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파공작 중 전사했지만…'유공자' 인정까지 걸린 57년 [법원 앞 카페]
때로는 소소하면서도 때로는 중요하지만 잊혀진 그런 법정 안팎이야기를 다뤄보려 합니다.
남북한 극한 대립시기 북파공작원으로 첩보활동을 하다가 북한 땅에서 전사했는데 남한에서는 간첩 취급을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지난 3일 MBN 뉴스7을 통해 전해드린 고 강신곤 씨의 사연입니다.
[단독] '북파공작' 중 전사했는데 '간첩 취급'…57년 만에 배상 판결
50년이 넘어서야 북파공작원이었다는 사실이 유족에게 알려지고, 뒤늦은 배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드렸는데요. 신곤 씨가 왜 북파공작원이 됐는지, 왜 50년이 넘어서야 배상을 받을 수 있었는지, 왜 배상액은 1억 8,000만 원에 불과했는지 짧은 방송기사에는 다 담을 수 없었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신곤 씨는 1947년 경남 의령군에서 태어났고, 스무살이 된 1967년에는 가족과 함께 경기 포천군(현 포천시)에 살았습니다. 가정 형편은 그 시절 대부분 집이 그렇듯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신곤 씨는 가족과 모종의 일로 다툰 뒤 집을 나가 노동일을 하며 지냈습니다. 그 후 혼자 지내던 신곤 씨는 1967년 육군방첩부대의 포섭으로 북파공작원의 길을 가게 됩니다. 당시 대부분 민간인 출신 공작원들은 신곤 씨처럼 가난한 형편의 젊은 남성인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16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성호 전 의원이 쓴 ‘북파공작원의 진실’에 따르면 “농민, 노동자, 어민, 체육인, 교사에서부터 현역군인과 제대군인, 심지어 경찰 공무원까지 공작원으로 동원되었다”고 할 정도였죠.
이렇게 공작원이 된 신곤 씨는 북파 전 교육을 먼저 받았습니다. 그런데 신곤 씨가 교육을 받은 기간은 1967년 11월 25일부터 12월 6일까지 불과 2주 정도였습니다. 교육이 끝난 12월 7일 신곤 씨는 바로 북한으로 파견됐습니다.
당시 육군방첩부대가 쓴 공작계획서에는 신곤 씨의 임무가 상세히 나옵니다.
귀순자로 가장 월북하여 북괴 대남공작기관에 공작원으로 선발된 후
가. 대남공작 기구에 대한 자료로 교육담당 지도원, 접촉하는 인원들의 성명, 연령, 인상, 인적사항 및 직위 등과 지도방법 그리고 안전가옥의 형태 등을 정확히 파악할 것이며
나. 북괴의 대남공작 전술을 탐지할 자료로 대남, 대일공작에 대한 과정, 지도원 및 기타 접촉인원들의 발언을 정확히 기억할 것이며
다. 교육기간에 지도원의 강의, 경험담 또는 접촉할 수 있는 인원들에게서 이미 남파된 간첩을 색출할 수 있는 자료를 수집할 것이며
라. 대남 공작 임무를 받고 남파된 후 이무에 따른 비밀공작을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할 것.
- 공작계획서 중
바로 북한의 대남공작기관에 합류한 뒤 정보를 캐고 다시 북한 소속 공작원으로 남파돼 돌아오는 이른바 ‘이중스파이’ 임무를 맡은 것이었죠.
계획서에는 ‘월북 후 1967년 12월 9일 오전 6시 5분에서 15분까지 전방에서 북한의 대남 방송으로 경남 의령군 장심곤이 월북하였다는 방송이 청취됐다, 본명이 강신곤인데 장심곤으로 방송한 것으로 보아 일부 내용을 위장 은폐보도하고 있음’ 이라며 신곤 씨가 무사히 월북을 가장한 침투에 성공했다는 내용도 적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신곤 씨 임무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북파 이후 신곤 씨 소식이 끊겼기 때문입니다. 군에서는 신곤 씨가 작전 중 전사한 걸로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된 건 이후 유족에 대한 태도였습니다. 국가를 위해 일한 공작원이 사망했으면 공작원이라는 기밀성을 고려하더라도 최소한의 전사 사실은 알려주고 예우를 해야 하는 게 맞았을 겁니다. 하지만, 군은 도리어 신곤 씨 가족에게 찾아간 뒤 ‘신곤 씨가 간첩 앞잡이 노릇을 하다가 월북했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연좌제가 있었던 당시 시대인 만큼 오랜 시간 가족들을 오히려 감시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신곤 씨 동생 명자 씨(가명)는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 강명자 씨 MBN 인터뷰
이상한 점도 있었다고 합니다. 군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신곤 씨의 사망신고를 하라고 요구했다는 겁니다. 군의 종용에 신곤 씨가 북으로 간지 9년이 지난 1976년에 가족들은 결국 신곤 씨 사망신고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군도 찾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곤 씨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건 세기가 바뀐 2000년대 들어서였습니다. 당시 북파공작원 양성 과정을 다룬 영화 ‘실미도’가 개봉해 1,0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은 흥행을 했죠. 명자 씨도 영화를 봤습니다. 그리고는 문득 오빠 신곤 씨도 이런 북파공작원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명자 씨는 다시 군을 찾아가 진상규명을 요구했습니다. 신곤 씨가 북파공작원이었는지 확인해달라고 했죠. 마침 당시는 신곤 씨같은 공작원들의 존재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던 시기였습니다. 마침 2004년에는 공작원들을 ‘특수임무수행자’라 명명하고 특수임무수행자 보상법 일명 특임자보상법이 만들어지기도 했었습니다. 당시 명자 씨는 전직 특임자 또는 특임자 유족 등으로 구성된 특수임무유공자회의 도움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군은 이때도 신곤 씨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러는 사이 2010년 신곤 씨와 명자 씨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결국 정부가 신곤 씨와 관련한 사실을 알려준 건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8년이 지난 2018년이었습니다. 신곤 씨가 전사한 지는 무려 51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명자 씨는 “조금만 일찍 알려줬다면 어머니께서 아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돌아가셨을 게 아니냐,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정신이 멀쩡하셨었다, 너무 억울하다”고 말했습니다.
