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이길 수 없다
[아무튼, 레터]
정치는 ‘즉시 고칠 수 있다’는 약속을 판다. 제약회사나 다이어트 업계도 매한가지다. “내년까지 바로잡겠다”보다는 “몇 달 안에 고칠 수 있다”는 말이 더 달콤하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될까? ‘서두름 바이러스’가 문제다. 성직자도 이 유행병을 피할 수 없었나 보다. 오스트리아 어느 몬시뇰이 고백했다. “최근에 기도를 너무 빨리 하고 있다”고.
우리는 점점 더 빨리 보고, 급히 생각하고, 냉큼 말하고, 서둘러 사랑하고, 후다닥 먹는다. 더디면 불안해한다. 클릭이나 터치 한 번이면 끝나는 온갖 기계들에 길든 나머지 세상만사가 그런 소프트웨어의 속도로 흘러가기를 바란다. 일종의 중독이다. 균형 회복을 위해 종종 브레이크를 밟아줘야 한다. 느린 것이 때로는 아름답다.
춘래불사춘. 봄이 왔지만 봄 같지가 않았다. 지난 주말 서울 여의도 벛나무들은 꽃망울을 열지 않았다. 예상과 달리 개화가 더뎠다. 작년 봄에는 꽃이 일찍 핀 탓에 정작 벚꽃축제 기간엔 가지가 앙상했는데, 올해는 일정을 앞당기는 바람에 또 ‘벚꽃 없는 벚꽃축제’가 된 것이다. 전국의 축제 실무자들은 벚나무를 바라보며 얼마나 속이 탔을까.
아마도 하늘을 원망했을 것이다. 인공지능(AI) 시대에 벚꽃 개화일조차 예측하지 못할 만큼 자연은 불가항력적이고 인간은 취약하다. 우왕좌왕하는 우리를 벚나무가 시치미 뚝 떼고 내려다보는 것 같다. 자연(自然)은 한자 그대로 ‘스스로 있는 존재’. 그 초월적인 존재 앞에서 속도에 대한 숭배를 거두게 된다. 겸허해진다.
벚꽃 없는 벚꽃축제 사태 와중에 속초시청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순발력을 보여줬다. 축제로 예고한 지난 주말에 개화가 더디자 이번 주말에 축제를 한번 더 열기로 한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버텨라. 벚꽃이 필 때까지 축제는 계속된다. 하늘을 이길 수 없다”고 정직하게 고백했다. 결론은 그렇다. 하늘을 이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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