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막내 제수씨랑은 내가 잘거야”...희대의 막장 빌런인데 찬양하는 책까지 있었다고?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4. 4. 7.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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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63] 암살, 근친상간, 뇌물, 섹스파티, 전쟁. 세상의 모든 부도덕이 이 집안의 동력이었습니다. 뇌물과 섹스로 동료를 만들고, 넘어오지 않는 적은 가차 없이 암살했지요. 성적으로도 어찌나 방종하던지. 두 형이 막내아우의 부인을 두고 잇달아 성관계를 갖기도 했었습니다. 오빠가 친여동생과 육체적 관계라는 소문도 왕왕 들려왔지요.

신이 ‘멸문지화’의 벌을 내리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 가문은 승승장구, 그야말로 최고권력까지 손에 넣습니다. ‘신의 대리인’으로 불리는 교황에 올랐으니까요. 성(聖)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인물이 성좌에 오른 셈. 중세 이탈리아를 뒤흔든 ‘보르지아’ 가문의 이야기입니다.

보르지아 가문의 체사레와 루크레치아는 친남매지간이지만 동시에 육체적 관계라는 악소문이 돌았다. 이를 묘사하고 있는 미드 ‘보르지아’. [사진출처=IMDB]
보르지아 가문은 오늘날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이름입니다. 필독 고전으로 통하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보르지아 가문의 한 사내를 배경으로 쓴 책이기 때문입니다. 체사레 보르지아가 그 주인공. 아버지이자 교황인 알렉산데르 6세의 권력을 위해 체사레는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성관계가 금지된 교황, 그리고 그의 아들. 여기서부터 부패의 냄새가 풍겨옵니다. 철학자 마키아벨리는 그럼에도 이 가문에서 권력의 본질적 속성을 꿰뚫습니다. 사유가 켜켜이 쌓여 ‘군주론’이라는 명저가 탄생했지요. 보르지아 가문의 극단적 정치가 불러온 파문을 사색합니다. 바야흐로 정치가 모든 뉴스를 뒤덮은 시기여서입니다.

보르지아 가문의 문장.
카이사르를 꿈꾼 성직자 집안 ‘보르지아’
“Aut Caesar, aut nihil“(카이사르이거나, 아무것도 아니거나)

보르지아 패밀리는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유력 가문 중 하나였습니다. 이탈리아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황을 배출했을 정도의 유력 집안이었지요. 그들의 야망은 가훈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고대 로마의 지도자로서 유럽과 북아프리카·아시아 일부를 지배한 ‘카이사르’(시저)가 되는 것. 무엇이든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그들의 집념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보르지아 집안의 대표적 위인인 알렉산데르6세. 추기경 시절의 모습.
권력은 성인군자에게는 다가오지 않는 법입니다. 단단한 자기 조직만이 권력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지요. 신의 말씀을 전하는 종교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특히 보르지아 패밀리가 뜻을 펼치던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중세 교황자리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정치적 파벌 싸움의 최대 격전지였지요. 스페인 지방 귀족에 불과한 보르지아 가문에게 뇌물은 필수 도구였습니다.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를 묘사한 그림.
교황의 자리를 돈과 섹스로 사다
보르지아 집안의 가장이자 성직자인 알렉산데르 6세. 그는 투표권을 가진 추기경을 하나씩 포섭해 나갔습니다. 돈과 섹스를 활용했지요. 인간의 잠재된 욕망을 건드리는 방식이었습니다. 보르지아 집안에서 손님들의 교성이 울릴 때마다, 우호표는 시나브로 늘어났지요.
알렉산데르6세는 젊은 시절부터 교황이 된 이후까지 색을 끊임없이 탐한 인물이었다. 사진은 미드 ‘보르지아’의 한 장면. 알렉산데르6세는 미중년 배우 제레미 아이언스가 연기했다. [사진출처=IMDB]
섹스를 통한 포섭의 힘은 강력했습니다. 알렉산데르6세는 결국 교황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1492년 8월이었습니다. 추기경 시절부터 여러 애인과 혼외자를 뒀을 정도로 부패한 종교인이었지만, 당시 교황청 고위인사들은 이를 개의치 않았습니다.

