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獨 뮌헨 구장에 울려퍼질 한국어…韓 피아니스트, 김민재 응원가 만든다

김양혁 기자 2024. 4. 6.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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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생 아이비리그 나온 한국인 피아니스트
도이치텔레콤 회장과 담판 “남과 다른 것 할 것”
韓 청년 제안에 ‘화들짝’, 뮌헨·김민재 응원가 헌정
삶의 원동력 ‘어머니’…”향후 뮤지션으로 기억되길”
서형민 피아니스트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위치한 소속사 원아트에서 조선비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양혁 기자

지난해 12월 독일. 1990년생 한국인 피아니스트와 유럽 최대 통신사인 도이치텔레콤의 팀 회트게스(Timotheus Höttges) 회장이 마주 앉았다. 30대 청년은 2년 마다 독일서 열리는 본 베토벤 국제 콩쿠르 우승자로, 도이치텔레콤이 이 콩쿠르를 주최했다.

회트게스 회장은 매회 콩쿠르 우승자와 의례적인 만남을 가진다고 한다. 일분일초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는 그와 허락된 시간은 길어야 20분이다. 곧장 본론이었다. “무엇을 해주면 될까?(What can we do for you?)”라고 회트게스 회장이 물었다.

한국에서 약 8500㎞를 날아 독일로 온 청년은 당당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하고 싶다(Nothing you’ve ever done)”고 되받아쳤다. 그는 이내 회장에게 본심을 털어놨다. “도이치텔레콤의 1호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 그 일환으로 메인 스폰서로 있는 독일 분데스리가 1위 구단 바이에른 뮌헨의 공식 응원가인 ‘남부의별(Stern Des Südens)’ 편곡을 맡고 싶다”.

마침 한국 축구 국가대표 김민재 선수가 아시아 최고 이적료를 받고 바이에른 뮌헨으로 옮긴 뒤였다. 회트게스 회장은 곧장 담당 임원을 불러 서 피아니스트와 연결했다. 김민재 선수의 응원가도 그에게 맡기기로 했다.

서형민 피아니스트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위치한 소속사 원아트에서 조선비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양혁 기자

4세부터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 온 30대 청년은 이제 대중과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서 피아니스트는 “여전히 대중들은 음악(音樂)을 음학(音學)이라 생각한다”며 “이제는 피아노 연주자가 아닌 음악가(Musician)로서의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뮌헨 구단의 응원가 편곡과 김민재 선수의 응원가가 시작이다. 그가 작곡한 곡을 자신이 아닌 타인이 연주하거나, 부르는 적은 이전까지 없었다. 피아니스트라는 굴레를 벗고, 대중에게 다가가겠다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바이에른 뮌헨(독일) 소속 김민재(앞쪽). /연합뉴스

조선비즈는 독일 하노버국립음대 대학원 피아노 석사 이후 최고연주자과정 마무리를 앞두고 귀국해 모국에서 ‘음악인’으로서 인생 2막을 준비 중인 그를 소속사 원아트에서 만났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자기소개 부탁한다.

“1990년생 피아니스트 서형민이다. 피아노는 배우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4세 때 어머니가 그림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해 미술학원에 보냈는데, 당시 미술학원이 피아노학원도 같이 했다. 미술학원에서 도화지에 피아노 건반을 그려왔더니 어머니가 피아노를 배우고 싶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냉큼 ‘네’라고 했다.

학원 선생님들이 재능이 있다고 하셨다고 한다. 작곡이라고 하기 민망하지만, 5세부터 혼자 오선지에 콩나물 대가리를 그렸다고 한다. 다른 애들은 다 싫다고 하는데 너무 재밌어서 집에 와서도 계속 그렸다. 그렇게 작곡도 시작했다.”

─음악하는데 부모님 반대는 없으셨나.

“지지가 없었다면 지금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와 단둘이 10세에 미국으로 갔다. 남들은 독일로 가라 그랬지만, 어머니는 음악만 하고 싶게 하지 않아 미국행을 택했다. 음악 외에도 여러 분야에 관심을 보이니 시야를 넓힐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가정 형편이 여유롭지 못했다. 어머니는 타국에서 저를 혼자 키우며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다 하셨다. 일만 하다 보니 영어를 배울 틈도 없었을 정도다. 유학생 신분이다 보니 공립학교에 갈 수도 없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을 받아 부담을 덜어드리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공부도 싫지 않았다.”

서형민 피아니스트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위치한 소속사 원아트에서 조선비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양혁 기자

─미국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컬럼비아대를 졸업했다.

“다른 미국 고등학생들처럼 미국대학입학자격시험(SAT)을 쳤다. 음대도 가고 싶었지만, 음대 같은 경우는 입학하면 1~2년 기숙사에서 살아야 하더라. 그런데 학교에서 기숙사비 지원은 해주지 않았다. 당시 1년 기숙사비가 1만5000달러였다.

