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가 봤나?”...대기업 창업주로 첫 뮤지컬 나오는 이 남자 [방영덕의 디테일]

방영덕 매경닷컴 기자(byd@mk.co.kr) 2024. 4. 7.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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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창업주인 신격호 명예회장. [사진 = 롯데지주]
2020년 1월 19일 일요일은 유난히 더 춥게 느껴졌던 하루입니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선 진눈깨비까지 내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기자가 이 날을 상세히 기억하는 이유는 주말 근무날이 아님에도 일을 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맡았던 취재 분야가 유통이었는데 롯데 창업주인 신격호 명예회장이 별세한 날이어섭니다.

풍선껌으로 시작해 대한민국 재계 5위 기업을 일군 그는 99세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롯데그룹의 후계를 놓고 일본에서 ‘왕자의 난’을 벌인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가운데)이 2015년 7월 29일 오후 김포공항 국제선 입국장을 통해 들어선 후 차에 오르고 있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소식을 처음 접한 당일 날씨마저 더 우중충하다고 느꼈던 것은 그의 말년에 쓸쓸하고 씁쓸했던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롯데그룹의 경영권 승계를 둘러싸고 일어난 ‘형제의 난’ 이 가장 큰 일이었습니다.

창업주의 차남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장남인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 간 벌어진 경영권 다툼은 그야말로 진흙탕 싸움이었죠.

주총 대결을 앞두고 두 형제 사이에선 진실게임이 벌어졌습니다. 급기야 신 명예회장의 건강상태를 두고 경영권 승계에 유리하게끔 아전인수격 주장이 난무했습니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장녀인 롯데복지재단 신영자 이사장(맨 왼쪽)이 2015년 7월 28일 오후 휠체어에 탄 신 총괄회장과 함께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때문에 일본에서 김포공항을 통해 휠체어를 탄 채 귀국한 신 명예회장을 두고 취재진의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했냐, 목소리는 어땠냐 등 그의 심신상태에 비상한 관심이 모이기도 했습니다. 씁쓸했습니다.

벌써 4년전 일입니다. 그 때 일이 불현듯 떠오른 이유는 최근 신 명예회장의 일대기를 모티브로 삼은 뮤지컬이 공연된다는 소식을 접해섭니다.

재계에 따르면 신 명예회장의 삶을 모티브로 한 뮤지컬 ‘더 리더(The Reader·부제 책읽는 경영인)’가 내달 3~5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초연될 예정입니다.

현재 주요 기업 대부분이 3세 경영 또는 4세 경영 체제로 전환한 것과 달리 롯데그룹은 아직 2세 경영이 한창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창업주를 기리는 행사가 롯데 안팎에선 종종 있는 편입니다.

1995년 금탑산업훈장을 수여받은 롯데 신격호 명예회장 모습. [사진출처 = 롯데지주]
롯데재단에서 기획한 이번 뮤지컬도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척박한 환경에서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롯데를 키운 신 명예회장의 삶을 재조명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고 합니다.

한국 재계의 거목을 직접 모티브로 삼은 뮤지컬은 처음인 만큼 현재 젊은 세대에게 꿈과 용기를 전하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1921년 10월 4일 경남 울산 삼남면 둔기리에서 5남5녀 중 맏이로 태어난 신 명예회장은 일제강점기임에도 배움에 대한 열망이 매우 컸습니다.

1942년 부관 연락선을 타고 도일한 이유입니다. 당시 그는 신문과 우유배달 등으로 고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남다른 부지런함으로 외지에서도 문학도의 꿈을 불태우던 청년이었고요. ‘조선인’이라는 불리한 여건을 성실과 신용으로 극복했습니다.

1980년대 초 롯데제과 양산공장을 방문한 모습. [사진출처 = 롯데지주]
신 명예회장이 얼마나 신용을 중시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일본에 건너가 우유배달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떤 경우에도 우유 배달시간이 워낙 정확해 유명했다고 합니다.

이같은 소문이 나면서 주문이 늘자 배달시간을 못 맞추게 된 신 명예회장은 자기가 직접 아르바이트를 고용했다고 합니다. 배달 시간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 아르바이트가 아르바이트를 고용한 겁니다.

신용과 성실성, 또 뛰어난 안목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도전해 지금의 롯데 신화를 만들어 낸 것인데요.