중요한 건 딱 한 가지였지요. 자신에게 득이 되는 인물인지 여부. 신의 말씀을 가장 잘 이해한 이들은 변방으로 물러나야만 했던 시기입니다.

“최고의 자리를 위해서라면, 댓가는 필요한 법” ‘교황’이 된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이 된 후에도 ‘섹스를 활용한 포섭’은 계속됩니다. 50여명 전라의 여성이 추기경들에게 성적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알렉산데르6세가 자리한 교황의 공간에서였습니다.

알렉산데르와 그의 아들 체사레는 황홀경에 빠진 추기경들을 미소 지으며 바라봅니다. 그 이름도 유명한 ‘밤의 연회’(Banquet of Chestnuts)였습니다. 교황이 섹스 연회장을 밤나무로 장식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아들아, 여자들은 준비됐니?” 미드 보르지아에서 알렉산데르6세를 연기한 제레미 아이언스. [사진출처=IMDB]
사생아를 앞세워 권력을 탐한 교황
“내 아들을 교황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겠네”

알렉산데르 6세가 포섭한 이들을 굳게 신뢰한 건 아니었습니다. 돈과 권력이 떨어지면 언제든 자신을 버릴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믿은 유일한 인물들은 자녀들. 큰아들 지오반니, 차남 체사레, 셋째 딸 루크레치아, 막내아들 조프레였습니다.

알렉산데르 6세의 큰아들 지오반니. 그는 당초 알렉산데르6세의 군사담당이었다.
그중 가장 믿을만한 인물은 장남 지오반니와 차남 체사레였습니다. 알렉산데르는 큰아들 지오반니에게 교황군의 총사령관을, 둘째 체사레에겐 발렌시아 대주교를 맡겼습니다. 권력과 군사력, 두 축을 아들들에게 전담시킨 셈이지요.

그러나 체사레의 마음속에는 불만의 불꽃이 일었습니다. 카이사르에서 딴 그의 이름처럼 타고난 전사의 심장을 가진 그에게 ‘교회’라는 공간이 좁디좁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체사레는 애초부터 형 지오반니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지요.

“형의 자리는 원래 내 것이었어야 해.” 어린 시절의 체사레 보르지아.
둘은 한 여자를 두고 라이벌 관계였습니다. ‘아라곤의 산시아’라고 불린 여인이었지요. 그녀는 막냇동생 조프레의 부인이기도 했습니다. 제수씨를 큰형과 작은형이 애인으로 삼은 막장 중 막장. 교황의 가족에게서 일어난 일이었지요.
“남편보다 왠지 아주버님 둘이 더 멋진데.” 아라곤의 산시아.
권력을 쥔 체사레...아버지 알렉산데르6세의 심복으로
지오반니가 로마 테베레강에서 발견됩니다. 그는 숨을 쉬지 않았습니다. 목부터 다리까지 상처가 가득합니다. 누군가에게 암살당한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잠든 야밤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범인은 찾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막연히 추정할 뿐이었습니다. 지오반니의 죽음으로부터 이득을 볼 단 한 사람. 동생 체사레였습니다.

“체사레, 프랑스를 도와 밀라노를 공격하라.”

교황군의 총사령관의 자리는 이제 체사레가 차지합니다. 교황 알렉산데르는 체사레를 앞세워 도시국가로 갈린 이탈리아를 교황의 영토로 만들려는 야망을 키워갑니다. 특히 교황청과 반목한 북부 이탈리아가 대상이었습니다.

로마를 떠나는 체사레를 묘사한 후대 19세기의 그림.
체사레는 전략적으로 원숙한 군인이었습니다. 북부 지방인 이몰라와 포를리에서 승전보를 곧 올렸지요. 난적인 밀라노 공작 스포르차 가문과의 전투에선 정면 승부보다 ‘이이제이’ 전략을 사용합니다. 이탈리아에서 영향력을 키우고 싶어하던 프랑스 루이 12세의 ‘침략’에 힘을 빌려준 것입니다.
“체사레, 나와 함께하면 보르지아에도 도움이 될 걸세.” 프랑스 왕 루이12세는 이탈리아 영토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다.
프랑스의 힘을 빌려 스포르차 가문을 몰락시킨 뒤 후에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전략이었습니다. 산마리노 공화국까지 점령하면서 보르지아 가문의 위상은 더욱 높아져만 갔습니다.
美를 정략적으로 활용한 보르지아
“아름다움은 곧 신의 뜻을 대변하네.”

