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평중의 지천하] 나무 심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윤평중·한신대 철학과 명예교수 2024. 4. 6. 03: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주말]
[윤평중의 지천하(知天下)] (1)
일러스트=유현호

뒷산에 오른다. 아침 바람 쌀쌀해도 봄은 훌쩍 곁에 와 있다. 등산로 입구 큰 바위 위에 뿌리 내린 어린 소나무가 맞아준다. 누군가 “아기 소나무야, 잘 자라거라”라는 작은 팻말을 세워 놓았다.

큰 눈이 내린 지난 겨울날, 쌓인 눈을 여린 가지로 이고 있는 아기 소나무를 한참 바라보며 서 있었다. 지나가던 어르신이 소나무를 배경으로 자신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청한다. 언젠가부터 눈에 띈 어린 소나무와 팻말이 궁금하던 참이었다. 우리 동네 등산로는 이 잘생긴 바위를 휘돌아 전망대를 거쳐 정상으로 이어진다.

어르신은 은퇴한 교장 선생님이었다. 사십여 년 봉직하고 퇴임 후 이사 왔다고 한다. 이곳 신도시의 살아 있는 증인이었다. 이 퇴직 교장 선생님이 바위에 아기 소나무를 심고 팻말까지 설치한 분이었다.

원래 송암(松巖)이란 바위 이름을 솔바위로 바꿔 부르고 정성을 기울여 아기 소나무를 돌보아 온 것이다. 그는 소나무와 바위의 생태(生態)를 한참 설명했다. 솔잎 채취를 위해선지 아기 소나무 가지에 손대는 사람들이 있어 팻말을 설치했다고 한다. 어르신은 동네와 등산로 곳곳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었다.

완강히 버티던 겨울도 드디어 퇴각하고 봄꽃들이 맹렬히 진군해 온다. 전망대 체력 단련장 운동과 공원 황톳길 맨발 걷기가 시작됐다. 황토가 아늑하게 발을 감싸안아 준다. 황톳길 구석 지르밟기 공간은 동네 아주머니들의 만남의 장소다.

황톳길에선 전라도 아주머니와 경상도 할머니를 종종 마주친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이분들이 구수한 사투리로 친구들과 이야기보따릴 풀어놓기 때문이다. 쩌렁쩌렁한 목소리 덕분에 댁네 사정에 대해서도 듣게 된다. 사람 내음 가득한 생활의 소리다.

‘공적(公的) 글쓰기’를 잠시 멈췄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본다. 많이 걷고, 많이 먹으며, 많이 읽고 생각하는 칩거와 재충전의 시간이었다. ‘불출호, 지천하(不出戶, 知天下)’는 노자 ‘도덕경’에서 인상적인 문장 중 하나다. ‘집 밖에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안다’는 경지는 불가능한 꿈이겠지만 일단 멋진 목표임이 틀림없다.

지금은 서재에 앉아 인터넷만으로도 세상 돌아가는 사정과 온갖 서물(書物)에 접속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지천하’를 위해선 길을 걸어야 하고 사람들과 만나야 하며 시장에도 가봐야 한다.

이 가운데 빠트릴 수 없는 게 우리 동네를 걷는 것이다. 새벽 산의 고요함, 새소리와 바람 소리도 좋지만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생활의 소리도 산책길의 소중한 도반(道伴·벗)이다. 마음 챙김이나 명상법을 수련하지 않아도 ‘걷기 명상’이 될 수 있다. 하루 만보(萬步) 아닌 느긋한 만보(漫步)로 걸음에 집중하며 심호흡하면서 걷는다. 벤치에 앉아 목을 축이면 정수기 물도 만년설 생수보다 맛있다.

세상을 이해하는 길은 집 가까이에서 시작된다. 큰 것은 작은 것들이 쌓여 이루어진다. 황톳길 맨발 걷기에 이어 찬물로 발을 씻고 천변을 걸으면 청량한 물소리가 동행한다. 설교나 정치 유튜브, 흘러간 옛 노래를 듣는 분들도 지나간다. 이들 모두가 우리 동네라는 내 삶의 근원을 구성한다. 정치(政治·正治)의 본질은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데 있다.

솔바위 아기 소나무를 심고 기르는 그 마음이 세상을 만든다. 우리가 사라진 후에도 아기 소나무는 뒷산 산길 오르는 이들을 오래오래 반길 것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