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도 안 부럽다!" '추운 나라' 스웨덴 와인이 뜨는 이유

신은별 2024. 4. 6.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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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별의 별의별 유럽: 시즌 2]
④ 북유럽 와인의 성장
편집자주
우리가 알아야 할, 알아두면 도움이 될, 알수록 재미있는 유럽의 이야기를 신은별 유럽 특파원이 한 달에 한 편씩 연재합니다.
스웨덴 남부 스코네에 위치한 '쿨라버그 포도원' 내부에서 관계자가 포도를 살펴보고 있다. 쿨라버그 포도원 제공 ⓒstudiovega

"4월은 스케줄이 좀 빡빡한데요." '블락스타 포도원'을 운영하며 와인을 생산해온 고란 엠네가드(65)는 한국일보의 인터뷰 요청에 달력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늦겨울과 초봄은 포도 농사가 비교적 한가하기에 인터뷰 날짜를 잡기가 비교적 수월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포도 농사 및 와인 생산 비결을 전수해달라는 요청이 많아서 4월에만 두 번이나 해외 강의를 나가야 하거든요."

엠네가드는 소위 '와인 강국'으로 불리는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 국가 출신이 아니다. 와인에 맞는 포도를 키우는 데 필수적인 온난한 기후 등과 거리가 멀어 '와인 산지'로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져 온 스웨덴 출신이다. 농장도 스웨덴에 있다. 그러나 최근 급격히 진행된 지구온난화로 와인 산지가 계속 북상하고 스웨덴 와인 위상이 덩달아 오르면서 엠네가드처럼 '잘나가는' 와인 생산자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기후 위기 덕을 보고 있기에 마냥 달가워할 수만은 없는 북유럽 와인의 성장 이야기를 한국일보가 스웨덴에서 살펴봤다.

스웨덴 플렌에서 '블락스타 포도원'을 운영하며 와인을 판매해온 고란 엠네가드가 지난달 28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사진 촬영에 응하고 있다. 플렌(스웨덴)=신은별 특파원

"주문 밀렸어요" 행복한 스웨덴 와인

엠네가드가 최근까지 운영한 블락스타 포도원은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서 서남쪽으로 140㎞쯤 떨어져 있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스톡홀름에서 차로 2시간가량 달려 도착한 약 288헥타르(285만 ㎡) 규모의 농장에는 여름철 열매가 잘 맺히도록 미리 가지를 정돈해 둔 포도나무가 빼곡했다.

여기서 만든 와인은 스웨덴에서 소비될 뿐만 아니라 해외로도 수출된다. 엠네가드는 "미쉐린 가이드(프랑스 타이어 제조 회사인 미쉐린이 발간하는 미식 레스토랑 목록)에 오른 고객만도 50곳 정도 된다"고 말했다. 유명 레스토랑에서 그의 와인을 구매한다는 건 품질이 어느 정도 보장됐다는 뜻이다. 그의 와인은 세계 5대 와인 품평회인 '오스트리아 와인 챌린지 비엔나'(AWC 비엔나)에서 스웨덴 최초로 '별'을 받기도 했다.

엠네가드가 와인 생산을 시작한 시기는 2000년. 유럽연합(EU)이 스웨덴에 '상업용 와인을 생산해도 된다'고 허가한 해다. 엠네가드는 스웨덴에서 상업용 와인을 처음으로 만든 이 중 하나다. 당시와 비교하면 현재 스웨덴 와인 위상은 천양지차라는 게 그의 말이다. "과거에는 스웨덴에서 와인을 만든다고 하면 의아하다는 반응이 많았어요. '잘되겠어?'와 같은 회의적 반응도 상당했고요. 지금은 스웨덴 와인에 대한 평판과 기대가 엄청나죠." 그는 이번 달 영국, 오스트리아에서 와인 생산 강좌를 한다. "주제요? '추운 지역에서의 와인 생산'이죠."