탄탄한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알렉산데르는 수많은 예술가를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라파엘로 , 미켈란젤로 , 핀투리키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보르지아 가문 밑에서 일했었지요. 정치철학자인 마키아벨리도 지근거리에서 체사레를 지켜보며 현실 정치의 냉엄함과 통찰을 키웠습니다.

‘보르지아 아파트’에 묘사된 프레스코. 핀투리키오의 작품. 보르지아 패밀리는 또한 예술의 후원자기도 했다.
보르지아 가문은 그저 전쟁에만 강한 집안이 아니었습니다. 결혼이라는 행위를 통해 유력 가문의 영토도 취하는 ‘영악함’도 가지고 있었지요. 보르지아 가문에는 이를 훌륭히 수행할 ‘자원’도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절세미인, 보르지아 가문의 여식 루크레치아였습니다.

루크레치아의 첫 결혼은 1493년. 밀라노 공작 스포르차 가문에 시집을 보냈다가 더 좋은 혼례상대가 나타나자 가차 없이 결혼을 파기합니다. 두 번째 결혼은 스페인 아라곤의 알폰소 공작과 함께였습니다. 새신랑 알폰소는 그러나 이내 시체로 발견됩니다.

바르톨로메오 베네토의 ‘여인의 초상’ 모델은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로 추정된다.
보르지아 가문이 아라곤 공작 집안의 적 ‘프랑스’와 손잡기로 결심한 직후였습니다. 범인이 체사레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체사레와 루크레치아가 근친상간한다는 추문도 함께였습니다.

알렉산데르 6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루크레치아의 세 번째 결혼을 준비합니다. 페라라 공작 알폰소 1세와 함께였습니다. 사랑은 없고 정략만 가득한 결혼이었지요. 두 사람은 ‘쇼 윈도’에 불과한 결혼 관계를 이어갑니다.

“우리 집안의 비밀을 알려하지 말게.” 후대 화가 존 콜리어가 보르지아 가문을 묘사한 그림. 체사레 보르지아가 손님에게 와인을 건네는 장면이다. 루크레치아의 표정으로 이 와인에 독이 들어있음을 암시한다.
루크레치아는 남편의 동생인 프란체스코와 금지된 사랑에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추기경·프랑스 군인도 애인으로 삼았습니다. 그녀 역시 ‘보르지아’의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안티 보르지아’의 등장
“보르지아 가문의 전횡을 끝내야 한다.”

너무 날카로운 야망과 추문은 언제나 적을 만들기 마련입니다. 보르지아 가문의 전횡에 학을 떼는 세력들이 점점 뜻을 모았습니다.

교황청에서는 추기경 줄라이노 델라 로베레가 가장 큰 적이었습니다. 강력한 도시국가 피렌체 메디치 가문이나, 수도승 사보나롤라도 보르지아 규탄에 앞장섰지요.

보르지아의 가장 큰 적 ‘델라 로베레’ 추기경.
정치적 위기와 함께 군사 캠페인도 안갯속이었습니다. 남부 지방인 나폴리를 두고 프랑스와 스페인이 전쟁을 벌였지만, 교황청은 전혀 존재감을 보이고 있지 못했지요.

강대국인 두 나라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려다가 이도 저도 아닌 교착 상황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교황의 건강도 나빠져 가고 있었습니다. 1503년 8월 열병에 걸리면서였습니다.

