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층 아파트 외벽 페인트칠하며 PBA우승 꿈꾼다” 세상에서 가장 아찔한 당구선수 박기호

황국성 MK빌리어드 기자(ceo@mkbn.co.kr) 2024. 4. 7. 12:0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무명’에서 올시즌 4강 2회, 왕중왕전 8강까지
동호인 활동하다 21/22시즌 3부투어 도전
본업은 고층 건물 외벽 페인트 도장
“대회땐 2~3일 쉬고 연습해서 출전”
현재는 25층짜리 평택 아파트 현장서 일해
PBA 1부투어 선수인 박기호는 올시즌 PBA투어에서 4강에 2번, 왕중왕전(SK렌터카월드챔피언십) 8강에 오르면 뛰어난 성적을 냈다. 아울러 40~50층짜리 아파트 외벽 도장이 본업인 ‘세상에서 가장 아찔한 당구선수’다. (사진=MK빌리어드뉴스 DB)
로프 하나에 의지한채 지상 100m 아파트 외벽에서 페인트칠하며 우승을 꿈꾸는 당구선수. 아마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찔한 당구선수일 것이다.

당구 선수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도 당구만으로는 생활이 안됐다. 당구 선수 박기호(50). 그는 프로당구 선수라면 누구나 원하는 PBA 1부투어 선수다. 그에게는 당구선수 외에 별도 직업이 있다. 40~50층짜리 고층건물 외벽 페인트칠하는 도장이 본업이다.

현재 일하고 있는 경기도 평택 아파트 신축현장에서 외벽 페인트 작업 중인 박기호 선수. 저 위치가 25층이란다. (사진=박기호)
박기호는 이번 시즌(23/24) PBA 1부투어에서 성적이 가장 많이 오른 선수다. 지난시즌(22/23) 1부투어에서 뛰며 상금랭킹 94위(350만원)로 바닥권이었다. 하지만 올 시즌(23/24)에는 상금랭킹 17위(3150만원)로 도약했다. 만약 ‘PBA 골든큐’시상에 기량발전상이 있다면 이번 시즌 주인공은 박기호였을 것이다.
올시즌 팔라존 사이그너 상대 큰 경험
4차전 4강 모리에 역전패 “가장 아쉬운 경기”
“4강 했으니 이젠 더 높이 바라보겠다”
“네, 오늘은 오후에 비가 온다고 해서 오전만 일하고 숙소에서 쉬고 있습니다.”

4일 전화 연결이 됐을 때 그는 경기도 평택 아파트 건설현장 숙소에 있었다. 불쑥 걸려온 전화에 박기호는 처음에는 다소 의아해했다. “JMB 구재모 대표께서 칭찬을 많이 하던데요.” 인터뷰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에게 이번 시즌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시즌이다. 원래 그는 실력파 동호인이었다. 그러다 21/22시즌 챌린지투어(3부)를 거쳐 1부투어 선수가 됐다. 하지만 존재감은 없었다. 이번 시즌 4강에 두번 오르며 차츰 두각을 보였지만, ‘3부투어 출신’이라는 게 그에 관한 정보의 전부였다. 약 30분 가량 얘기를 나누면서 뜻밖에도 그의 범상치않은 ‘투잡’을 알게됐다. “정말 힘들게 당구선수 생활하는구나.”

한달에 20일 가량 현장 일하는 박기호는 대회때는 2~3일 전에 쉬고 연습해서 대회에 출전한다고 했다. (사진=박기호)
박기호는 올해 50세로 적은 나이가 아니다. 17세에 당구를 시작했으니 벌써 33년째다. “당구를 좋아해서 동호인대회에 나가는게 낙이었습니다. 국토정중앙배 등 전국대회에서도 몇 차례 입상했습니다.”

