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을 빛낸 깜짝 스타들(2) 파이널4 최다 득점은 정치인!

최연길 칼럼니스트 2024. 4. 5.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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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최연길 칼럼니스트]농구는 5명이 함께 하는 팀 스포츠이기 때문에 단 한 명만의 활약으로는 한계가 있다. 도와주는 선수들도 필요하다. 그래서 원맨팀이 우승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하지만 한 명의 슈퍼스타가 맹활약하며 소속팀을 신데렐라로 만드는 경우가 있다. 지난 편에 이어 이번에도 맹활약을 펼치며 16강 혹은 8강, 경우에 따라서는 4강 이상으로 팀을 올린 슈퍼스타들을 찾아보자.

 

1.스테픈 커리 (2008년 데이비슨, 엘리트 8)
현역 NBA 최고 스타인 스테픈 커리(188cm, G)도 NCAA 토너먼트가 배출한 깜짝 스타다. 커리는 작은 신장과 깡마른 체격, 부족한 힘 탓에 자신이 간절히 입학을 원했던 버지니아 공대에서 장학금 제의를 받지 못했다. 버지니아 공대가 아버지 델 커리의 모교였음에도 말이다. 커리가 노스캐롤라이나州 샬럿에 거주하고 샬럿 크리스천 스쿨을 다녔음에도 노스캐롤라이나 , 노스캐롤라이나주립, 듀크, 웨이크 포레스트 등 명문에서는 입학 제의를 받지 못했다. 결국 커리는 샬럿 인근의 데이비슨의 입학제의를 받아들여야 했다.

2006년 11월10일(이하 현지시간) 이스턴 미시건과의 홈경기에서 커리는 3점슛 3개 포함, 15점 5리바운드 3점슛 3개(턴오버도 13개!)를 기록하며 성공적인 NCAA 데뷔를 했다. 1학년 때 34경기에 출전했고 그중 33개에서 선발로 나선 커리는 경기당 30.9분을 뛰며 21.5점 4.6리바운드 2.8어시스트, 3점슛 성공률 40.8%, 자유투성공률 88.5%를 기록했다. 커리의 활약을 앞세운 데이비슨은 29승 4패, 서던컨퍼런스 17승 1패에 서던 컨퍼런스 토너먼트 우승으로 NCAA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하지만 13번 시드라는 낮은 시드를 받은 데이비슨은 4번 시드 매릴랜드에게 70-82로 패하며 1라운드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래도 커리는 경기당 30점 4리바운드 3어시스트 3스틸 3점슛 5개로 분전하며 빅댄스 첫 경기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2007-2008시즌은 커리의 인지도를 크게 높이는 시즌이었다. 커리가 속한 데이비슨 대학은 약체였고 당시 데이비슨 대학은 서던 컨퍼런스(현재는 애틀랜틱 10 컨퍼런스라는 조금 더 나은 컨퍼런스로 이전)라는 매우 약한 컨퍼런스 소속이었다. 따라서 커리가 약한 팀에서 약체들을 상대로 제아무리 30, 40득점을 넣어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데이비슨의 중계는 명문 노스 캐롤라이나와의 경기쯤 되어야 ESPN에서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서던 컨퍼런스에서 20전 전승으로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한 데이비슨은 26승 6패라는 좋은 성적에 서던 컨퍼런스 토너먼트 우승까지 거두며 NCAA 토너먼트 자동출전권을 따냈다. 하지만 약체라는 이유로 AP 폴 23위까지 올랐던 데이비슨 대학은 중서부 지역 10번 시드라는 낮은 시드를 받았다.

데이비슨 대학의 빅 댄스 첫 상대는 7번 시드 곤자가였다. 당시 곤자가는 제레미 파고, 오스틴 데이, 로버트 사크레 등 NBA에 진출할 유망주들과 창원 LG 세이커스에서 뛰었던 맷 불딘까지 버티는 강호였다. 하지만 데이비슨은 무려 40점 3리바운드 2어시스트 5스틸 3점슛 6개를 터뜨린 커리의 활약으로 강호 곤자를 82-76으로 물리쳤다. 2라운드 상대는 2번 시드이자 전통의 강호 조지타운이었다. 조지타운은 218cm의 거인 센터 로이 히버트를 축으로 다후안 서머스, 버논 매클린, 크리스 라이트, 패트릭 유잉 주니어 등 NBA 진출 선수만 5명이 포진하고 있었다. 2라운드에서도 커리는 30점 3리바운드 5어시스트 3점슛 5개를 올리며 20점 5어시스트를 도운 제이슨 리처즈와 함께 74-70으로 신승했다. 

