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클럽 간 남친, 다른 여자랑 먼저 나가놓고선…“나 지금 출장 가능한데” [씨네프레소]

박창영 기자(hanyeahwest@mk.co.kr) 2024. 4. 7.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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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프레소-117] 영화 ‘러스트 앤 본’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만일 네 눈이 너를 죄 짓게 하거든 빼어 버려라.”

마태복음에는 예수가 이처럼 말했다고 적혔습니다. 그는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고 얘기합니다. 예수는 손과 발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신체를 찍어내 버린다면 며칠 안 가 목숨을 잃고 말 것입니다. 어쩌면 몇 시간이 채 안 걸릴지도 모르죠.

여자는 남자와 배타적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했다. 함께 간 클럽에서 남자가 다른 여자와 ‘원나잇’을 하러 떠나기 전까지 말이다.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성경의 저 구절은 외려 인간이 스스로 얼마나 죄에 취약한 존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큰 아픔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로 읽힙니다. 인간은 쉽게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잘못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서도 어느덧 그 손으로 죄를 범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늘 자기 죄를 상기할 수 있을 정도의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인간은 웬만해선 죄와 멀어지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심각한 상처를 입는 건 반드시 나쁜 일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몸에 남은 흔적을 통해 자기 과오에 따른 대가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죠. ‘러스트 앤 본’(2013)은 몸을 다침으로써 구원받은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남자는 격투기에 능한 것으로 나온다.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짐승처럼 살아가는 남자, 아들을 거칠게 대하다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시죠. 주인공 알리(마티아스 쇼에나에츠)는 본능을 따라 살아가는 남자입니다. 그에겐 5살 난 아들이 있는데 재회한 지는 얼마 안 된 것처럼 보입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리는 아이의 엄마에게서 아들을 데려오게 됐고, 이 때문에 누나 집에 얹혀살게 됩니다.
알리가 아들을 대하는 태도는 다소 거칠지만, 애정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우선순위 설정에 서툴다. 모르는 여자와 시간을 보내다가 아들을 데리러 갈 시간에 늦기도 한다.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알리가 ‘본능을 따라 살아간다’는 건 사실 굉장히 절제한 표현이고, 짐승처럼 살아간다고 묘사하는 편이 더 잘 어울릴 것입니다. 영화 초반부엔 그가 아들 앞에서 도둑질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거기엔 어떤 죄책감도 없습니다. 굶주린 사자가 초식동물을 사냥하며 부끄러워하지 않듯, 그는 생존을 위해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아들 앞에서 굳이 숨기려 들지 않는 이유겠죠.

그는 아들에게 그다지 자상한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는 대놓고 아이를 때리지는 않지만, 종종 거친 손길로 아이에게 감정을 드러냅니다. 한 번은 아이가 아빠 말을 듣지 않고 냄새나는 개집에서 오래 노는 일이 있었는데요. 알리는 아들이 오물 묻은 물건이나 되는 듯 강한 물줄기로 씻겨냅니다. 또 다른 날엔 우는 소리를 듣기 싫다고 아이를 강하게 흔들다가 모서리에 머리를 찧게 하기도 합니다.

그는 몸을 단련하는 데 열심이다.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배려 없는 그, 클럽에서 애인 두고 다른 여자와 나가
동시에 카메라는 이 남자의 단순함이 갖는 다른 측면도 비춥니다. 알리가 클럽 경호원 일을 하던 도중 만난 여성 스테파니(마리옹 꼬띠아르)를 통해서인데요. 알리는 스테파니가 클럽에 찾아온 날 다른 손님과 시비에 걸리자 도움을 줬고, 두 사람은 짧은 시간이지만 서로 호감을 느꼈습니다. 이후 범고래 조련사이던 스테파니는 고래의 돌발행동에 따라 생긴 사고로 다리를 절단하게 됐는데, 극단적 선택을 고민할 정도로 삶의 의지를 상실한 상태에서 어쩐지 알리가 떠올라 연락을 취합니다.
처음 클럽에서 만났을 때, 알리는 스테파니에게 도움을 줬다. 스테파니는 어쩐지 이때의 기억이 떠올라 사고 이후 그에게 연락해보게 된다.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알리가 스테파니를 대하는 태도엔 특징이 있습니다. 사고당한 이를 배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다리를 잃고 상심한 그녀 앞에서 수영도 하고, 본인 하고 싶은 행동을 모두 합니다. 스테파니를 아꼈던 많은 사람이 혹시 그녀 맘을 다치게 하진 않을까 극도로 조심했던 것과 대조되는데요.

어쩐지 그녀는 알리를 점점 편한 사람으로 느끼게 됩니다. 알리 앞에서만큼은 자신이 사고를 당해서 달라졌다는 걸 의식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은 잠자리를 갖게 되고, 스테파니는 사고 이후 오랫동안 쳐다보지 못했던 자기 다리를 어루만지고 응시할 수 있게 되죠. 옛 직장을 찾아가게 되고, 다리 절단의 원인이 됐던 고래와도 다시 인사할 수 있게 됩니다.

