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충신의 쓴소리 간신의 단소리

이남석 발행인 2024. 4. 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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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 61
53세에 지독한 고문 당한 순신
불통 튈까 전전긍긍한 지인들
구명활동 멈추지 않은 이억기
명분과 실리 노린 선조의 선택

어떤 권력자든 쓴소리를 하는 이를 옆에 둬야 한다. 간신은 달콤한 말을 하지만, 충신은 세상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전달해서다. 정유재란을 앞두고 이순신을 체포한 선조의 옆엔 강직한 신하가 별로 없었다. 그러다 보니 조선이란 배는 언제나 민심과 반대 방향으로 갔다. 이는 조선에만 국한한 말이 아니다. 현시점에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측근을 보면 리더의 성공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네가 적장 가등청정에게 뇌물을 받고 사로잡지 않고 놓아 주었지? 바로 자백하라!" 윤근수가 다그쳤다. 이순신은 "나는 할 말을 다 하였소"라며 입을 닫아버렸다. "고문을 시작하라!" 윤근수가 소리치자 금부관리들은 이순신에게 주리를 틀기 시작했다. 두 다리의 살이 터져 피가 줄줄 흘러내렸고, 정강이뼈는 허옇게 드러나 보였다. 사천대첩에서 적의 총알에 맞았을 때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이순신이 두 눈을 감고 입을 열지 않자 이번엔 벌겋게 달아오른 인도引刀로 순신의 넓적다리를 찢었다. 이순신의 얼굴빛은 변함이 없었다. 윤근수가 소리를 질렀다. "저자는 말을 달리다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도 다시 말을 타고 달린 독한 놈이야. 고문을 멈춰라!" 잠시 후 이순신은 기절을 하고 말았다.

6년 동안이나 전쟁터에서 노심초사하며 충심의 열정을 바쳤던 터라 쇄약해진 53세의 몸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문의 악형을 당하니 어찌 분하지 않으랴! 이순신은 그날 밤 옥중에서 끙끙 앓았다. 명나라의 양동지가 이순신을 염려해 옥문 밖으로 찾아와 위문하고 약과 가루약을 전했다. 금부의 옥사들도 이순신을 동정해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선조는 권력욕이 매우 강한 인물이다. 그래서 시기심과 질투심이 많고, 아부하는 자를 좋아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토사구팽을 시전하기도 한다. 무능하고 겁이 많은 만큼이나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는 치밀하고 눈치 빠르게 행동한다. 덕분에 전쟁을 겪었음에도 조선왕조 가운데 두번째로 오랜 기간 권세를 유지했다.

그러니 이순신은 죽은 목숨과 다를 바 없었다. 선조는 이순신이 잡혀온 지 9일 만인 1597년(정유년) 3월 13일에 이런 명령을 내렸다. "이순신이 조정을 기만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이고, 적을 놓아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이며, 심지어는 남(원균)의 공을 가로채 남을 무함하기까지 해 법으로 용서할 수 없으니 죽어 마땅하다. 형벌을 끝까지 시행해 실상을 캐내려 하는데 어떻게 처리할지 대신들에게 하문하라." 한마디로 '죽을 때까지 형벌을 시행하라'는 것이다.

그러니 한양에선 이순신의 인척, 지인, 옛 부하들이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혹여 자신들의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을까 두려웠던 거다. 오직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진심으로 마음을 쓸 뿐이었다.

선조는 이순신을 향한 세상이 목소리를 끝내 외면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이억기의 부하군관이 인삼탕과 서신을 들고 이순신을 찾아왔다. 이런 그에게 이순신은 자신의 말을 이억기에게 전해달라고 당부했다. "다시는 내왕을 하지 마시오. 혐의를 받을 것이요. 내가 죽으면 영감밖에 수군을 맡을 사람이 없소. 나를 생각하지 말고, 나랏일을 위해서 영감의 몸을 생각하시오. 왜국 수군이 전라우도 바다를 범할 날이 머지않으니 대비하시오."

