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자친구들에게 [서울 말고]

한겨레 2024. 4. 7.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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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이고운 | 부산 엠비시 피디

요즘 내 유튜브에는 오스트레일리아(호주)에 사는 단짝 친구들의 영상이 자주 뜬다. 한 친구는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바다 수영을 하고, 그의 단짝은 졸린 눈으로 친구를 구경한다. 한 명은 금발 머리의 호주인, 단짝은 한국인이다. 생김새가 확연히 다른 둘은 서로의 말투를 따라 하고,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고, 길거리에서 웃긴 춤을 춘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내 친구들을 떠올린다.

내성적인 어린이였던 나는 새 학년이 시작되는 날이면 낯선 애들 틈에 있는 게 괴로워서 전날 밤마다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다음 날이면 꼭 먼저 말을 걸어주는 용기 있는 여자애들을 만났다. 그 애들은 ‘너 한자로 네 이름 쓸 줄 알아?(내 이름은 순 한글이므로 나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묻거나 먹으면 혓바닥이 파래지는 페인트 사탕을 나눠주거나 대뜸 귀여운 스티커를 붙여주며 불쑥 손을 내밀었다. 뜻밖의 친절에 놀란 틈을 타 그 애들은 자연스레 나를 그들의 세계로 이끌었다. 어떤 친구는 내게 순정만화의 재미를, 어떤 친구는 어른스런 음악 취향을 알려줬다. 생김새도, 성격도, 나이도 다른 그 애들의 세계는 저마다 빛이 났고, 나는 매번 그 세계의 어떤 부분을 닮고 싶었다.

소설가 최은영은 소설 ‘쇼코의 미소’에서 이렇게 썼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 애가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다.’ 내성적이고 소심했던 나는 우정을 길게 이어가지 못했다. 다음 해에 같은 반이 되지 못하면 작년의 단짝과 금세 데면데면해졌다. 용기 있고 다정한 나의 친구들은 언제나 새로운 친구를 잘 사귀었고, 새로운 친구의 손을 잡고 가는 그 애들을 마주할 때면 그 애가 더는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워졌다. 그 애에게서 배운 무언가를 고스란히 나의 세계에 품고서도.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로 떠난 스무 살에도 나는 여전히 내성적이었는데, 눈 뜨고 코 베인다는 서울에서도 어김없이 멋진 여자애들을 만났다. 그 애들은 나에게 흐릿하고 희뿌연 생각을 명징한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을, 독특하고 아름다운 취향을, 아끼는 사람에게 진심을 기울이는 법을 알려줬다. 우리는 막걸리를 나눠 마시면서, 서로만 아는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자꾸만 움츠러드는 상대를 일으켜 세우면서 함께 자랐다. 계절과 함께 어떤 인연은 자연스레 사라졌지만, 서로의 세계를 내어주며 우리가 어떤 시절을 함께 지나왔다는 것만은 분명해서 하나도 허무하지 않았다. 그 애들이 있어서 나는 작아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무사히 서른이 됐다.

고향으로 돌아온 지 한참, 이제 지난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들은 모두 먼 서울에 있다.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아주 가끔, 보통은 전화를 걸어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뜬금없는 메시지를 보낸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아주 느슨한 방식으로 이어져 있는 것만 같다. 어느새 닮아버린 서로의 습관과 취향과 마음을 여전히 간직한 채.

어린 시절과 달리, 이제 더 이상 나는 내가 그 애들을 좋아하는 만큼 그 애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만 수화기 너머에서 내가 모르는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을 그 애들이 그저 자랑스럽다. 자랑스러운 그 애들의 하루가 안녕하길 바란다. 아마 재밌는 나의 친구들은 ‘말만 하지 말고 연락 좀 하지?’ 하며 웃겠지만.

느슨한 우정에 기대어, 우리는 각기 다른 고민과 서로 닮은 불안을 안고 각자의 세계를 넓히는 중이다. 여전히 어떤 시절에 서로에게 나눠준 조각을 고스란히 안은 채로. 그런 생각을 하면 멀리에 있는, 어쩌면 한참 못 볼지도 모르는 나의 다정한 여자 친구들과 여전히 함께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그건 얼마나 큰 힘이 되는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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