루이 12세가 벌인 제 2차 이탈리아 전쟁 중 세리뇰라를 공격하는 장면. 사진은 화가 토니 체코라로가 1998년 그린 판화.
교황 알렉산데르의 죽음이 불러온 가문의 위기
알렉산데르 6세가 고해신부를 불렀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기 때문입니다. “신이시여, 저의 죄를 사하소서.” 그는 마지막 순간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됩니다. 암살, 뇌물, 섹스라는 수많은 죄를 지었더라도, 마지막 순간에서만큼은 그도 구원받고 싶은 ‘길 잃은 양’에 불과했습니다.
병상에 누운 알렉산데르 6세. 미드 ‘보르지아’의 한 장면. [사진출처=IMDB]
체사레도 몰락의 길로
날고 기는 체사레라도 교황이라는 지지자 없이 홀로서기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알렉산데르 6세의 뒤를 이어 새롭게 교황에 오른 이는 율리우스 2세. 보르지아 가문을 가장 강하게 비판해온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이었습니다.

율리우스의 취임 일성은 이랬습니다. “보르지아 가문은 그 어느 때보다 거룩한 교회를 모독했다. 나는 그들이 썼던 공간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 당신 없이는 난 아무것도 아니군요.” 체사레 보르지아 초상화.
율리우스 2세는 지속해서 체사레의 군사 캠페인을 방해합니다. 체사레는 힘을 잃어갔지요. 과거 알렉산데르 6세의 시절에는 상상할 수 없던 모습이었습니다.

1507년 체사레는 스페인 북부에서 나바르 지역을 공격하다가 패하고 결국 사망합니다. 볼품없는 모습의 나체로 그는 길바닥에 누워있었습니다. 보르지아의 멸문과 다름없었습니다.

보르지아는 ‘부패한 교황청’이라는 오명을 남겼습니다. 뒤를 이은 교황들의 부패도 지속됐지요. 결국 사달이 터져나왔습니다. ‘종교개혁’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이제 구교와 신교로 쪼개지지요.

성모 앞에 무릅꿇은 알렉산데르6세. 자신의 정부인 줄리아 파르네세를 모델로 성모를 그린 작품이다. 화가 피에트로 파케티의 작품.
‘빌런’ 체사레로부터 영감을 받은 마키아벨리
“군주는 잔인하다는 불명예를 개의치 말아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황망하게 죽은 체사레의 흥망성쇠를 돌아봤습니다. 그가 성공했던 비결을 이렇게 결론짓지요. “선량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갖은 수단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정치와 도덕을 분리한 최초의 시도였습니다. 피렌체 공화국의 실질적 지배자 메디치 가문에도 보르지아 가문처럼 교황령을 군주국으로 지배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마키아벨리였지요.

체사레 곁에서 정치 이론을 연구한 니콜로 마키아벨리.
근대에 들어서면 마키아벨리가 독재정치 이론에 악용됩니다. 수많은 스트롱맨(독재자)들이 ‘마키아벨리즘’ 정치로 정권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잔인하고 비열한 수단을 사용해도 된다는 마키아벨리즘은 그러나 점점 도전받고 있는 추세입니다. 정치인의 악행을 옹호하는 것이 현시대에는 매우 이질적이기 때문이겠지요.

‘군주론’은 메디치 가문 로렌초 디 피에로에게 헌정됐다.
잔인한 통치자가 과연 현대 민주주의 시민의 대표일 수 있느냐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정당한 목적만큼이나 그 수단 역시 깨끗해야 한다는 게 시대의 요구입니다.

이제 곧 총선이 시작됩니다. 번거롭더라도, 출마자들의 행적을 꼼꼼히 살펴보시기를. 보르지아 가문처럼 끔찍한 정치인을 솎아낼 유일한 기회가 투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치적 무심함은 또 다른 마키아벨리주의자를 키우는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군주론’의 1550년판 표지. 원제는 ‘IL PRINCIPE’.
<네줄요약>

ㅇ명저 ‘군주론’의 모델은 중세 이탈리아 보르지아 가문의 체사레였다.

ㅇ체사레는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데르6세를 위해 암살·뇌물제공·섹스파티를 마다하지 않은 잔인한 인물이었다.

ㅇ마키아벨리는 체사레의 성공으로 정치와 도덕이 분리된 정치 이론을 전개했다.

ㅇ그러나 그의 군주론은 현대 정치에 점점 도전을 받고 있다. 우리는 더 깨끗한 정치인을 원한다.(투표합시다)

<참고 문헌>

ㅇ세러 브래드퍼드, 체사레 보르자, 사이,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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