이 말을 들은 부하군관은 이억기가 보낸 서간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이억기가 보내온 내용은 이랬다. "지금 통제사 원균의 방략을 보니 수군이 오래지 않아 반드시 패할 것 같습니다. 저희는 죽을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今觀主帥元公之制置方略則 舟師不久必敗 我輩不知其死所矣)." 그랬다. 이순신 대신 통제사가 된 원균은 수군에게 믿음을 줄 만한 능력과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이억기는 이순신의 당부에도 구명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과 친분이 있는 병조판서 이항복과 경림군 김명원에게 서간을 보내 이순신의 억울함을 알렸다. 송희립, 황대중 등 이순신의 부하군관들도 구명활동에 가세했다. 한산도에서 1000리 길인 한양까지 찾아와 이순신의 원통하고 억울한 사유를 읍소했다.

그 무렵, 윤근수는 선조에게 아뢰었다. "이순신을 아무리 고문해도 실토를 하지 아니하오니 유죄무죄를 알 수 없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영의정 류성룡은 묵묵하게 침을 삼키고 있었다. 대부분의 대신들은 "이순신을 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경림군 김명원이 나섰다.

"왜인의 배 타는 기술이 제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가등청정이 어찌 7일 동안이나 섬에 걸려 있었겠습니까? 아마도 순신의 죄는 무고인 듯합니다." 김명원의 말을 들은 선조는 고개만 끄덕였다.

3월 그믐날쯤이었다. 정탁이 선조에게 '신구차伸救箚(구원을 위해 올리는 상소)'를 올렸다. 그의 신구차는 이순신의 목숨을 건져내는 결정적인 '한방' 역할을 했다.

"엎드려 아룁니다. 이순신은 죄명이 심히 엄하나 성상께서 즉시 벌하지 아니하심은 혹 그를 살릴 수 있는 길을 보이신 것입니다. 무릇 죄인이 심문을 거친 후 목숨이 끊어지면 어찌할 길이 없으므로 신은 안타깝게 여겨왔습니다.

이제 순신은 형벌을 겪었는데 만약 또 형벌을 가하면 산다고 보장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임진년에 왜적의 배가 바다를 덮어 세력이 하늘까지 치솟았을 때 성城을 버린 신하가 많습니다. 이런 와중에 수군은 적의 예봉을 꺾음으로써 민심의 동요를 막고 생기를 얻게 했습니다.

의병을 일으킨 자들은 기운을 돋우고 적에게 붙었던 자들도 마음을 돌렸습니다. 이순신의 공로야말로 참으로 컸으므로 벼슬을 더해주고 통제사의 소임을 내렸습니다. 하물며 순신과 같은 장수의 재질을 가진 자는 수륙전의 재주를 모두 겸비해 못 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런 인물은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변방 백성들이 바라는 자요, 왜적들이 무서워하는 자입니다. 만일 공과 죄를 견주어 보지도 않고 끝내 큰 벌을 내린다면 공이 있는 자는 권하지 않을 것이요 능력이 있는 자는 애쓰지 않을 것이니 도리어 적국에 다행스러운 일이 되고 말 겁니다. 한 사람 순신 죽음은 아깝지 않으나 나라에 관련돼 있는 것들이 가볍지 아니하니 어찌 중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임진왜란 당시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했고, 우의정까지 지낸 72세의 국가원로가 혼신을 다해 쓴 명문장이었다.

나랏일이야 어찌 됐든 나만 만족하면 그만이라는 무리들, 당색의 비위만 맞춰 내 벼슬길이나 올라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무리, 내 공을 드러내기 위해 모함하는 무리, 이순신 같은 충신을 제거하려고 했던 사간원·사헌부·홍문관·승정원의 무리, 겉과 속이 다른 부패한 무리는 정탁의 상소에 맞서지 못했다.

눈치 빠른 선조는 정탁의 신구차를 읽으며 크게 기뻐했다. 정탁의 글에서 '명분과 실리'를 한꺼번에 도모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았기 때문이다. 우선, 이순신을 살려주면 '민심을 챙긴다'는 확실한 명분이 선다. 때마침 선조는 재임 30년째를 맞고 있었다. 특사로 풀어주면 당연히 왕의 체면도 돋보인다. 게다가 만약의 사태가 일어날 경우 원균을 대체할 장수로 이순신 만한 인물이 어디에 있겠는가. 실리 측면에서도 전혀 나쁠 게 없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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