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직을 잃는 순간 시드는 권력이란 꽃

이남석 발행인 2024. 4. 7. 22:0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62
석방과 백의종군 결정한 선조
서신으로 접한 어머니 별세 소식
난중일기에 나타난 순신의 효심
존경과 신의 잃지 않은 이순신

권력은 꽃과 같다. 권력을 잃는 순간 이내 시들어서다. 그래서 직職을 잃은 후에도 존경받고 싶다면 권력을 갖고 있을 때 고개를 더 숙여야 한다. 그게 리더의 책무다. 백의종군 후에도 존경과 신의를 잃지 않은 이순신은 리더의 삶이 어때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권력자를 향한 진짜 평가는 직에서 내려오는 순간 시작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이것저것 따져보던 선조는 1597년 음력 3월 마지막 날이 돼서야 '이순신의 석방과 백의종군'을 결정했다. 다음날인 4월 1일 아침, 이순신은 옥문을 나와 숭례문 밖에 있는 민가에 도착했다. 둘째 아들(울)과 조카(봉·분), 윤사행, 원경 등이 그를 맞았다.

이때 판서 윤자신尹自新, 비변랑 이순지李純智가 직접 찾아와 위문했다. 영의정 류성룡, 판부사 정탁, 도승지 심희수, 경림군 김명원, 대사헌 노직, 병조참판 이정형, 병사 곽영 등은 사람을 보내 문안했다.

이순신은 이날부터 다시 일기를 썼다. 첫 일기에 "더해지는 울컥한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며 심경을 밝혔다. 이 때문인지 저녁엔 술을 갖고 다시 찾아온 이순지와 때맞춰 찾아온 윤기헌과 함께 취하도록 마셨다.

만약 이순신이 붓을 옆에 끼고 살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조선에 만연했던 온갖 삿된 일들이 왜곡돼 전해져 내려왔을 것이다. 그는 제일 먼저 붓을 챙겼다. 4월 2일의 일기에 따르면, 이순신은 필공(붓을 만드는 사람)을 불러 붓을 묶게 했다. 그리고 해가 저물 때 성 안으로 들어가 영의정 류성룡과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인 4월 3일, 이순신은 권율의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에 따라 경남 합천의 초계에 있는 도원수부를 향해 길을 떠났다. 말을 타고 인덕원을 거쳐 당일 수원으로 들어갔다. 경기 관찰사 휘하의 이름도 모르는 군사의 집에 하루를 묵었는데, 우연히 만난 신복룡이 이순신의 행색에 놀라 술을 대접했다. 4일에는 오산의 황천상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했다. 황천상은 이순신의 짐이 무겁겠다며 말을 내어주기도 했다. 평택에 도착해서 이내은 손자의 집에서 투숙했는데, 방에 불을 때주는 호의를 베풀었다.

5일에는 아산의 선산에 들러 분묘를 한 후 곡을 하고 외가의 사당, 조상의 사당, 장인·장모의 신위, 작은 형(요신)과 제수씨의 사당을 차례로 찾아가 배례했다. 이순신에겐 두 명의 형이 있었지만 안타깝게 모두 일찍 죽었다. 부친 또한 일찍 돌아가셨다. 의지할 어른이라고는 늙으신 어머니밖에 없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시절에 부인 방씨에게 아산 본가를 맡기고 77세의 어머니 변씨를 순천의 전라좌수영에서 20리 정도 떨어진 군관 정대수의 초당으로 모셔와 안부도 전하고 만나 뵙기도 했다. 장수를 축하하는 수연 잔치도 해드렸다. 정대수는 효심이 이순신 못지않게 깊은 인물로 후일 장군의 칭호를 얻기도 했다.

이순신은 며칠간 아산에 머물며 친지들과 어울려 회포도 풀고 위로도 받았다. 다시 남쪽으로 떠날 채비를 하던 4월 11일 새벽에 불길한 꿈을 꾸자 불현듯 병드신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났다. 그래서 종을 불러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오라고 했다.

마침 어머니 변씨는 아들의 소식에 놀라 쇠약한 몸을 이끌고 순천에서 아산의 본가로 올라오던 길이었다. 그런데 충남 서산의 안흥에서 아산으로 이르는 구간의 배 안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이순신이 출옥한 지 10여일 만에, 그것도 불길한 꿈을 꿨던 바로 그날에 모친은 83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이순신은 모친 일행이 보낸 서신을 4월 12일에 받았는데 "숨이 곧 끊어질 듯하셔도 9일에 위·아래 모든 사람과 함께 무사히 안흥에 도착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4월 13일 아침 일찍 식사를 하고 어머니를 마중하기 위해 바닷가로 향했다. 기다리던 배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없어 혹시나 하고 외가 쪽의 변흥백의 집으로 갔는데, 여기서 그는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이순신은 마당으로 뛰쳐나가 가슴을 치면서 발을 굴렸다. 아픔과 슬픔을 이루 다 표현할 길이 없었다. 부친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는데, 이번엔 모친의 임종도 못 지켰으니 천하의 불효막심한 자식이 된 셈이었다. 당신을 만나러 오시다가 끝내 돌아가셨다고 하니, 그 원인이 된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한탄스러웠을까.

이순신의 지극한 효심은 지금도 잘 알려져 있다. 「난중일기」를 보면 정유재란 시기를 빼놓고는 해마다 새해 첫날의 기록은 '어머니'로 시작한다. 때로는 간절한 그리움을 드러냈고, 때로는 함께한 즐거움을 나타냈다. 어머니를 그리는 심정을 기록한 횟수는 100여차례에 이른다.

이순신의 이 같은 심정은 궂은비 속에 빈소를 차린 4월 16일의 일기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집에 와서 빈소를 차렸다. 비는 크게 퍼부었다. 나는 기운이 다 빠져버렸다. 또 남쪽으로 갈 날은 다가오고 있으니 소리를 내어서 울부짖었다. 다만 어서 빨리 죽었으면 할 따름이다."

이순신의 백의종군에 따라 붙은 금오랑(의금부 도사·금부도사의 별칭) 서리인 이수영이 다음날인 17일부터 길을 떠나기를 재촉했다. 아직은 죄인의 처지인데 어찌하겠는가. 이순신은 모친의 영전 앞에서 울며 하직 인사를 하고 조상의 사당에도 들렀다.

이후 간소한 장례 절차를 마치고 17일 다시 길을 떠나 당일에 충남 연기군 보산원에 도착했다. 이어 천안, 공주 정천동과 이산, 논산의 은원, 삼례, 임실을 거쳐 24일 남원에 이르렀다. 여러 지역을 거치는 동안 임실현감 등 일부 지방 관리들은 이순신에게 예를 갖춰 비교적 호의적으로 대해줬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이순신은 백의종군했지만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남원부를 15리 정도 앞두고 있을 때 이순신은 정철 일행을 만났다. 정철 일행은 이때부터 10리길을 이순신과 동행하다 헤어졌다. 그 후 이순신은 10리 밖으로 이리저리 헤매다가 결국 이희경의 종이 거주하는 집에서 묵었다. "어찌하겠는가, 어찌하겠는가." 서럽고 슬픈 처지를 한탄하면서도 스스로를 다독였다.

다음날, 남원군 운봉면의 박롱의 집에서 신세를 졌는데, 마침 도원수가 순천으로 이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구례를 거쳐 4월 27일 점심때쯤 순천지역 송원에 도착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Copyright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