간을 보낼 공간이 없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시어머니가 계시니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언과 이서도 초등학교에 입학할 만큼 컸으니, 대혁은 스매시의 재결합 공연을 계기로 부부 관계를 재정립하려고 시도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티켓 예매에 열을 올린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니 수연은 대혁이 홀로 애쓰는 것 아닌가 싶어 안쓰러웠다. 그런데도 수연은 대혁과 한 침대에 누워야 한다고 생각하니 다시 부담감에 사로잡혔다.

수연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스매시 멤버들은 재결합 결정이 쉬웠을까? 정점에 올랐을 때도 서로 싸워서 모든 걸 다 버리고 활동을 중단했는데? 아마도 오랫동안 서로 간에 쌓인 오해를 풀며 화해하는 등 팬들은 모를 물밑작업이 있었을 테다. 공연은 아직 두 달이나 남았다. 그때까지 천천히 다시 가까워지는 시도를 하면, 공연이 끝난 후 모처럼 즐겁게 한잔을 나눈 뒤 밤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뜨거워질 수 있지 않을까? 수연은 다시 휴대전화를 들고 대혁에게 뒤늦은 답을 했다.

―미안해. 회의가 길어져서 답이 늦었어. 그나저나 도대체 어떻게 피켓팅을 성공한 거야? 박대혁, 역시 대단한 사람이야. 스매시 재결성 기념으로 오늘 퇴근하고 오랜만에 둘이서 한잔 어때? 집 근처에 꼬치구이 전문점이 새로 열었는데 궁금하더라. 맛있어 보이더라고.

대혁이 바로 수연에게 답했다.

―웬일이야? 먼저 그런 말을 다 하고. 가족끼리 왜 이래?

가족끼리 왜 이래……. 수연은 대혁의 뼈 있는 농담에 자기에게 은근히 서운한 감정이 쌓였음을 느꼈다. 수연은 그런 대혁에게 미안하면서도 민망해 살짝 얼굴을 붉혔다.

―가족이니까 그렇지! 이따가 봐. 끝나고 바로 연락할게.

수연은 휴대전화를 덮으며 아침에 집 근처 공원을 지나치다가 본 매화를 떠올렸다. 바람에 실려 와 출근길 발걸음을 붙잡았던 그윽한 매화 향기. 수연은 저녁에 대혁과 한잔 마시고 가볍게 공원을 산책하며 그 향기를 맡는 상상을 했다. 그런 분위기라면 수연은 먼저 대혁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 것 같았다.

“섹스리스는 평범한 일상의 고민이죠. 자극적이지 않아도 공감할 수 있도록 다뤄보고 싶었어요.” 정진영 작가의 ‘가족끼리 왜 이래’는 아이가 태어난 후 자연스럽게 각방을 쓰게 된 섹스리스 부부의 이야기를 그린다.

“섹스는 부부의 가장 농밀한 대화 함께 노력해야”

■ 작가의 말

연애 2년 만에 결혼한 대혁과 수연은 곧바로 쌍둥이가 생겨 육아와의 전쟁을 치르며 살았다. 육아의 짐을 덜기 위해 대혁의 엄마와 함께 지내게 됐고 부부만의 공간은 사라졌다. 둘을 연인으로 이어준 한 밴드의 재결성 공연으로 인해 오랜만에 한 침대에서 밤을 보내게 되자 아내 수연은 대혁과의 소원해진 부부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정 작가는 밴드의 재결성과 부부 관계의 회복을 교차시킨 이유에 대해 “밴드와 부부 모두 사람이 모여 만들어지는 건데, 의견이 맞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밴드처럼 서로 사이가 좋지 않으면 부부도 행복한 관계를 이어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소설 속 부부처럼 아내와 만난 지 10년이 됐다는 정 작가는 “소설을 쓰면서 저 또한 아내와의 관계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며 독자들에게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섹스는 부부가 나눌 수 있는 가장 농밀한 대화죠. 다퉜던 부부가 섹스로 화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한 사람만 노력해선 안 됩니다. 소설이 함께 노력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 정 작가는

1981년생. 2011년 등단 후 ‘침묵주의보’ ‘젠가’ ‘정치인’ 등을 썼다. 소설집 ‘괴로운 밤, 우린 춤을 추네’ 등이 있다. 월급사실주의 동인.

장상민 기자 joseph0321@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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