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7일!] 엄혹한 시절 꿈꿨던 '언론 자유'… 지금 우리 모습은?

최문혁 기자 2024. 4. 7.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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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독립신문 창간

독립운동가 서재필, 한글로 창간… "남녀 상하 모두가 읽을 수 있게"
최초의 한글 광고로 구독료 낮춰… '신문의 날'로 지정된 창간일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의 동상은 독립신문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제작됐다. 사진은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독립공원에 세워진 서재필 동상. /사진=한국관광공사
1896년 4월7일.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이자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이 창간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은 대한제국이 발행한 '한성순보'다. 그러나 1957년 한국 언론계는 독립신문의 창간일을 '신문의 날'로 지정했다. 4월7일 '신문의 날'에는 독립신문의 공로를 인정하는 후배 언론인들의 마음이 담겼다.

당시 대한제국이 발행한 한성순보는 정부의 일방적인 전달 수단이었다. 반면 서재필 선생이 주도해 창간한 독립신문은 당시 국민의 목소리를 전하는 유일한 창구였다는 점에서 최초로 진정한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권력을 감시·비판하고 국민을 계몽하는 언론의 주요 기능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독립신문은 2012년 10월17일 국가등록문화재로 등재됐다.



독립운동가 서재필… 한국 언론의 시발점 세우다


독립협회에 대한 억압은 독립신문의 폐간으로 이어졌다. 사진은 독립신문 지면. /사진=문화재청
"오직 조선만을 위해 불편부당하고 차별 없는 공정한 보도를 약속하고 정부와 백성의 의사소통을 도모할 것이다."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은 창간호에서 이 같은 내용의 논설을 썼다. 서재필이 신문을 창간한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개화파 독립운동가 서재필은 1884년 12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과 함께 일으킨 갑신정변에 실패하자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서재필은 한국인 최초로 미국 국적을 취득하고 의사가 돼 필립 제이슨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갑신정변의 죄를 사했다는 박영효의 설득으로 서재필은 1895년 12월 귀국했다. 당시 을미개혁을 추진하던 김홍집 내각은 서재필에게 외무행정을 맡기고자 했으나 서재필은 국민계몽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신문 창간을 계획했다. 서재필은 국민과 정부 관리를 모두 교육할 수 있는 계몽의 힘이 바른 언론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목숨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강했던 일제의 탄압으로 서재필의 신문 창간 계획은 어려움을 겪었다.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이끌었던 윤치호의 일기에 따르면 서재필은 "일본이 의사에 반하는 사람은 누구나 암살할 것이라고 은근히 암시했다"며 "아무래도 신문 발간 계획을 포기해야겠다"고 윤치호에게 털어놨다.

1896년 2월11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아관파천)하면서 조선 땅에 친러시아 세력의 영향력이 커졌다.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은 무너졌지만 친러 정권도 신문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 서재필에게 신문 창간의 길이 열렸다.

1896년 4월7일 서재필의 주도 아래 독립협회 전신인 독립문건립추진위원회가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서재필이 사장 겸 주필을 맡아 발행과 사설 집필 등을 담당했다. 초기 자금은 대한제국으로부터 지원받은 4400원과 신문사 건물이었다.

창간 당시 독립신문은 가로 22㎝, 세로 33㎝로 지면 4면 중 3면은 한글판이었으며 나머지 1면은 영문판이었다. 서재필은 한글로 신문을 발행하는 것에 대해 "남녀 상하 귀천 모두 누구나 알아보기 쉽게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영문판은 당시 국내 소식을 조선인의 목소리로 외국에 알리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초기 독립신문은 주 3회 300부를 발행했으나 이후 계속해서 변모했다. 1897년부터는 한글판과 영문판이 분리됐으며 1898년 7월1일부터는 일간지로 발행됐다. 1898년 말에는 최대 3000부까지 발행할 정도로 많은 국민이 독립신문을 읽었다.

독립신문은 한글의 발전에도 이바지했다. 독립신문은 최초의 한글 광고를 신문에 게재했다. 광고료를 받아 신문 경영의 수입원으로 삼은 것은 근현대 언론의 수익모델과 흡사하다. 덕분에 구독료를 낮출 수 있었고 더 많은 조선인이 한글로 쉽게 나라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독립신문은 한글에 띄어쓰기를 도입해 한글을 더 쉽게 읽고 쓰는 데 기여했다. 이는 국어학자 주시경이 독립신문의 총무와 국문판 주필을 맡았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4000원에 팔린 독립신문… 폐간으로 이어진 억압


독립신문 창간일은 '신문의 날'로 지정됐다. 사진은 지난 2016년 서울 여의도 국회입법조사처 대회의실에서 열린 독립신문 창간 120주년 '언론사의 사명과 역할을 돌아보다' 토론회. /사진=머니투데이
1896년 7월 독립협회가 설립되면서 독립신문은 자연스레 독립협회의 기관지 역할을 했다. 독립운동의 창구 역할로 외국의 국권 침탈과 정부 관리의 부패 등 정부를 비판하는 논조가 이어지자 독립신문은 정부의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1897년 12월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은 결국 추방당했다. 서재필은 추방 전 독립협회장이던 윤치호에게 독립신문의 주필을 맡겼다.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 윤치호는 아펜젤러 목사와 함께 독립신문을 이끌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정부가 1898년 12월 독립협회를 해산시키면서 아젠펠러가 독립신문의 주필을 맡았다. 이후 1899년 7월18일 대한제국 정부가 독립신문 사옥 반환을 요구하면서 독립신문은 사실상 폐간에 이르렀다. 결국 1899년 12월4일 정부는 4000원에 독립신문을 매수한 뒤 종간호를 발행하고 신문을 폐간시켰다.

1896년부터 1899년까지 4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독립신문이 남긴 한국 언론의 발전은 지금까지도 후배 언론인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최문혁 기자 moonhk@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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