 

16강 상대는 수비력이 강한 위스컨신이었다. 위스컨신은 마커스 랜드리, 그렉 스팀스마, 존 루어 등 있어 골밑이 매우 강한 팀이었다. 이 경기에서 커리는 33점 3리바운드 4어시스트 4스틸 3점슛 6개로 맹활약했고 데이비슨은 73-56으로 승리하며 8강에 올랐다. 무려 39년 만에 8강이었다. 또한 커리는 전년도 64강 포함, NCAA 토너먼트 첫 4경기에서 모두 30점 이상을 올렸다. 이는 클라이드 러블릿, 제리 채임버스, 글렌 로빈슨 등 전설적인 선수들에 이어 4번째 달성한 대기록이었다. 8강 상대는 1번 시드인 명문 캔자스였다. 당시 캔자스는 대럴 아서, 브랜든 러시, 마리오 찰머스, 셰론 콜린스, 샤샤 컨, 콜 알드리치 등 NBA 진출 선수만 무려 7명이나 포진한 팀으로 결국 우승까지 차지한 강호였다. 커리는 강호 캔사스를 상대로 25점 4리바운드 3어시스트 1스틸 3점슛 4개로 분전했지만 전반적인 야투성공률이 36%(9/25), 3점슛 성공률 25%(4/16)에 그치며 8강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커리는 토너먼트 맹활약으로 자신의 가치를 크게 높였다. 

 

3학년이 된 커리는 평균 28.6점 4.4리바운드 5.6어시스트 2.5스틸로 분전했지만 데이비슨은 NCAA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했다. 결국 커리는 2009년 NBA 드래프트 진출을 선언했고 1라운드 7순위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지명을 받았고 2010년대 NBA를 접수했다.

2. 키스 스마트(1987년 인디애나, 우승)
키스 스마트라는 이름은 NBA 중수분들 정도는 기억할 것이다. 오랫동안 NBA에서 어시스턴트 코치를 지냈고 2003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감독 대행을 시작으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새크라멘토 킹스에서도 감독을 지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스마트는 선수로는 크게 성공하지 않았다. 1988년 NBA 드래프트 2라운드 41순위로 뽑혔지만 1988-1989 시즌 샌안토니오 스퍼스에서 단 2경기만 뛰고 경기당 1점 0.5리바운드 1어시스트를 기록하는데 그쳤다. 185cm의 포인트가드였던 스마트는 가든 시티 커뮤니티 컬리지를 졸업하고 1986년 전통의 명문 인디애나 에 편입했다. 당시 인디애나는 전설적인 명장 밥 나이트가 지휘봉을 잡고 있었고 대학 최고의 슈터 스티브 알포드, 향후 NBA에서 케빈 가넷과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에서 뛰었던 센터 딘 개럿, 릭 캘러웨이 등이 있었다.

24승 4패로 AP 폴 3위였던 인디애나는 중서부 지역 1번 시드로 1987년 NCAA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스마트는 32강 오번과의 경기에서 20점 9리바운드 15어시스트로 트리플더블급 활약을 펼쳤고 16강 듀크와의 경기에서도 21점 7리바운드 3어시스트로 맹활약했다. 파이널 4 UNLV 전에서도 14점 2리바운드로 활약한 스마트는 시라큐스와의 결승전에서는 인생경기를 펼친다. 당시 시라큐스 대학은 셔먼 더글라스, 로니 사이컬리, 데릭 콜먼, 스티븐 탐슨이 버티는 우승후보 0순위였다. 경기는 끝까지 엎치락뒤치락 접전이었다. 경기 종료 28초전 시라큐스 가 73-72로 앞서고 있었고 공격권까지 지닌 상황, 인디애나의 나이트 감독은 자유투가 약한 사이컬리에게 파울 작전을 지시했다. 하지만 사이컬리는 공을 잡지 않았고 1학년 콜먼에게 파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자유투가 모두 1&1이었는데 콜먼은 1구를 놓쳤고 인디애나가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종료 1초전 스마트는 1982년 같은 루이지애나 슈퍼돔에서 마이클 조던이 결승골을 넣었던 바로 똑같은 장소 똑같은 지점에서 결승골을 터뜨리며 74-73, 극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이날 21점 5리바운드 6어시스트를 기록한 스마트는 당당히 MOP(Most Outstanding Player)를 수상했다.