스웨덴 플렌에 2000년 문을 연 블락스타 포도원 내·외부. 고란 엠네가드 제공

스웨덴 와인 80%가 생산되는 남부 스코네 와인 생산자 이야기도 비슷했다. 스코네에서 '쿨라버그 포도원'을 운영하며 레드·로제·화이트 와인을 두루 생산하는 빅토르 달은 "2015년 약 1헥타르(1만 ㎡) 규모의 작은 포도원을 인수하며 사업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14헥타르(14만 ㎡)나 된다"며 "농장 규모를 키우는 것은 한계가 있는데 수요가 넘치는 게 고민이라면 고민"이라고 말했다.

스웨덴 와인 성장세는 숫자로도 확인할 수 있다. 스웨덴와인협회 등이 지난해 발간한 음료산업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전체 21개 지방자치단체 중 15개 지자체에 와인 산지가 분포해 있다. 와인 생산 업체는 64개인데, 직전 5년 동안 20개가 늘어났다. 추가 투자도 이어지고 있다. 스웨덴 내 주류 독점 판매권을 가진 국영주류업체 시스템볼라겟에서 판매되는 스웨덴산 와인은 300개에 달한다.

그래픽=신동준 기자

성장 배경에는 기후 위기라는 '불행'

스웨덴은 스톡홀름 기준 위도가 약 59도로, 연중 가장 더운 7월에도 평균 기온이 20도 안팎일 정도로 선선하다. 고급 와인 산지의 대명사로 불리는 프랑스 보르도 위도는 44도다. EU 와인 산지 분류 체계를 봐도 스웨덴은 '가장 추운 지역'을 뜻하는 'A존'에 속해 있다. 반면 전 세계 와인 생산의 절반, EU 와인 생산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가장 따뜻한 지역'인 'C존'에 속해 있다.

와인을 생산하기에 적합한 곳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스웨덴은 온실가스 배출 탓에 지구가 뜨거워지면서 와인을 만들기에 괜찮은 지역으로 변신했다. 한국 기상청에 해당하는 스웨덴 기상수문연구소에 따르면, 스웨덴의 1991~2020년 연 평균 기온은 1861~1890년에 비해 1.9도 상승했다. EU 기관인 유럽환경청(EEA)은 올해 초 발간한 보고서에서 "2023년 기온은 산업화 이전보다 1.48도 상승했는데, 유럽은 다른 대륙보다 더워지는 속도가 가파르다"고 지적했다.

스웨덴 기상수문연구소가 2022년 발행한 보고서에 따르면 1991~2020년 연평균 기온은 1861~1890년에 비해 1.9도 상승했다. 위 그래프에서 빨간 막대는 평균 기온보다 높고, 파란 막대는 평균 기온보다 낮다는 뜻이다. 스웨덴 평균 기온이 상승세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상수문연구소 보고서 캡처

정부 간 기구인 국제 포도나무 및 와인 협회(OIV) 회장을 맡았던 모니카 크리스트만(65) 독일 가이젠하임대 교수는 "기후변화가 와인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말했다. "제가 학생이었을 때는 와인 산지의 북상이 위도 50도 정도에서 멈출 것이라 생각했어요. 예측이 틀린 거죠. 우리는 영국, 네덜란드 등에서 고품질 와인을 얻고 있으니까요. 스웨덴 와인 위상도 가파르게 오르고 있죠. 스웨덴 와인에 유일한 걸림돌이 있다면 '소비자 인지도가 아직은 낮다'는 것인데 지금과 같은 성장세라면 또한 금방 극복될 것으로 봅니다."

정부 간 기구인 국제 포도나무 및 와인 협회(OIV) 회장 모니카 크리스트만 독일 가이젠하임대 교수. ⓒWinfried Schönbach

와인 지형을 바꾼 원인이 기후 변화라는 것은 스웨덴 외 다른 북유럽 국가들의 와인 산업도 분주해졌다는 뜻이다. 노르웨이에는 상업용 와인 업체 6개가 생겨났고, 핀란드는 2028년까지 EU로부터 상업용 와인 판매 허가를 받는다는 목표로 관련 절차를 진행 중이다. 스웨덴과 나란히 2000년 상업용 와인 판매 허가를 받은 덴마크는 스웨덴보다 온화한 기후를 바탕으로 더 일찌감치 시장에 자리 잡았다. 한스 뮌터 덴마크와인협회장은 "협회에는 약 1,100명의 회원이 있는데 이 중 125명이 판매용 와인을 생산한다"며 "그러나 취미 등으로 만든 와인을 팔겠다는 회원이 늘어나는 추세라 상업용 와인을 생산하는 이들은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등 전통 강자는 '울상'

