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사하는 국가는 없다 자살하는 국가가 있을 뿐 [노원명 에세이]

노원명 기자(wmnoh@mk.co.kr) 2024. 4. 7.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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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문명은 타살 혹은 자살로 망한다
위대했던 시절을 지나 쇠퇴기에 접어든 사회는 마치 감자 씨알처럼 인물들의 크기가 잘아진다는 특징을 보인다. 19세기 청나라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이홍장이 있었지만 그는 동시대인을 압도할 만한 재목이 못됐다. 21세기 들어 일본 정계에는 전 시대를 풍미했던 다나카나 나카소네 같은 걸물들이 나오지 않고 있다.

위대한 선조들과 못난 후손들 사이에 생물학적 유전형질의 차이는 없다. 가령 평균 아이큐 105의 사회가 몇십년 만에 95로 떨어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똑같은 능력치를 지닌 후손들이 그의 조·부 세대보다 용렬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문명사 연구의 대가였던 토인비는 이렇게 설명한다. “후손의 행동을 억제하는 질병은 그들의 타고난 능력의 마비가 아니라 사회적 유산의 붕괴다. 사회적 유산의 붕괴는 그들의 능력이 손상되지 않았음에도 효과적이고 창조적인 사회 활동을 불가능하게 한다.”

사회적 유산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럴(moral)일 수도 있고 모렐(morale) 일수도 있으며 한 사회의 정신적 형질에 해당하는 그 무엇일 것이다. 가령 칭기즈칸이 이룩한 사회적 유산은 ‘멈추지 말고 정복하라’는 것이었는데 물리적인 정복이 멈추고, 정신 마저 안주하게 된 시점에 후손들은 그 유산을 망각했고 몽골제국은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미국의 건국 세대는 세력 확장을 그들의 ‘자명한 운명’(Manifest Destiny)으로 규정했다. 지리적 확장은 19세기에 완결되었지만 미국인들은 이후에도 계속하여 유무형의 ‘프런티어’를 창조함으로써 세계를 선도해 왔다. 나는 20세기 이후 미국의 프런티어는 정치적으로는 ‘자유의 횃불’, 기술적으로는 ‘2·3차 산업혁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더 이상 새로운 프런티어를 만들어내지 못할 때 미국은 몽골제국의 길을 따라갈 것이다.

우리의 사회적 유산은 무엇인가. 한반도에 국가가 들어선지 오래지만 제국이었던 적은 없다. 지역적 리더십이 이곳에서 잉태된 적도 없다. 지난 천년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최우선 가치는 ‘생존’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한반도 역사상 가장 탁월한 생존 능력을 갖춘 국가체제다. 한미동맹이 있고, 세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제조업 기반이 있고, 문화적 매력이 재발견되고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 위대한 영웅들이 있었다. 이승만, 박정희, 이병철, 정주영 같은 이들은 세계적 기준에서도 빠지지 않는 영웅들이다.

그러나 생존능력 그 자체로 사회적 유산이 될 수 있는가. 생존은 가장 강력한 동기부여 원천이지만 그 목적이 충분히 달성되면 더 이상 구성원들을 자극하지 못한다. 나는 한국의 모럴이, 그리고 모렐이 급격히 퇴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에 BTS 말고 무슨 영웅이 있는가. 삼성전자와 현대차는 여전히 훌륭하다. 그것은 이병철, 정주영의 공이다. 이건희 이후로 한국 산업에 영웅이 있는가. 정치로 가면 우울해진다. 허주 김윤환 이후로 한국의 보수정당에서 그만한 무게와 호감의 정객을 본 적이 있는가. 이만섭 이후로 이 땅의 진보정당에서 체면과 양식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뿐인가. 김윤환과 이만섭은 그들의 전성기에 여러 군웅들중 한명일 뿐이었지만 지금 기준에서는 태산처럼 보인다. 한국 정치가 난쟁이가 된 탓이다. 그런지 벌써 한세대가 다 되어간다.

더 이상 영웅과 거목이 나오지 않는다는 한탄은 그러나 사치스럽다. 경멸스럽다 못해 사악하기까지 한 인물들이 22대 국회에 대거 입성할 것으로 확실시된다. 한국이 망할 것 같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기꾼 몇 명이 국회의원이 된다고 나라가 망하느냐고? 엄살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나라는 그렇게 망하는 법이다. 사기꾼이 사기꾼을 공천하고 사기 행각이 드러났어도 빳빳이 고개 쳐드는 것만으로 나라가 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인물과 당에 표를 주는 국민이 다수가 되는 나라는 이미 망국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사람이든, 나라든 사리분별이 안되면 끝난 것이다.

한국이 오래오래 존속하려면 ‘생존’ 이외에 더 고차원의 사회적 유산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앙드레 모루아에 따르면 프랑스인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확고한 신념, ‘프랑스는 멸망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는 민족이다. 모루아는 말한다. “프랑스인은 외견상 혼란 상태처럼 보이면서도 언제나 국가조직에 엄존하는 질서, 분열 상태인 듯하면서도 국민사상을 결속시키는 통일성, 부조리 상태인 것 같으면서도 유지되는 양식, 그리고 집약적인 이상을 구현하는 사물에 대한 존경심이 있다.” 이것이 토인비가 말하는 사회적 유산이다. 지난 한 달 막가는 특정 기득권 집단과 막 던지는 총선 공천, 그걸 분별하지 못하는 여론을 지켜보며 우리에게 과연 이런 사회적 유산이 있는가 회의하게 되었다. 토인비에 따르면 사라지는 문명이 자연사하는 경우는 없다. 타살되거나 자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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