3. 존 월러스 (1996년 시라큐스, 준우승)
NCAA 토너먼트에서 스타 한 명의 활약으로 우승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 커리도 웨이드, 채임벌린도, 보 킴블도 아무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승에 근접했던 적은 몇 번 있다. 그 중에 한 명이 바로 존 월러스(203cm, F)다. 1995-1996 시즌 시라큐스의 전망은 전 시즌보다 나아지지 않았다. 간판스타였던 로렌스 모튼이 졸업 후 NBA에 진출했고 특출한 신입생 영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라큐스는 무너지지 않았다. 명장 짐 뵈하임의 지도하에 24승 8패를 기록한 시라큐스는 AP 폴 15위에 오르며 무난히 서부 지역 4번 시드로 토너먼트에 올랐다. 사실 시라큐스는 당시 멤버 중 NBA에 진출한 선수는 월러스 하나일 정도로 빈약해 보였다. 하지만 승승장구했다. 1라운드에서 몬타나 주립은 88-55, 2라운드에서 드렉슬 은 69-58, 16강에서 조지아를 83-81로 물리친 시라큐스는 8강에서 2번 시드 캔자스마저 60-57로 꺾고 파이널 4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캔자스학에는 레이프 라프렌츠, 폴 피어스, 잭 본, 스캇 폴라드 등 NBA 선수들이 즐비했다.

4강 상대는 역시 돌풍을 일으키고 파이널 4에 오른 남동부 지역 5번 시드 미시시피 주립이었다. 미시시피 주립에는 에릭 댐피어, 대릴 윌슨, 그리고 KBL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포워드 단테 존스가 있었다. 이날 월러스는 21점 4리바운드를 기록하며 16점 6리바운드를 올린 존스에 판정승을 거뒀고 시라큐스는는 77-69로 승리하며 1987년 이후 9년 만에 다시 결승전에 올랐다. 결승상대는 전미 1위였고 동부 지역 1번 시드였던 매사추세츠를 물리치고 결승에 오른 중서부 지역 1번 시드 켄터키였다. 당시 매사추세츠와 켄터키의 준결승은 사실상 결승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토니 델크, 앤트완 워커, 월터 맥카티, 데릭 앤더슨, 론 머서 등 NBA에 진출하는 선수들만 무려 9명이나 포진한 켄터키는 올해의 선수에 뽑힌 마커스 캠비의 매사추세츠를 81-74로 잡고 우승에 도전했다.

당초 일방적일 수 있다는 예상과 달리 시라큐스는 선전했다. 전반을 33-42, 9점 차까지 뒤졌던 시라큐스는 월러스의 맹활약을 앞세워 한때 2점 차까지 접근하는 등 켄터키의 간담을 서늘케 만들었다. 하지만 델크가 3점슛 7개 포함, 24점, 1학년 머서가 3점슛 3개 포함, 20점을 올리는 등 3점이 폭발한 켄터키가 시라큐스 대학의 끈질긴 추격을 뿌리치며 76-67로 승리했다. 월러스는 29점 10리바운드 3점슛 2개를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시라큐스는 켄터키에 우승을 내줬지만 월러스는 조지아와의 16강에서 30점 15리바운드를 올리는 등 당시 토너먼트 6경기에서 21.8점 8리바운드 3점슛 성공률 53.8%(7/13)을 기록했다. 이 엄청난 활약을 바탕으로 NBA 드래프트 주가를 한층 높였다.

4. 아티스 길모어 (1970년 잭슨빌, 준우승)
1970년대 미국 농구는 역시 걸출한 센터들이 즐비한 시대였다. 말년의 윌트 채임벌린을 위시해 카림 압둘자바, 윌리스 리드, 밥 르니어, 빌 월튼, 데이브 코웬스, 모지스 말론, 밥 맥카두, 웨스 언셀드, 월트 벨라미, 네이트 써먼드 등 엄청난 센터들이 NBA, ABA, 그리고 NCAA 무대를 주름잡았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선수 중 하나는 아티스 길모어다. 218cm, 109kg의 거구에 왼손잡이 그리고 좋은 운동능력과 기동력 그리고 채임벌린과 비교되는 괴력까지 길모어는 당대 최고 센터들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가드너-웹 전문대를 졸업한 길모어는 1969년 잭슨빌로 편입했다. 잭슨빌은 1960년대 말 NAIA에서 NCAA 디비전 I으로 올라온 무명대였다. 당시 잭슨빌은 소속 컨퍼런스도 없던 독립팀(Independent)이었다. 하지만 길모어의 가세로 4학년생으로 향후 NBA에 진출하는 렉스 모건-길모어라는 원투펀치를 앞세워 강호로 성장했다. 경기당 26.5점 22.2리바운드 야투성공률 58%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둔 길모어의 활약으로 잭슨빌은 23승1패를 기록하며 AP 폴 6위에 올랐고 25개 팀이 겨루는 NCAA 토너먼트에 올라 중동부 지역에서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25강에서 웨스턴 켄터키를 109-96로 잡고 16강에서 아이오와를 104-103으로 꺾은 잭슨빌은 8강에서 전통의 명문 켄터키 대학도 106-100으로 잡고 파이널 4에 올랐다.