북유럽 와인이 웃고 있다는 건 지금까지 와인 산업을 이끌어온 남유럽 와인이 울상을 짓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스페인, 포르투갈 등 남유럽 국가들은 여름철 극심한 폭염, 가뭄 등으로 매년 고역을 겪고 있다. 폭염, 가뭄 등이 대형 화재로 이어지며 포도원이 피해를 입는 사건도 종종 발생한다. 크리스트만 교수는 "와인 생산 방식에 변화를 주기를 꺼려했던, (남유럽의) 보수적인 산지에서도 갑자기 기준·규칙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며 "이는 그들의 위기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했다.

한스 뮌터 덴마크와인협회장이 운영하는 포도원 전경. 본인 제공

EEA가 내놓은 전망은 이렇다. "금세기 중반까지 기후 변화가 남유럽의 포도와 와인의 품질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온도가 높아지면 포도가 더 빨리 익어 설탕 및 알코올의 함량이 높아지고 와인에 신선함을 부여하는 산도가 낮아지기 때문이다. 와인에 떫은맛을 더하는 탄닌 및 기타 화합물이 생성될 시간도 부족해진다." EEA는 남유럽 국가들이 기후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포도 품종과 와인 제조 방식 개발하지 않으면 시장에서 도태될 수 있다고 본다. 기후 변화를 반영해 EU의 와인 관련 규정 등도 재정비가 필요하다고도 주장한다.


북유럽 와인 성장, 어디까지

기후 변화가 북유럽 와인 성장을 이끈 유일한 요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덴마크에서 2015년부터 '베스터하베 포도원'을 운영하며 레드 와인을 주로 생산해온 예스퍼 옌슨은 이렇게 말했다. "기후 변화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데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북유럽) 와인 생산자들이 여러 경험과 노하우를 축적했다는 게 북유럽 와인 성장을 설명하는 데 더 적합한 것 같아요." 서늘한 기후에 맞는 포도 품종이 도입된 점 등도 원인으로 꼽힌다.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더 와이너리 호텔 1층에서 손님들이 와인을 시음하고 있다. 이 호텔은 양조장을 갖추고 있다. 스톡홀름=신은별 특파원

'새로운 와인'에 대한 소비자들의 호기심도 스웨덴 와인 성장을 이끌었다. 와인 양조장을 갖춘 스톡홀름 소재 호텔 '더 와이너리'의 최고경영자(CEO) 클라에스 아네루드는 "스웨덴 관광업의 중요한 추세 중 하나는 스웨덴으로의 와인 관광이 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지난해 호텔 와이너리 견학 프로그램에는 약 3만 명이, 와인 시음 프로그램에는 약 4만 명이 참석했다. 기후친화적 소비 문화가 확산한 것도 스웨덴 내에서 스웨덴 와인 수요가 느는 결과로 이어졌다. 스톡홀름에 거주하는 직장인 잉가는 "먼 곳에서 생산된 와인보다 가까운 곳에서 생산된 와인을 마셔야 탄소 발생량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스웨덴 와인을 마시곤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후 변화가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와인의 품질과 위상을 끌어올린 주요 원인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는 게 양조 및 기후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인간이 현재의 생활 방식을 유지한다면 지구온난화는 계속될 것이기에 북유럽 와인이 앞으로 더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도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다. 스웨덴인 한스는 "와인 산지 북상은 인간이 지구에 저지른 일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스웨덴 와인의 성장을 마냥 반가워할 수만은 없다"고 말했다.

스톡홀름·플렌(스웨덴)= 신은별 특파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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