어려운 환경에서 일본 와세다 대학까지 고학했던 청년 신격호는 첫 사업 당시 폭격으로 공장이 전소되는 시련을 겪습니다. 하지만 허물어진 군수공장에서 비누를 만들어내면서 진정한 사업가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1989년 롯데월드 개관식 모습. [사진출처 = 롯데지주]
전후 생필품이 부족했던 1946년에는 화학전공을 살려 포마드 크림 등 화장품을 만드는 공장을 세워 성공을 거둡니다. 이후 1948년 롯데를 세우고, 껌을 개발하며 큰 돈을 벌게 됩니다.

롯데란 사명은 신 명예회장이 직접 지은 것입니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샤롯데’에 감명을 받아 탄생한 이름이 바로 롯데죠.

신 명예회장은 생활비가 부족해 책을 살 형편이 안 됐을 때도 서점에서 몇 시간씩 서서 책을 읽을 정도로 독서광이었습니다.

1983년 세워진 롯데장학재단은 독서광에 한 때 문학가를 꿈꿨던 신 명예회장의 꿈을 기리며 올해 ‘샤롯데 문학상’을 신설하기도 했습니다.

하늘에서 바라본 롯데월드타워. [사진출처 = 롯데지주]
일본에서 사업을 일으킨 신 명예회장의 꿈은 다름 아닌 조국 대한민국에 기업을 설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대한 투자의 길이 열리자마자 기업보국이라는 기치 아래 그가 한 일은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한 일입니다. 당시 폐허가 된 조국 어린이들에게 풍요로운 꿈을 심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롯데제과에 이어 롯데그룹은 1970년대에 롯데칠성음료와 롯데삼강으로 국내 최대 식품기업으로 발전했습니다.

또 롯데호텔과 롯데쇼핑을 설립해 당시에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 유통·관광 산업의 현대화 토대를 구축했고요.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과 롯데건설 등을 통해서는 국가 기간산업에도 본격 진출했습니다.

2020년 1월 신격호 명예회장 영결식을 마친 뒤 운구차가 장지로 가기 전 롯데월드타워를 도는 모습. [사진출처 = 롯데지주]
4년전 일 중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것 중 하나는 신 명예회장의 발인식입니다.

가족과 친지, 그룹 임원 등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진 발인식 날 운구 차량은 잠실에 위치한 123층짜리 롯데월드타워를 한바퀴 돌고 울산으로 떠났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지어진 건물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더 인상 깊었던 장면입니다.

“몇 년이 지나면 투자금을 회수할 것이라 보십니까?”

롯데월드타워 건설 과정에서 신 명예회장은 이런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기업의 목적이 이윤 창출이라는 점에선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

하지만 신 명예회장은 위 질문에 “회수 불가!” 라고 답했습니다. 롯데월드타워를 지으면서 사업성은 별로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011년 롯데월드타워 부지를 살펴보고 있는 신격호 명예회장. [사진출처 = 롯데지주]
그저 세계 최고층을 만들어 한국의 랜드마크로 우뚝 세우겠다는 고인의 집념이 가장 컸습니다.

롯데월드타워 건설이 한창 마무리에 들어갈 즈음 신 명예회장의 건강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외부 활동도 쉽지 않았죠.

그러나 필생의 숙원인 롯데월드타워 완공을 내 손으로 이루고 말겠다는 집념은 그를 병상에서도 가만 누워 있지 못하게 했고 한 달에 두세 차례 대면 보고를 받고 공사 현장을 찾게 했습니다.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 조성된 고(故)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의 묘에 새긴 글귀. [사진출처 = 울산대]
울산 울주군 선영에 영면해 있는 신 명예회장의 무덤 와석에는 아래와 같은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여기

울주 청년의 꿈

대한해협의 거인

신격호

울림이 남아 있다

거기 가봤나?

신 명예회장의 삶을 문학적으로 재해석한 뮤지컬은 낭독콘서트 형식으로 이뤄진다고 합니다. 12명의 배우와 오케스트라가 하나의 책을 읽듯 스토리를 전개하는 것이죠.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는 뜻)입니다만, 롯데 창업주 신격호의 기업가 정신 가득한 울림을 다시 듣고 느낄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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