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미술래잡기] 변화하는 세계지도

2024. 4. 5.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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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계 伊 미술가 보에티
45년전 현지 장인들에 의뢰
자수로 만든 세계지도 작품
現국가와 비교하면 차이 커
한국은 국내 갈등 뉴스로 도배
세계의 변화로 눈·관심 돌려야
알리기에로 보에티 '지도'

모든 미디어가 오로지 국내 정치 뉴스로 도배돼 있다. 다음주가 선거이니 당연하면서도, 희망찬 메시지는 들리지 않고 반대로 누가 무슨 막말을 했고 누가 재산을 어떻게 증식했는지 세세하게 전해 들으면서 피로와 짜증만 쌓여갈 뿐이다. 총선철이라 유독 그렇기는 하지만 평소에도 우리는 국내 현안에만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며 산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우주에서 본 지구는 '블루 마블'에 불과하고, 이 지구에서도 우리나라는 너무나 작다. 세계지도를 볼 때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작은지 확인하면서 어쩌다 우리는 요렇게 작은 나라에 태어나게 되었는지 아쉽기도 하고, 그 와중에 우리가 얼마나 억척스럽게 열심히 여기까지 커왔는지 숙연해지기도 한다.

여기서 독특한 세계지도를 하나 소개할까 한다. 지면상으로는 확인하기 힘들지만, 이탈리아의 유명한 개념미술가 알리기에로 보에티가 아프가니스탄의 자수장들에게 의뢰해서 한 땀 한 땀 수놓은 지도다. 보에티는 자신이 18세기에 예카테리나 대제의 러시아에 저항한 체첸의 지도자 셰이크 만수르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뿌리를 찾아 1970년대부터 아프가니스탄 등 아시아 지역을 자주 방문했고 지역민들과 교류하였다. 보에티는 각 나라의 국기로 영토를 표시하는 세계지도를 만든다는 아이디어만 내고, 제작은 서아시아 지역의 전통 자수 기법으로 장인들이 마음대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제안했다. 이는 위대한 미술가 한 명이 번쩍이는 창의력으로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예술가의 신화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교양 있는 사람만 즐긴다고 여겨지는 고급 미술과 다소 수준이 낮은 공예 사이의 경계도 지우는 획기적인 제작 기법이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세계지도와 비교해 가장 큰 특이점이라면 분홍빛 바탕색일 것이다. 보에티는 아프가니스탄을 처음 방문한 1971년부터 세상을 떠난 1994년까지 약 150개의 세계지도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때마다 협업한 장인들은 자기 취향이나 기분에 따라, 혹은 보유한 실의 색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바다를 표현하였다. 온전히 내륙으로만 이뤄진 나라에 살면서 바다를 실제로 본 적이 없는 아프가니스탄인들이 마음대로 고른 바다 색은 그래서 어떨 때는 이렇게 생경한 색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보에티는 질서와 혼돈, 서양과 동양, 논리와 우연 등 세상의 대립항에 관심이 많았는데, 국제정치학의 상징체로서 세계지도를 소재로 다루면서도,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완전한 우연의 법칙으로 만들어지는 이런 작품을 통해 예술 감각이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갖고 저절로 발현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79년 소련의 침공으로 아프가니스탄 지인들과 연락이 두절된 보에티는 낙담하며 지도 작업을 중단했었는데, 몇 년 뒤 그들이 파키스탄 페샤와르 지역으로 이주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후 1980년대부터는 파키스탄을 드나들면서 계속 지도를 만들었다. 보에티의 작업에서 미국이나 브라질, 중국처럼 땅덩어리가 큰 나라들은 국기의 대부분을 보여줄 수 있지만, 국토가 작은 나라라 할지라도 국기의 어느 한 부분이 드러나도록 고안돼 있어 한반도는 태극 문양이 남쪽을, 인공기의 일부분이 북쪽을 차지한다. 이 지도는 1979년 작품으로 아직 소련이 붕괴하기 전이라 거대하게 붉은 유라시아 대륙이 보이고, 당연히 현재의 우크라이나처럼 소련에서 독립하게 되는 나라들은 아직 없다. 또한 이슬람 국가인 아프가니스탄에서 인정하지 않는 이스라엘도 존재하지 않는다.

45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가 견고하다고 믿고 공부하는 세계지도가 계속 바뀌었다는 것도, 또한 현재의 굵직한 국제적 현안들과 지속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것도 모두 놀랍지 않은가. 보에티가 마지막 지도 작업을 한 지도 30년 정도가 지났다. 우리가 아는 세계는 과연 얼마나 더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까. 세상은 너무나 크고 매우 빠른 속도로 매일 변화하고 있다. 기후위기나 인공지능(AI)의 도래처럼 인류의 존치를 위협하는 더 큰 문제가 산적해 있는데, 누군가의 어이없는 한마디 한마디에 아까운 에너지를 빼앗기는 일은 이제 더 이상 그만하고 싶다.

[이지현 OCI미술관장(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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