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에 들어서는 순간, 시간여행 시작되는 곳: 창비부산

이민우 기자 2024. 4. 5.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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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서점 창비부산
시간 멈춘 듯한 건물 속
창비 역사 담긴 문화공간
1927년부터 1980년 거쳐
2024년까지 역사 관통
창비 부산은 한국의 근대,현대사가 모두 담겨 있다.[사진=Lab.리터러시]

도심 한복판에 매일매일을 새롭게 기록하는 역사책이 서 있습니다. 국가등록문화재인 옛 백제병원에 만들어진 출판사 창비의 문화공간 '창비문화'입니다. 젊은 작가의 작업 공간을 재연한 방과 세월을 품은 '창작과비평' 잡지들, 그리고 1920년대 옛 건물이 함께 있다는 건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경험을 선물합니다. 더스쿠프 Lab. 리터러시팀이 이곳에 가봤습니다.

부산역 7번 출구로 나가 5분쯤 걷다 보면, 시간이 멈춘 듯 이질적인 건축물을 나타납니다. 붉은 벽돌로 지은 이 건물은 옛 백제병원이라고 불립니다. 처음 세울 땐 5층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4층만 남아 있습니다.

그저 낡은 건물 같지만 아닙니다. 이 건물은 국가등록문화재입니다. 1927년에 지어서인지 그 시대 특유의 건축양식이 눈에 띕니다. 벽돌색도 특별하지만 둥근 아치형 문과 창문, 그리고 틀을 깨는 건물의 모양은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건축물입니다. 오늘 더스쿠프 Lab. 리터러시팀이 찾아갈 곳은 이 건축물 안에 있는 창비의 문화공간 '창비부산'입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오랜 시간을 견딘 목재 계단과 바닥이 1927년도 개원 당시 병원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무료 개방이어서 누구든 편하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벽과 계단 여기저기에는 조심스럽게 걸어달라는 쪽지들이 붙어있습니다. 오직 벽돌과 나무로 이뤄져 있다는 이 공간에선 시간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건물은 '부산 최초의 근대식 개인종합병원'이었습니다. 1932년 폐원 후엔 중국요리집을 거쳐 일본 아카즈키 부대의 장교 숙소(1942년)로 사용했습니다. 광복 후 부산 치안사령부, 중화민국 임시대사관으로도 쓰였으니 한국의 근현대사를 그대로 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조심스럽게 걸어달라"는 안내문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방문한 날에는 「고양이 해결사 깜냥」을 쓴 작가의 방을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작가의 고민과 노력을 다양한 그림, 교정지, 인터뷰를 통해 엿볼 수 있었습니다.

[사진=Lab.리터러시]

이곳은 일종의 문화공간으로 작가와의 만남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중앙홀에는 다양한 책이 가득합니다. 열람용 책과 판매용 책 을 따로 구분했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문예지 '창작과비평'의 옛 책들이었습니다. 고즈넉한 작가의 서재처럼 꾸민 곳에 옛 '창작과비평' 잡지들을 모아놨습니다. '창작과비평'은 1966년 1월 창간해 1970년에서 1990년대까지 이뤄진 민주화 운동을 대표하는 잡지입니다.

1975년 봄호에 실린 '빈 산''1974년 1월' 등 김지하의 시와 백낙청이 쓴 '민족문학의 현단계'는 당시 군사정권이 문제작으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군사정권은 '창작과비평'의 판매 자체를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1977년엔 리영희 교수와 발행인 백낙청 교수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연행했고 1980년 7월에는 신군부가 강제 폐간하기도 했습니다.

젊은 작가의 방과 세월을 품은 잡지, 그리고 1927년에 지은 건물이 함께 있다는 건 1927년부터 1980년을 거쳐 2024년의 역사가 관통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거친 근현대사를 힘겹게 살아온 인물이 이곳에 존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중앙홀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간에선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작가부터 부산 시민들까지 누구나 여기서 창작하는 게 가능합니다. 특히 부산 작가들의 책만 모아놓은 '부산작가의 서재'는 독특합니다. 부산 시민과 작가가 한곳에 모이는 문화적 공간이자 부산의 근현대사가 쌓여 있는 장소입니다.

'창비부산'은 단순한 책방이 아닙니다. 시간을 넘나드는 문화 산책로와 같습니다. 건축물 자체가 하나의 살아 있는 역사책처럼 과거 부산의 생활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에게는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창비부산에는 나만의 역사가 담겨져 있다. [사진=Lab.리터러시]

벽돌과 목재, 그리고 오래된 창문은 모두 이 건물이 겪어온 시간의 층위를 드러냅니다. 여기에 더해진 창비의 문화적 감성은 현대적인 해석과 함께 과거와 현재의 조화를 이룹니다.

도시의 역사적 맥락은 살아 있는 생명처럼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가 있습니다. 저에게 '창비부산'은 하나의 살아있는 역사책이었습니다. 방문자들은 이곳에서 독특한 경험을 쌓으며, 자신만의 이야기 태피스트리(tapestry·여러 색실로 그림을 짜넣은 직물)를 직조해 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창비문화'가 바라는 살아 있는 '나만의 역사'일지 모릅니다.

이민우 더스쿠프 기자
lmw@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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