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바오의 ‘엄지’는 땜질로 진화한 것 [책&생각]

최재봉 기자 2024. 4. 5.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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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 설계 아닌 타협·적응이 진화
‘불완전함’ 틀에 맞춰 자연사 서술
한국에서 태어난 지 1354일 만인 지난 3일 중국으로 간 판다 푸바오가 대중 공개 마지막 날이었던 3월3일 경기 용인시 에버랜드 판다월드에서 사육사가 선물한 대나무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다. 판다의 ‘엄지’는 손목의 작은 뼈가 대나무를 쥐기 위한 용도로 재활용된 “진화적 땜질”의 결과물이다. 사진공동취재단

불완전한 존재들
결함과 땜질로 탄생한 모든 것들의 자연사
텔모 피에바니 지음, 김숲 옮김 l 북인어박스 l 1만9800원

판다는 본래 손가락이 다섯개였지만, 주식인 대나무를 쥐기 위한 용도로 엄지에 해당하는 ‘여섯번째 손가락’을 만들어냈다. 손목에 있는 작은 뼈가 진화를 통해 여섯번째 손가락이 된 것인데, 이것은 “사실 처음부터 진짜 엄지였다기보다 선택적으로 재사용한 것이다.” 다른 기능을 지녔던 신체 구조를 먹이 섭취에 필요한 용도로 재활용했다는 점에서 “판다는 진화적 땜질의 결과물이다.”

이탈리아의 진화생물학자이자 과학철학자 텔모 피에바니(파도바대학 생물학과 교수)가 쓴 ‘불완전한 존재들’은 불완전함이라는 열쇳말을 통해 진화 과정을 설명하는 책이다. 길고 복잡한 진화의 결과물인 생명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완벽할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수많은 오류와 불안정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책의 핵심 주장이다. 자연은 처음부터 계획을 세우고 그에 맞추어 가장 효율적인 진화 경로를 택하는 대신, 우연과 상황 변화에 맞추어 그때그때 임기응변의 적응 방식으로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판다는 200만년 동안 99% 대나무만 섭취하는 거의 완벽한 초식동물로 살아왔지만, “소화기관은 육식동물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판다와 함께 많은 이의 사랑을 받는 코알라는 암컷의 새끼주머니 입구가 아래를 향해 있는데, 이는 나무 꼭대기에 살면서 새끼를 떨어뜨릴 위험이 있는 동물에게는 매우 좋지 않은 구조다. 그러나 이것은 코알라의 먼 조상 유대류가 굴을 파고 살았던 습성을 알려주는 불완전한 진화의 흔적이라고 책은 설명한다.

지은이는 우주의 시작에서부터 지구의 생성을 거쳐 생명체의 출현과 진화에 이르는 자연사 전체를 불완전함이라는 하나의 틀에 꿰어 서술한다. 유전자의 복제는 늘 완벽하지 않고 수많은 오류와 변형을 일으키는데, 이런 불완전함이 진화를 가능하게 하는 “천재적인 역할을 한다.” 기린은 먹이를 삼키고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되돌이후두신경이 필요하다. 그러나 대뇌에서 가까운 후두까지 직접 연결돼 있는 대신, 그렇잖아도 긴 목을 한 바퀴 왕복해서 돌아오도록 되어 있다. 똑똑한 설계자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방식이다. 사람의 되돌이후두신경도, 기린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긴 우회로를 거치게 되어 있다. 이런 비효율성은 인간과 기린이 공유하는 고대 유산인 미주신경의 긴 경로 사이에 일어난 불완전한 타협의 산물이다.

인간은 두 발로 걷게 되면서 후두가 길어진 목 아래로 내려가며 기도와 성대가 분화된 형태로 발달했다. 이는 인간의 언어 능력을 가능케 한 진화였지만, 삼킨 음식물이 기도 입구 바로 옆을 지나가게 되어 있어서 자칫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구조다. “만약 처음부터 다시 설계됐다면 위험을 피하면서도 해부학적으로 더 효과적인 대안을 마련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불완전한 땜질은 ‘호흡’과 ‘말’이라는 두 가지 다른 기능을 함께 수행할 수 있는 묘안이기도 했다. “진화의 과정에서 소화기관은 호흡기관이 됐고, 이 호흡기관은 다시 음성을 생성하는 도구가 됐다.”