알리는 스테파니 앞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행위를 모두 한다. 스테파니는 그와 함께 있으면 자신이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남자의 단순함이 여자가 자기 인생을 긍정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는 여기서 다시 온도 차를 느끼게 되는데요. 여자는 배타적 관계 속에서 남자가 자신을 아꼈다고 믿었으나, 실제로 남자는 여자와 둘만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알리가 길거리 복서로 전향해 큰 승리를 거둔 날, 두 사람은 클럽에 같이 갔고, 알리는 스테파니를 클럽에 남겨둔 채 다른 여자와 ‘하룻밤 잠자리’를 하러 떠나버리죠.

다음 날 스테파니는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고 알리에게 따지는데요. 스테파니에게 알리는 “나 지금 ‘출장’ 가능한데”라는 황당한 답변을 합니다. ‘출장’은 두 사람이 성관계를 에둘러 표현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밀어였는데요. 심각한 질문을 하는데 ‘지금 같이 자지 않겠느냐’는 엉뚱한 대답을 들려준 셈이죠. 그 답변을 듣고 스테파니는 왠지 화가 나기보다는 남자를 이해하게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동물처럼 단순하지만, 거기에 어떤 악의가 있는 건 아니라고요.

스테파니는 범고래를 좋아해서 고래 조련사가 됐다. 그렇지만 자기에게 상처를 준 고래를 다시 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알리와의 만남을 통해 그녀는 비로소 수족관 너머의 고래를 쓰다듬을 수 있게 된다.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손가락뼈가 부러진 뒤에서야, 소중한 것들이 보였다
남자가 자기 삶을 돌아볼 계기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옵니다. 알리는 하나의 부업을 하고 있었는데요. 지역 할인점들에 불법으로 CCTV를 설치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트의 사장들은 이따금 직원을 해고할 근거가 필요했는데, CCTV에 찍힌 그들의 비위가 좋은 사유가 됐던 것이죠.

문제는 마트 노동자였던 알리 누나가 규정 밖 행위를 하던 것이 해당 CCTV에 찍히면서 발생합니다. 알리 누나는 수년 만에 찾아온 동생을, 심지어 아들까지 포함해서 거둬줬는데 동생 때문에 졸지에 실직자가 된 것이죠. 알리 누나의 비위가 대단한 건 아니었습니다. 유통 기한이 지나서 어차피 폐기해야 하는 음식을 집에 챙겨온 정도였죠. 알리는 누나를 그렇게 만들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라고 해명하지만, 누나는 알리에게 집에서 나가라고 요청합니다. 알리는 아들을 두고 가출합니다.

알리는 길거리 싸움에 소질을 보였다. 그러나 길거리 복싱은 다칠 위험이 크다는 점에서 아버지가 직업으로 삼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알리는 마음을 다잡고 제대로 살고 싶은 생각에 길거리 복서가 아닌, 정식 복서로서의 길을 준비하는데요. 집에서 멀리 떨어진 트레이닝 센터에서 훈련받게 됩니다. 그 와중에 매형에게 부탁해 아들을 잠시 트레이닝 센터로 데려오게 하는데요. 꽁꽁 언 호수에서 아들과 썰매를 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도중, 그는 잠시 한눈을 팔고, 그새 아들이 얼음 밑으로 빠지게 됩니다. 아들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주먹으로 얼음장을 깼고, 이 와중에 그의 손가락이 부러지게 되죠.

아들이 입원한 병원에서 알리는 스테파니와 통화합니다. 영화에서 그가 우는 모습이 처음으로 잡힙니다. “세 시간이나 샘이 혼수상태였어. 세 시간 동안 죽었던 거야. 샘을 잃을까봐 너무 두려웠어. 나를 버리지 마. 사랑해.”

아들을 구하는 과정에서 그는 손가락뼈를 다쳤다.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절대 완치되지 않는 아픔을 통해, 구원받은 남자
알리는 태어나서 한 번도 치명상을 입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 입는 상처에도 무감각했습니다. 본능대로 살아가다가 모르는 사람은 물론 소중한 이들까지 아프게 했습니다.

본인이 남을 힘들게 하는 존재라는 것을 두 가지 충격적 사건으로 알게 됐습니다. 하나는 누나에게 버림받은 것입니다. 자신을 조건 없이 받아줬던 누나가 집밖으로 내치는 사건을 통해 그는 누나가 받은 상처를 짐작하게 됐습니다. ‘의도가 없었다’는 게 모든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됐습니다.

여기에 더해 아들이 죽을 뻔한 사건까지 발생하며 그는 뼛속 깊이 새기게 됐습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가지 않으면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손가락뼈가 부러진 것은 그에겐 축복이었습니다. 영화 말미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손에는 뼈가 27개 있다. 팔이나 다리뼈가 부러지면 더 강해지기도 하지만 손가락이 부러지면 절대 완치될 수 없다. 펀치를 날릴 때마다 통증을 느낀다.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어느새 갑자기 그 고통이 살아난다. 깨진 유리 조각처럼 나를 찌르고 또 찌른다.”

알리는 깨진 유리 조각처럼 자신을 계속해서 찌르는 그 고통 때문에, 본인이 어떤 존재인지 늘 되새길 것입니다. 무심함으로 인해 하마터면 누나를, 아들을, 연인을 잃을 수 있는 사람임을 뼈마디가 저릴 때마다 상기하게 될 것입니다. 신체적으로는 전보다 못하게 됐을지 모르지만, 타인의 마음이 어떤지도 모르고 살아가던 짐승 같은 상태에서 그는 벗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아픔을 통해 그는 구원받은 것입니다.

영화 ‘러스트 앤 본’ 포스터.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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