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1917년 순종의 기이한 교토 행차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4. 4. 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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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 속의 모던 경성] 이토 히로부미 휘호에서 이름 딴 ‘초라쿠칸’서 3박, 메이지왕릉 참배도
벚꽃 명소로 이름난 교토 마루야마 공원의 상징인 수양벚나무. 만개한 벚꽃 주변에 관람객이 가득하다. 1917년 6월22일 오후 교토에 도착한 순종은 이 벚나무 근처 '초라쿠칸'에서 3박4일간 묵었다. 메이지 왕릉 참배가 주목적인 여행이었다. /김기철기자

마루야마(円山) 공원의 수양벚꽃은 활짝 피어있었다. 교토의 첫 근대식 공원(1886년 개원)인 이곳은 이름난 벚꽃 명소다. 만개한 벚나무 아래 돗자리를 깔고 음식을 먹으며 꽃놀이를 즐기는 상춘객들이 공원을 점령했다. 입구를 지나 중심부로 들어가면 공원 상징격인 ‘기온의 수양 벚나무’가 줄기를 늘어뜨린 채 만개한 모습이 장관이었다. 수양벚나무 오른쪽엔 ‘초라쿠칸’(長樂館)으로 가는 출구가 이어졌다. 1917년 순종이 첫번째이자 유일한 일본 여행에 올랐을 때, 교토에서 머문 숙소였다.

'일본의 담배왕' 무라이 기치베가 1909년 세운 별장. 이토 히로부미가 쓴 휘호에서 '초라쿠칸'이란 이름을 따왔다. 순종은 1917년 6월22일부터 3박4일간 이곳에서 묵었다. 지금은 호텔과 레스토랑으로 영업중이다./김기철 기자

◇107년 전 초여름, 순종의 교토 방문

1917년 6월22일 오후4시10분 교토역. 특별열차에서 순종이 내렸다. 3박4일 교토 일정의 시작이었다. 역에는 엄청난 환영 인파가 몰려나왔다. 교토시장, 교토대 총장, 지역 사단장 등 정관계 요인들도 나왔다.

순종의 교토 방문은 6월8일부터 28일까지 21일간에 걸친 일본 순방의 일환이었다. 총독부가 마련한 특별열차를 타고 경성을 출발, 부산에서 시모노세키까지는 일본 군함으로 이동했다. 기차와 자동차, 마차와 인력거를 갈아타면서 일본을 여행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5월 이곳을 방문하고 쓴 휘호 '長樂館'(초라쿠칸). 지금도 호텔 2층 입구에 걸려있다. /김기철 기자

◇'일본의 담배왕’무라이 기치베 별장

환영 인파를 뒤로 한 순종은 자동차 편으로 숙소인 초라쿠칸(長樂館)으로 향했다. 1909년 5월 일본의 담배왕으로 알려진 무라이 기치베(村井吉兵衛)가 지은 별장이었다. 미국인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겨 지상 3층 서양식 건물을 세웠다. ‘풍경이 절가한 원산공원 안에 있어 풍치가 아담한 동산의 자태는 앞뜰에 드리우고 10만의 문호가 서로 연한 옛도읍의 시가를 눈아래에 굽어보는 근경은 산해 수천리를 지나 멀리 찾으신 이왕 전하의 OO를 감하야 드림이 있을 듯하고…’(長樂館上의 이왕전하’, 매일신보 1917년 6월23일)

무라이는 1910년대 경남 주남 저수지 근처 늪지대와 황무지를 사들인 뒤 개간해 900만평에 이르는 대농장을 운영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오늘날의 창원 대산면과 김해 진영 일대에 걸친 대산평야다. 무라이는 순종을 이 별장에 묵게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뛰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가 명명한 호텔

초라쿠칸은 이토 히로부미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설립 직후인 1909년 5월 25일 교토를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에 묵은 뒤 쓴 휘호에 근거, 초라쿠간’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 호텔 2층 홀에는 지금도 이토가 쓴 ‘초라쿠칸’편액이 걸려있다. 을사보호조약을 강제한 장본인이자 초대 통감으로 강제병합으로 가는 길을 닦은 이토 히로부미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는 이 호텔에 묵은 순종의 심사는 어땠을까.

순종의 교토일정을 알린 매일신보 1917년 6월23일자 기사 '장락관상의 이왕전하'

◇메이지왕릉 참배, 니조조 관광

순종은 23일 오전 9시 궁내성 안내로 메이지 일왕릉을 참배했다. 교토 방문의 제1순위 일정이었다. 일본은 순종이 대한제국을 병합한 메이지일왕의 묘소에 참배하는 장면을 연출하고 싶었을 것이다. 조선과 일본 국민은 물론 세계에 일본의 조선 지배가 무리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순종의 일본 방문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를 비롯한 기자단에 의해 시시각각 보도됐다.

다음날인 24일은 일요일이었다. 순종은 니조조(二條城) 등 명소를 둘러봤다. 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3년 축조한 이 성은 199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유명 관광지다. 쇼군의 집무실인 니노마루 궁전은 33개의 커다란 방으로 이뤄진 거대한 목조건물이다. 일왕의 거처인 고쇼를 능가할 정도의 니조조를 둘러본 순종은 그 규모에 압도당했을지도 모르겠다. 25일 아침 7시 특별열차로 시모노세키로 향했다.