‘코로나19’가 터지면서 낙이 없어졌다. “실력 좋은데 도전 한번 해보지” 주변의 권유로 21/22시즌 챌린지투어에 도전했다. ”코로나로 동호인대회가 중단됐는데, PBA는 대회를 하더라고요.“ 이번 기회에 한번 해보자고 했다. 그때만해도 설마 1부투어에 갈 수 있을까.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챌린지투어 4차전서 덜컥 우승, 다음 시즌 1부투어로 직행했다. 1부투어 첫 시즌엔 프로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한 시즌 내내 받은 상금은 고작 350만원, 97위. 그러다 올 시즌에 4강에 두 번 들며, 상위권으로 점프했다. “이번 시즌 실력이 갑자기 좋아진건 아니고 운이 많이 따랐습니다. 강호를 만났을 때 마음을 비웠는데, 그게 좋은 성적으로 이어졌지요.” 그의 무심(無心) 타법에 사이그너, 팔라존, 이상대가 희생양이 됐다.

3부투어 출신으로 1부투어까지 올라온 박기호는 4강 두 번 했으니, 앞으로 더 높은 곳을 바라보겠다고 했다. 첫 번째는 결승진출이다. 평택 현장의 박기호. (사진=박기호)
지금은 다음 시즌을 위해 한창 연습에 몰두할 때. 그에게 전화 걸면서 혹시 연습에 방해되지 않을까 걱정됐다. “오전 일 마치고 오후에 비 온다고 해서 지금 숙소에 있습니다. 편하게 통화해도 됩니다.”

대답이 뜻 밖이었다. 무슨 일을 하길래 비 와서 쉰다는거지? “건설현장에서 고층건물 페인트 칠하는 도장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40~50층짜리 경기도 동탄 유보라아파트 외벽 페인트도 칠했습니다.” 가끔 TV에서나 봤던 무시무시한 일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경기도 평택 유보라아파트 현장에서 일하는데, 25층짜리라고 했다.

당구선수들이 투잡, 쓰리잡 뛰는건 흔한 일이다. 하지만 고층 건물 외벽 페인트칠하는 당구선수는 처음이다. 더욱이 그는 PBA 1부투어 선수다. 연습에 올인해도 부족할 판인데.

“현장 때문에 수도권과 지방을 왔다갔다합니다. 요즘에는 지방에 많이 갑니다.” 그렇다면 연습은 도대체 언제? 너무나 쉽게 얘기했다. 일 마치고 틈틈이 동네당구장 가서 한두 시간 정도 연습한다는 것. 따라서 숙소에 항상 큐를 둔단다.

“건설현장 일은 춥거나 더우면 쉬고, 비와도 쉽니다. 지난해에는 12월까지 공사가 있었고, 이후 추워서 중단됐습니다. 따라서 12월부터 2월 중순까지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박기호는 이번 시즌 8차례 PBA 1부투어에 참가했고, 제주에서 열린 왕중왕전(SK렌터카월드챔피언십)에도 나갔다. 하지만 항상 연습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겨울과 여름 빼고 한달에 20일 정도는 현장에 있었다.

“대회 나가기 전 2~3일 쉬고 그때 연습해서 출전합니다. 대회에서 일찍 떨어지면 바로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연습시간이 적으니 연습할 때 최대한 집중합니다.”

고향은 강원도 동해. 일 때문에 현재 사는 곳은 경기도 안산이다. 요즘은 조금씩 체력 부족을 느낀다고. “적은 나이가 아니고 일때문에 당구에 전념하지 못하니 실력이 주는게 느껴집니다. 체력이 부족하니 집중력도 떨어지고, 전성기 나이가 아니니 어쩔 수 없지요. 그저 열심히 할 뿐입니다.”

그는 한번도 당구를 배워본 적 없다. 하지만 이번 시즌 4강에 두번 오르며 욕심이 생겼다.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로 했다. 그래서 1주일에 한번씩 안양에 가서 레슨을 받고 있다.

