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용정 그리고 근대 풍경] ⑤ 봄다운 봄, 겨울은 가고야 만다

박미현 2024. 4. 6.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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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심연수(1918~1945)는 국권이 없는 시대에 짧은 생애를 살면서 290여 편의 시와 소설, 수필, 평론을 한글문학으로 남겼다. 불운한 시대는 강릉에서 태어난 그를 러시아, 중국, 일본 이주하는 삶으로 이끌었으나 언제나 문학과 함께였다. 광복 직전에 중국 왕청현에서 불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으나 편지, 공책, 일기, 도서, 사진, 스크랩 등 다양한 유품은 중국에 남은 유족에 의해 잘 간수됐다가 지금은 강릉의 품으로 돌아왔다. 조카 심상만씨에 의해 고국에 안긴 600점 가까운 자료는 2023년 말 『심연수문학사료전집』(강릉문화원·심연수기념사업회·강원도민일보)으로 완간됐다. 이 자료를 직접 정리할 기회를 가졌던 필자는 그가 남긴 작품, 생활기록, 유물을 소개하며 스산했던 시대에 한 시인을 넘어 강원인 이주사를 공유하려 한다.

⑤ 봄다운 봄, 겨울은 가고야 만다

심연수가 남긴 여러 시에 ‘봄’이 등장한다. 사계절 중 유난히 봄에 대한 각별한 정서를 일기에만 남긴 것이 아니라 작품으로 담아냈다. 만주국 용정국민고등학교 졸업학년인 4학년이던 1940년 3월 28일 책 ‘노산시조집’을 읽으면서 27쪽 빈 지면을 골라 시조 ‘봄 소식’을 썼다. 독서에 몰두하며 틈틈이 습작을 해오던 그 해 4월 신문사에 작품을 보내 실린 첫 시는 ‘대지의 봄’이었다. 이 작품은 4월 1일 창작했다. 이틀 뒤인 4월 3일에는 일부 시어가 겹치는 습작시 ‘북국의 봄맞이’를 썼다.

그는 용정에서 발행된 만주국 기관지 ‘만선일보’에 작품을 투고하기로 하고 ‘대지의 봄’ ‘여창(旅窓)의 밤’ ‘대지의 모색(暮色)’ 3편을 보냈다. 3편 모두 만선일보에 실리게 되는데, 가장 먼저 4월 16일자로 발표된 시가 ‘대지의 봄’이다. 신문에 실린 첫 시여서 애정이 남달랐는지 육필시고집 여러 권에 ‘대지의 봄’을 엮어넣었다. 심지어 육필시고집 첫 머리에 이 시를 손수 쓰고, 그 위에 신문스크랩까지 오려붙일 정도로 유난했다.

이듬해인 1941년 봄 무렵에는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2월 7일 용정을 떠나 2월 10일 도쿄에 들어와 일본대학 예술학원 창작과 입학시험을 준비해 치르고 합격통지를 받은 다음날인 4월 8일 쓴 시 ‘아침’에 봄비 젖은 촉촉한 땅이 등장한다. 1941년 쓴 또다른 시 ‘들불’의 배경은 얼굴이 깎일 정도로 찬바람 부는 봄날 저녁이다.

일본 땅에서 맞는 세번째 봄을 앞둔 1943년 2월 8일 월요일, 이날은 음력 정월 초나흗날이었다. 도쿄의 자취방에서 홀로 지내면서 ‘소년아 봄은 오려니’를 썼다. 불과 몇년의 차이인데도 1940년 용정, 1943년 도쿄에서의 봄은 전연 다르다. 잔치놀이를 해야할 봄이 순리대로 오지않을 때 겪어내야하는 고난과 상처의 깊이가 어른거린다. 동시에 온기와 생기가 사라진 암울함에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는 강고한 신념으로 ‘겨울은 가고야 만다’라며 봄을 관철시키고자 의지를 드높인다.

‘봄’을 끌어들인 그의 시를 따라가다보면 삶이든, 상황이든, 시대이든 으레 일상에 평온하게 존재해야할 ‘봄’이 지독하게 절실해지는 순간이 있음을 알게된다. 2024년 4월 지금 이땅에도 ‘봄’을 관철시키겠다는 의지의 몸짓이 계속되고 있다.

박미현 논설실장·문학박사


대지의 봄

봄을 잊은듯 하던 이 땅에도

소생의 봄이 찾아오고

녹음을 버린듯이 얼엇던 강에도

얼음장 나리는 봄이 왔대요,

눈우에 말은 풀 뜻던

불상한 양의 무리

새 풀 먹을 즐건 날

멀지 않엇네.

넓은 황무지에단

신기루 궁을 짛고

새로 오신 봄님 마지

잔치노리 한다옵네,

옛봄이 가신 곧

내일 밧버 못봣길래

올해 오신 이 봄님은

누구더러 보라할고.

(1940년 4월 1일 창작)
 

▲ 심연수 시인 사료 원문 [심상만 소장본 강릉문화원 제공

들 불

임자 몰을 불

거침없이 타온 천리 저쪽 넋

누가 놓은 불씨기에

저토록 꺼짐없이 밤하늘 붉히는고!

그처럼 사정없이 타고있는지!

불!불! 사정없는 불길!

끌래야 끌수 없는 위대한 작난

언제까지 이 들판에 살어있을지!

어둡는 저녁 혼자 보는 들불

그 불똥, 이 가슴에 튀여 옴기를

봄저녁 찬바람에 낯을 깍기며

말없이 말없이 바래보노라.

(1941년 창작)

소년아 봄은 오려니

봄은 가처웠다.

말렀던 풀에 새움이 돗으리니

너의 조상은 농부였다

너의 아버지도 농부다.

전지는 남의 것이 되였으나

씨앗은 너의 집에 있을게다

가산은 팔렸으나 나무는 그대로 자라더라

재 밑에 대장깐집 멀리 떠나갔지만

끌 풍구는 그대로 놓였더구나

화덕에 숱 놓고 불씨 붗어

옛소리를 다시 내여봐라

너의 집이 가난해도 그만 불은 있을게니.

서투른 대장의 땀방울이

무딘 연장을 들게 한다더라

너는 농부의 아들

대장의 아들은 아니래도……

겨을은 가고야 만다

계절은 순차를 명심한다

봄이 오면 해마다 생명의 환희가

생기로운 신비의 씨앗을 받더라.

(1943년 2월 8일 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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