1917년 6월 도쿄를 방문한 순종은 다이쇼 일왕을 알현했다. 위 사진은 일정을 마치고 도쿄역에서 출발하는 순종 일행. 아래는 도쿄역으로 가는 순종의 마차 행렬. 매일신보 1917년 6월24일자

◇다이쇼 일왕 친견이 첫번째 과제

일본은 1910년 조선을 강제병합한 후부터 순종의 일본 방문을 추진했다. 1912년 메이지 일왕이 죽었을 때 방일이 거론됐으나 성사되지 않았다가 5년이 지나 이뤄진 것이다. 순종의 방일 첫번째 과제는 다이쇼(大正) 일왕 알현이었다.

대한제국 황제에서 이왕(李王)으로 전락한 순종에게 선택권이 있었을 리 없다. 순종은 일제와 총독부가 시키는대로 끌려다닐수밖에 없는 망국의 군주였다. 총독부는 고종과 순종 등 조선의 왕가를 황공족으로 특별대우하면서 조선 통치에 활용하려고 했다. 순종의 일본 방문은 당시 ‘동상’(東上·동경으로 올라간다는 뜻)으로 소개됐다. 순종이 일본 천황앞에 고개를 숙이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일본의 조선 통치가 자연스럽게 정착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목적에서 나왔다. 순종의 방일은 그만큼 일본 측에도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전력을 기울여 일정을 준비했다. 순종이 지나가는 도시마다 환영인파가 줄이었고, 성대한 환영행사를 베풀었다.

◇8박9일간의 동경체류

순종 방일여행단의 규모는 컸다. 민병석 이왕직 장관 이하 직접 수행원만 44명이나 됐고, 고위직이 각자 데리고 온 수행원까지 더하면 이보다 훨씬 많은 대규모 일행이었다. 순종의 방일은 6월12일 오후5시 동경역에 도착하면서 본격적 일정이 시작됐다. 일본 왕족들과 테라우치 조선 총독, 내각 대신, 육해군 고위 장성이 순종 일행을 환영했다. 14일 아침 순종은 대례복 차림으로 고쇼를 방문, 다이쇼 일왕 부부를 만났다. 1907년 10월 왕세자 신분으로 방한한 다이쇼 일왕과의 두번째 만남이었다. 당시 다이쇼는 왕세자였고, 순종은 대한제국 군주였다. 10년만에 역전된 처지의 순종은 비감했을 것이다.

순종은 다이쇼 일왕과 테라우치 전 조선총독 등이 주최한 만찬, 오찬에 참석했다. 일본측 고위 인사들을 초청한 오찬도 주최했다. 6월20일 오후 특별열차로 동경역을 출발해 귀국길에 올랐을 때도 수많은 인파의 환송을 받았다. 동경에 올때의 역순으로 교토, 시모노세키, 부산을 거쳐 28일 오후 5시40분 남대문역에 도착했다. 6시30분 덕수궁 함녕전에 들어가 고종에게 귀국 인사를 한 후 6시50분 창덕궁에 돌아오면서 기나긴 방일은 끝났다.

◇초라쿠칸 찾는 한국 관광객들

순종이 묵은 초라쿠칸은 한국 관광객들에게도 잘 알려진 명소다.(이 호텔 홈페이지엔 순종이 1916년 10월22일 방문한 것으로 소개한다. 이는 오류다.) 호텔 카페의 애프터눈 티 코스가 일본내 2위(2023년 니혼게이자이신문)를 차지할 만큼 인기가 높기 때문이다. 벚꽃시즌인 요즘은 5600엔짜리 애프터눈 티 코스를 예약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일 정도다. 블로그나 인터넷 카페엔 이 애프터눈 티를 다룬 글이 심심찮게 나온다.

◇'이왕가는 천황가의 가족이란 것을 각인’

일제시대 순종의 일본 여행은 별로 알려져있지 않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일지도 모른다. 순종의 일본 방문에 대한 역사학계 평가는 냉정하다. ‘이왕가(李王家)의 공식적 대표인 순종이 동경의 천황가를 방문하여 천황을 알현하고 역대 천황의 사당과 묘소에 참배한 일은, 대외적으로는 식민지 조선이 완전히 일본 제국의 한 일원이며, 이왕가는 천황가의 가족이라는 것을 공식적인 국가의례를 통해 시각적으로 각인시키는 일이었다고 생각된다.’(이왕무, 1917년 순종의 일본 행차에 나타난 행행의례연구, 한국사학보 57, 2014)

한마디로 일제 식민지배에 들러리서는 이벤트에 이용당했다는 것이다. 쓰린 역사의 기억을 안은 채, 교토를 떠났다.

◇참고자료

이왕무, 1917년 순종의 일본 행차에 나타난 행행의례연구, 한국사학보 57, 고려사학회, 2014

정재정, 철도와 근대서울, 국학자료원,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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