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 전략’이 된 전쟁…‘러-우 전쟁’으로 본 다원 패권의 시대

한겨레 2024. 4. 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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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 인사이트 _ Economy insight
편집자에게 듣는 경제와 책 ㅣ전쟁 이후의 세계

<전쟁 이후의 세계: 다원 패권 시대, 한국의 선택>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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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함께 갖춰야 한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수많은 어록 중에서도 유난히 자주 회자하는 말로, 그가 세상을 떠난 오늘날에도 정치의 본질을 꿰뚫은 말이라고 평가받는다.

김 전 대통령의 말은 국내 정치보다 국제 정치에 더 잘 어울린다. 나와 우리의 옳음을 앞세우는 것만으로 상대인 외국을 설득할 수 없기에 국제 정치에서는 철저한 현실감각이 필수이지만, 현실을 분석하는 데만 그쳐 문제의식을 놓치면 약육강식의 세계를 승인하는 꼴이 돼 도덕과 윤리가 설 곳이 없다. 실제 김 전 대통령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바탕으로 ‘3단계 통일론’이라는 고유한 통일론을 주창하고,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와 ‘아시아 민주주의’를 두고 논쟁하는 등 국제 정치에서도 탁월한 식견을 보여줬다.

‘상인적 현실감각’

〈전쟁 이후의 세계〉는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나아가 전쟁이 바꿀 세계질서를 분석한 책이다. 박노자 작가는 소련 출신 지식인답게 한국인들이 잘 모르는 러시아 사회의 내밀한 작동 원리를 샅샅이 드러내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왜 발생했고 앞으로 어떤 양상으로 진행될지 설명한다.

저자의 ‘상인적 현실감각’이 두드러지는 대목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발전 전략’으로 해석한 점이다. 경제력으로는 미국이나 중국, 유럽연합의 상대가 되지 않는 러시아가 ‘2위 군사 대국’이라는 강점을 살려 “서방과의 경쟁으로부터 차단된, 즉 보호받는 경제 영토 안에서 은행 자본과 정보기술(IT) 자본 등을 키우려는”(89쪽) 시도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이 ‘발전 전략’은 흔히 ‘신냉전’으로 일컫는 세계질서의 재편과 맞물려 있다. 초강대국 미국이 군림하던 일극 패권 체제에서 여러 지역 강국이 세력 균형을 이루며 견제하는 다원 패권 체제로의 이행을, 이 전쟁은 예언하고 있다.

이러한 ‘상인적 현실감각’을 통해 우리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가 아무리 소리 높여 비판하고 제재를 가해도 러시아가 전쟁을 멈추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할 때 그런 일을 저지른 국가나 세력이 비합리적이라고 단정 짓곤 하지만, 많은 경우 그들도 나름의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그런 행동을 벌였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서생적 문제의식’ 또한 놓지 않는다. 러시아의 ‘합리성’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그들의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침략 주체의 내재적 논리를 이해함으로써 그들의 이후 행동을 예견하고, 나아가 평화를 모색하기 위해서다.

‘서생적 문제의식’

따라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서방세계에 맞선 러시아의 자구책’, 푸틴 정권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진보적 대안’ 정도로 평가하는 일부 ‘진보’ 인사와 달리, 저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푸틴 정권의 비윤리성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비정규직이나 플랫폼 노동자들의 권리가 침해받고 민주노조에 대한 탄압이 거센 러시아의 현실, 우크라이나에서 푸틴 정권이 저지른 학살, 표적암살, 불법감금, 강제이주 등을 언급하며 러시아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실제로도 푸틴 정권의 행동은 한반도 평화에 잠재적 위협 요인이다. 푸틴 정권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사용할 북한산 무기를 대량 구매하고, 그 대가로 북한에 첨단 군사기술을 이전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그렇지 않아도 불안정한 한반도의 안보 환경을 더욱 악화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그리고 이 전쟁으로 다원 패권 체제로 재편되는 세계에서 한국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상인적 현실감각’으로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냉정하게 인식하면서도 ‘서생적 문제의식’을 놓지 않고 자유, 인권, 민주주의 등의 가치를 지키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무엇보다 이 새로운 “전쟁의 시대를 전쟁 없이, 한반도 평화를 지켜가면서 헤쳐나갈 수 있는 방법”(14쪽)은 무엇인가? 아쉽게도 그 이야기까지 하기에는 주어진 지면이 작다. 그러니 이 질문들의 답이 궁금한 이들은 <전쟁 이후의 세계>를 직접 펼쳐보기 바란다. 러시아와 한반도, 나아가 국제 정세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펼쳐낸 날카로운 통찰과 구체적인 대안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김경훈 한겨레출판 인문사회팀 대리 insai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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