전사통보를 받고 1년 뒤인 2019년 명자 씨는 정부의 뒤늦은 전사 통보에 대한 배상 소송을 진행했습니다.
명자 씨가 제기한 문제점은 두 가지였습니다. 1) 명확한 법적 근거 없이 단기간에 불과한 가혹한 훈련을 시켜 공작임무를 시킴으로써 보호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2) 사망 사실을 통지할 의무가 있음에도 다하지 않았다.
3년에 걸친 재판 끝에 1심 법원은 2) 사망 사실을 통지하지 않은 의무만 문제라고 인정했습니다. 공작 임무를 시키는 과정은 당시 시대상을 감안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고 본 겁니다.
- 1심 선고
다만 공작 임무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전사 사실까지 안 알려준 건 잘못이라고 배상 책임이 있다고 봤습니다.
- 1심 선고
그런데 1심 법원은 정부가 유족에게 위자료는 줘야 하지만 국가유공자로서 보상은 할 필요가 없다고 봤습니다. 공작원이지만 군인은 아니기 때문이라는 이유였습니다.
- 1심 선고
때문에 1심 법원은 위자료만 인정해 정부가 명자 씨에게 1억 원만 배상하라고 선고했습니다. 액수를 책정한 기준은 관련 사건을 참고했다며 2010년 숨진 어머니 몫 위자료로 8,000만 원, 명자 씨 몫으로 2,000만 원을 책정했습니다.
명자 씨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항소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2월 15일 서울고법 민사33부(구회근 부장판사)는 1심 판결 중 신곤 씨를 유공자로 볼 수 없다는 부분을 뒤집고 국가유공자 유족으로서 받아야 할 보상도 명자 씨에게 해주라고 선고했습니다.
- 2심 선고
다만, 2심 법원은 유공자 가족으로서 받았어야 할 보상액과 위자료 배상액을 합쳐 정부가 줘야 할 액수를 1억 8,000만 원으로 정했습니다. 1심에서 인정된 기존 위자료 1억 원을 빼면 유공자 가족 보상액을 8,000만 원으로 계산한 건데 이는 국가유공자법이 개정된 2002년을 기준으로 명자 씨와 어머니가 받을 수 있었던 보상액을 합친 것이라고 2심 법원은 밝혔습니다. 당초 명자 씨가 청구한 액수는 9억 4,000만 원이었는데 한참 못 미치는 액수였습니다.
명자 씨와 정부가 모두 상고하지 않아 판결은 지난달 9일 확정됐습니다. 명자 씨는 상고하지 않은 이유로 “이미 5년이나 재판을 했고 소송비용 등 너무 지쳤다”면서 “유공자로 명예회복이 된 점에 어느 정도 만족한다”고 말했습니다.
당초 명자 씨는 인터뷰에 응한 이유로 '비슷한 상황에 놓인 특임자 유족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한다는 취재 목적에 동의해서'라고 밝혔습니다. 너무나 많은 유족들이 여전히 고통받는 점을 알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한 김 전 의원의 저서에 따르면 돌아오지 못한 북파공작원이 7,987명이라고 합니다. 꽤 많은 숫자죠. 이들 대부분은 생사도 행방도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명자 씨 소송을 대리한 홍민결 변호사는 "명자 씨가 받은 배상 판결이 국가 안보를 위한 시대적 희생양이 된 국민에게 합당한 예우를 해줘야 한다는 점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판결이라고 본다"면서도 "여전히 생사나 행방조차 확인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피해를 보상하거나 보상할 수 있는 체계가 부족하다는 점이 제도적인 부분에서 아쉽다"고 지적했습니다.
[우종환 기자 woo.jonghwan@m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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