이번 시즌 그의 성적은 괄목할 만하다. 왕중왕전(SK렌터카배월드챔피언십)에 출전, 8강까지 올랐다. 시즌을 시작할 때 스스로 왕중왕전 출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방송경기만 해도 떨렸다. 그러나 자꾸 하다보니 긴장감이 생겼고, 오히려 그게 집중력에 도움이 됐다. “왕중왕전은 매경기 마지막 경기라 생각하고 임했습니다. 16강전부터는 오늘 지면 올라가서 일하자 생각하고 비행기 표를 미리 끊어놓고 출전했지요.”

첫 출전한 왕중왕전 성적은 8강. 접전 끝에 사이그너에게 아깝게 졌다. (세트스코어 2:2에서 맞은 5세트에 6:3으로 앞서다 2이닝째 사이그너에게 끝내기 12점을 맞고 역전패했다)

“8차전(웰컴저축은행배) 32강전에서 사이그너를 한번 이긴게 화근이었습니다. 욕심이 생기더라구요. 8차전때는 대선수라 마음 비우고 쳐서 애버도 잘나오고 경기가 잘 풀렸습니다.” 왕중왕전때도 마음 비우려고 했는데 안됐다. 대회가 대회인 만큼 힘이 들어갔다. “마지막 세트 끝내기 12점 맞고 졌습니다. 역시 대선수대요.”

수도권과 지방을 돌아다니며 일하는 박기호는 일 마치고 1~2시간씩 연습하며 감각을 익힌다. (사진=박기호)
올시즌 뛰어난 성적을 거뒀지만, 그래도 아쉬운 대회가 있다. 4차전(에스와이배)때다. 상대는 일본의 모리. 아예 넘볼 수 없는 선수가 아니어서 더욱 아쉬웠다. (세트스코어 3:1로 앞서다3:4로 역전패했다. 5세트 14:14에서 대회전 친게 빠졌다) “이기면 결승인데 무척 아쉬웠죠. 조금만 더 차분하게 쳤으면 되는데…. 다음 배치도 디펜스가 됐는데 모리가 그걸 풀더라고요.” 그때부터 흐름을 내줬다.

올시즌 수확 중 하나가 강호들과 많은 시합을 하며 많은걸 배웠다는 점이다. “팔라존은 공격력이 강한 선수이고 완벽에 가깝게 쳤습니다. 경기하면서도 배울 점이 많았죠.” 공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했고 연습을 많이 한게 보였다. 공은 저렇게 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그너는 전설 중의 전설. “경기하면서 감탄만 했습니다. 이겼을 때는 마음을 비워 편안하게 쳤기에 가능했습니다. 다 들어가니까. 재밌게 쳤지요”

이상대 선수와는 유독 많이 만났다. 4차전, 8차전, 왕중왕전 세 번 경기했는데 모두 이겼다. “잘치는 선수인데 공교롭게 세 번 모두 16강서 만났습니다. 왕중왕전 16강서는 마지막에 긴장했는지 기회를 주더군요.” 왕중왕전때 제주 연습구장에서도 만났다. 이상대가 “항상 위로 가는 길목에서 형님 만나네요”라고 하더란다.

후원사인 JMB 구재모 대표와는 동호인 활동할 때부터 오랜 인연을 이어온 사이다. “잊지않고 후원해주셔서 고맙지요.” 때문에 쓰고 있는 큐도 JMB다. 올시즌에는 루퍼스 큐를 썼고, 다음 시즌을 앞두고 드라코 큐로 감각을 익히고 있다. 일 때문에 지방에 가지 않으면 안산 월피동 와이당구클럽에서 주로 연습한다.

자신감이 생기면서 다음 시즌에는 좀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일도 열심히 하고 틈틈이 연습도 해서 목표를 좀더 높게 잡으려고 합니다. 4강에 두번 갔으니, 이젠 결승무대에 서고 싶습니다. 그래야 우승도 바라볼 수 있잖아요.” [황국성 MK빌리어드뉴스 기자]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