한국을 떠나기 한 달 전인 3월3일 경기 용인시 에버랜드 판다월드 실내 방사장에서 푸바오가 대나무를 손에 쥐고 먹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노벨상을 받은 프랑스의 생리학자이자 유전학자 프랑수아 자콥은 유전체의 진화를, 계속해서 손보고 새로운 기능을 재사용하는 형태의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디엔에이(DNA)의 놀라운 보편성 덕분에 “새로운 무언가를 추가하는 형태가 아니라 존재하는 것들을 계속 재사용하면서 생명체가 진화”했다는 것이다. “진화는 오래된 것에 새로운 것을 덧붙이거나 오래된 것 위에 새로운 것을 구축해나가는 방식으로 작동할 뿐, 필요하지 않게 된 모든 DNA를 지워버리진 않는다.” ‘정크 DNA’라 불리는, 당장은 쓰임새가 없어 보이는 수많은 유전물질은 “자연의 실패한 실험의 흔적”이자 동시에 미래에 있을 수 있는 쓰임새를 위한 대비이기도 하다.

이족보행은 손을 자유롭게 해서 도구를 만들어 쓸 수 있게 하는 등 인간 진화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설명되곤 한다. 그러나 “그 결과, 척추는 구부러지고 척추뼈는 과도한 압력을 받게 됐다. 신경과 근육은 이 변화에 최대한 적응했지만 좌골신경통, 탈장, 평발을 피할 수 없었다.” 인간의 몸은 진화론적으로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지만 바로 그런 불완전함이 ‘진화적 가능성’의 원천이라는 점을 지은이는 거듭 강조한다. 인간의 아이는 영장류 중에서도 특히 무력한 상태로 태어나는데, “학습, 모방, 놀이를 통해 생각과 기술을 물려주는 능력”이 그것을 보충한다. 불완전함은 “진화적 혁신을 만들어내는 능력”이자 “덧없는 모든 것의 기원이 된다.”

생물학의 진화와 비슷한 현상이 기술 진화에서도 나타난다. 컴퓨터나 휴대폰에 가장 많이 쓰이는 영어 자판은 맨 윗줄의 왼쪽부터 여섯 글자가 ‘QWERTY’로 되어 있어서 쿼티 자판이라 불린다. 이런 배열은 타자기가 처음 발명된 19세기 이래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데, 이것은 타자기의 망치가 겹치거나 엉키는 일을 막기 위해 자주 쓰는 글자를 가능한 한 서로 떨어뜨려 놓기 위한 필요에서 비롯되었다. 자판을 치는 사람에게는 매우 불편한 배열인데다, 기술 혁신으로 더는 필요가 없어졌음에도 쿼티 자판은 여전히 지배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여기에서도 보다시피 “완벽함은 기술 진화의 유일한 명령이 아니”며, “처리 방식, 불완전함 그리고 기능적 조화와 관련된 타협의 과정”이 기술 진화를 결정한다. 애초에 원거리 무선 통화 용도로 발명된 휴대전화에 부가 기능이 거듭 더해지면서 스마트폰으로 ‘진화’해 온 과정 역시 “다양한 재사용과 확장”이라는 생물학적 진화의 원리를 닮았다.

불완전함이 진화의 동력이라는 통찰은 생물학의 차원을 넘어 세계를 보는 눈을 바꾸게 만드는 매력적인 관점이다. 불완전함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능력인 동시에 인간과 지구 전체를 위태롭게 하는 위험 요소이기도 하다. 불완전함의 그런 양면성을 직시하면서 타협과 적응을 통해 당면한 위기를 헤쳐 나가자는 게 책의 결론이다. “불완전함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도 많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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