아이비리그는 기숙사비와 학비에 더해 지원금까지 준다고 하더라. 컬럼비아대와 프린스턴대에 합격했는데, 컬럼비아대에 진학하면 줄리어드 음대에서 피아노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프린스턴대에 가면 음악에 소홀해질 것 같아 컬럼비아대를 택해 역사학을 전공했다. 하버드를 붙었다면 하버드에 갔겠지만, 대기자 명단이었다(웃음).”

─공부에 대한 욕심도 있는 것 같다. 어떻게 공부했나.

“예전부터 해왔던 공부를 놓는다는 게 아까웠다. 항상 생각해 왔던 것이 피아노만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피아노가 지금까지 짧은 인생의 큰 부문을 차지하지만, 피아니스트로 태어나서 피아니스트로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다.

잠이 많은 편인데, 불규칙적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까지 공부하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이비리그의 벽을 실감했다. 수제들 사이에서 경쟁해야 하니 힘들었다. 대학 4년 동안 피아노는 하루 1~2시간 치면 많이 쳤다 싶은 정도였다. 나머지 시간은 모두 공부하는데 쏟았다.

성적은 떨어지면 안 됐다. 장학금을 계속 받으려면 B 이하로 떨어지면 안 됐다. 적어도 1년에 5만5000달러가 들었는데, 10세 때 저를 데려온 어머니 생각을 많이 했다. 당시 아버지가 다니던 직장들은 계속해서 부도가 났다. 1000만원도 가져오지 못해 거의 무일푼으로 왔었다. 아직도 영어를 배우실 틈이 없을 정도로 어머니는 저를 지원하기 위해 치열하게 사셨다.”

─2021년 독일 본 베토벤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손톱 부상을 딛고 우승을 차지해 주목받기도 했다.

“국제 콩쿠르는 18~30세 초반까지 나갈 수 있다. 원숙한 사람이 새내기와 경쟁하면 안 된다는 일종의 불문율이다. 당시 나이가 있어 마지막 콩쿠르라 생각했는데 고질적으로 손톱이 안 좋았다. 고름이 나오고 손톱 절반을 잘라내야 했다. 콩쿠르도 가기 직전까지도 고민했다. 그리고 경연이 아니라, 음악을 하자고 최선을 다하자고 결심했다. 진심이 통했나보다고 생각했다.”

서형민 피아니스트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위치한 소속사 원아트에서 조선비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양혁 기자

─우승 당시 어떤 곡을 연주했나.

“베토벤의 열정과 협주곡 등 다양한 곡을 연주했다. 예선 심사에서 100명 정도 추리고 20명을 다시 선발했다. 이후 12명, 6명을 거쳐 결선에는 3명이 남았다. 현대곡을 쳐야 할 때가 있었는데, 자작곡을 연주했다. 자작곡을 연주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자작곡을 치면 나 자신을 더 잘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바이에른 뮌헨 공식 응원가 편곡 얘기는 어떻게 진행됐나.

“본 베토벤 국제 콩쿠르는 2년마다 열린다. 이전 대회 우승자로, 지난해 12월 열린 콩쿠르 개막 공연을 맡았다. 콩쿠르가 끝난 뒤 며칠 더 있으면서 도이치텔레콤 회장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약속을 잡았다.

주어진 시간은 20분 밖에 없었다. 회장은 앉자마자 무엇을 해주면 좋겠냐고 물었다. 그래서 이전 우승자들이 하지 않았던 것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자세를 고쳐 앉아 경청을 시작하더라. 지난 우승자들의 경우 음반 제작하는 것에 그치던데, 나는 새로운 것을 하고 싶다고 했다. 연주도 하고, 편곡, 작곡, 지휘는 물론, 영어 음악도 할 수 있다며 과거 우승자들 중에는 내가 거의 유일하다고 계속해서 강조하며 도이치텔레콤 1호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고 했다.

반응이 좋았다. 그래서 축구도 좋아한다고 했다. 도이치텔레콤은 바이에른 뮌헨의 메인 스폰서기도 하다. 응원가 ‘남부의 별’을 편곡하고 싶다고 했더니 좋은 생각이라고 하더라. 이후 회장이 최근에 김민재 영업한 것을 아냐고 자신도 직접 사인받았다고 하더라. 자연스럽게 김민재 선수 응원가도 한국어와 독일어 버전으로 만들어 헌정하는 것도 얘기를 나눴다.”

─끝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클래식도 좋아하지만, OST와 영화음악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좋아한다. 미국에 있을 때 드라마 다모에 나오는 음악이 좋아 CD를 구해서 그것들만 들었던 적도 있다. 클래식을 베이스로 하고 있지만, 여러 분야로 넓혀가고 싶다. 대중들이 좋아하고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뮤지션이 되고 싶다.

올해 하노버국립음대 대학원 피아노 최고연주자과정을 마무리하고 귀국해 귀국 독주회를 준비 중이다. 사람들이 여전히 음악을 음학으로 생각하는 게 아쉽다. 제 연주를 듣다가 주무셔도 괜찮다. 저는 제 연주가 청중에 편안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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