파이널 4 상대는 간판스타 밥 르니어가 부상으로 빠진 세인트보나벤처였다. 길모어는 르니어가 빠진 골밑을 장악하며 29점 21리바운드를 올렸고 잭슨빌은 91-83으로 승리하며 사상 처음으로 오른 NCAA 토너먼트에서 결승에 오르는 이변을 일으켰다.

결승 상대는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를 풍미한 강호 UCLA였다. 디펜딩 챔피언 UCLA는 시드니 윅스(203cm), 스티브 패터슨(206cm), 헨리 비비(185cm) 등 향후 NBA 선수가 5명이나 포진했고 명장 존 우든의 지휘하에 짜임새가 좋은 팀이었다. 결국 잭슨빌은 길모어가 19점, 16리바운드로 분전했지만 UCLA에게 69-80으로 패하며 유일한 파이널 4 무대에서 준우승에 그쳤다. 하지만 길모어는 토너먼트 5경기에서 26.4점 18.6리바운드로 맹활약하며 무명 잭슨빌 대학의 돌풍의 주역이 되었다.  


5. 빌 브래들리 (1965년 프린스턴, 3위)
빌 브래들리는 농구 역사상 가장 괴이한 선수다. 듀크에 입학했다가 정치인이라는 자신의 꿈을 위해 재수를 선택해 프린스턴에 입학했고 대학 농구를 평정한 후 로즈 장학생으로 영국의 명문 옥스퍼드에서 2년 동안 정치한 석사 학위를 딴 후 NBA에 진출해 뉴욕 닉스를 1970년과 1973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뉴저지州 상원의원으로 뽑혀 오랫동안 활약하다 2000년 민주당 대통령 경선 후보로 나서 엘 고어 부통령과 맞섰기도 했다.

브래들리는 4학년이던 1964-1965시즌 아이비리그의 명문 프린스턴을 19승 5패로 이끌었다. 아이비리그에서는 13승 1패로 1위를 차지한 프린스턴은 당시 아이비리그는 컨퍼런스 토너먼트가 없었고 자연스럽게 자동출전권을 얻어 NCAA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당시 프린스턴은 브래들리가 경기당 30.5점 11.8리바운드 야투성공률 53.3%를 기록하며 팀을 홀로 이끌었고 나머지 선수 중 평균 10점을 넘는 선수는 없었다.

동부 지역 1라운드에서 펜실베니아 주립대에게 60-58로 승리한 프린스턴은 2라운드에서도 전통의 명문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를 66-48로 잡았다. 동부 지역 결승에서 브래들리가 무려 41득점 13리바운드를 올린 프린스턴은 프로비던스마저 109-69, 40점 차로 대파하며 개교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 파이널 4에 올랐다. 파이널 4 상대는 역시 명문 미시건이었다. 케이지 러셀 등 향후 NBA 선수 4명이 포진한 강호였다. 프린스턴은 브래들리가 29점 7리바운드로 분전했지만 미시건에 76-93으로 무너졌다. 하지만 당시는 3, 4위전이 있었다. 3, 4위전 상대는 위치타 주립대였다. 3, 4위전에서 브래들리는 아직도 깨지지 않는 파이널 4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인 58점 17리바운드라는 놀라운 활약을 펼치며 프린스턴을 전미 3위에 올려놓았다.

브래들리는 토너먼트 5경기에서 경기당 35.4점 11.4리바운드 야투성공률 57% 자유투성공률 92.2%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남겼다. 이런 브래들리의 맹활약에 고무된 뉴욕 닉스는 2년을 기다려야 함에도 망설임 없이 1965년 지역 연고 드래프트 지명권을 브래들리에게 행사했다.

 

#사진캡쳐=데이비슨대 체육부, e-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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