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봉우리에서 돌 떨어지듯, 지평선 위 구름 펼쳐지듯 [책&생각]

최원형 기자 2024. 4. 5.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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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는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상형문자로, "청각에 호소하는" 지구상의 여러 다른 표음 문자들과 달리 "시각에 호소하는" 표의 문자다.

따라서 글과 그림은 같은 기원(書畵同源)을 지니며, 이 '상형적 본질'이 한자 서예에 독특한 미학을 부여한다.

'한자 서예의 미'는 중국·대만 미학을 연구해온 대만 출신 작가 장쉰(77)이 한자와 한자 서예의 역사와 특징, 그것이 품고 있는 아름다움을 소개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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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송나라 때의 문인 소식의 \'한식첩\'. 대만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글항아리 제공

한자 서예의 미
장쉰의 미학 강의
장쉰 지음, 김윤진 옮김 l 글항아리 l 2만6000원

한자는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상형문자로, “청각에 호소하는” 지구상의 여러 다른 표음 문자들과 달리 “시각에 호소하는” 표의 문자다. 따라서 글과 그림은 같은 기원(書畵同源)을 지니며, 이 ‘상형적 본질’이 한자 서예에 독특한 미학을 부여한다. ‘한자 서예의 미’는 중국·대만 미학을 연구해온 대만 출신 작가 장쉰(77)이 한자와 한자 서예의 역사와 특징, 그것이 품고 있는 아름다움을 소개하는 책이다.

한자는 최소 50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지은이는 진나라 몽염이 붓을 만들기 훨씬 이전인 상고시대 때부터 도기에 그림을 그려넣는 등 이미 붓이 쓰였다고 지적한다. “5000년 전 붓은 이미 문명적인 글쓰기와 회화의 발전 방향을 결정했을 뿐 아니라 전체 문화 체질에 관한 대략적인 사고 방향과 행위의 패턴을 설정한 것”이다. 초기 한자의 모습으로 상나라 때 거북이 등껍질 등에 그린 갑골문자가 흔히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도 글자를 새기기 전 붓으로 쓰는 과정이 있었다고 한다. 지은이는 일상생활에서 점을 치는 용도로 쓴 질박한 갑골문 말고, 의례의 형식을 갖추어 청동기에 새겨넣는 화려한 금문(金文)도 있었다는 사실을 짚는다. 금문이 정체(正體)라면 갑골문은 속체(俗體)다. 이처럼 “한자 서예에는 언제나 동시대에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쓰기 방식이 존재”했고, 이 경향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중국 황허강 하류 신석기시대 유적지에서 출토된 검은색 토기에 새겨진 기호. 여명, 일출 등을 뜻하는 단(旦)이라는 고대 글자로 추정된다. 글항아리 제공

연기가 은근하게 피어오르는 듯한 글자로 주로 국가 행사 등에 쓰였던 전서(篆書)가 금문을 이어 진나라 때 확립된 ‘정체’라면, 하급 관리들이 빠른 실무 처리를 위해 죽간(竹簡)에 쓸 용도로 개발한 예서(隸書)는 ‘속체’의 흐름을 이어받았다. 한자가 전서체에서 예서체로 바뀐 것은 서예 역사에서 매우 중대한 사건으로, 과거 동그란 원에 갇혀 있던 한자를 수평과 수직으로 구성된 네모난 모양 안에 정착시켰기(破圓爲方) 때문이다. 또 이때부터 붓은 한자 서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서양 붓과 달리 원뿔 모양의 봉(峰)으로 이뤄진 중국 붓은 죽간의 세로결 섬유질에 적응하기 위해 가로획을 물결치듯 살짝 들어올리는 움직임(波磔) 등의 서법을 낳았다. 지은이는 중국 건축물에서 처마를 들어올리는 비첨(飛檐) 등 이 같은 수평선 이동의 전통을 동양 미학 전반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초서의 명작으로 평가받는 당나라 문인 손과정의 ‘서보’. 베이징고궁박물관 소장. 글항아리 제공
대만의 현대무용그룹 ‘윈먼무집’(雲門舞集)의 ‘행초’ 공연. 서예 학습의 수단인 ‘영자팔법’을 춤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글항아리 제공

삼국 시대와 위·진 시대를 거치며 글쓰기 재료는 죽간에서 종이·비단으로 옮겨갔고, 문인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서예는 실용적인 의미뿐 아니라 심미적인 의미까지 갖추게 된다. 왕희지의 ‘난정’, 안진경의 ‘제질문고’, 소식의 ‘한식시’ 등은 행서(行書)와 초서(草書)의 중간 서체인 행초(行草)로 글쓴이의 꾸밈 없는 감정을 드러낸 서예의 걸작들로 꼽힌다. 당나라 때 구양순은 가로획과 세로획이 반듯하고 구조가 엄밀한 해서(楷書)의 본보기를 세웠고,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을 이룩한 원나라 때 조맹부는 회화, 문학, 서예 세 가지가 합쳐진 미학을 제시했다.

왕희지에게 서예를 가르친 위부인의 ‘팔진도’를 통해 서예 미학의 기본을 설명해주는 대목이 특히 흥미롭다. 점(點)은 높은 봉우리에서 돌이 떨어지는 것처럼(高峰墜石), 선(線)은 광대한 지평선 위에 구름이 뻗어 있는 것처럼(千里陳雲) 쓴다, 세로획인 수(竪)는 오랜 세월 자라난 고목의 덩굴(萬歲枯藤)처럼 강인하고 탄력 있게 써야 양쪽으로 퍼지는 장력이 생긴다 등 여덟 가지 가르침이다. 붓을 들어 자기 이름을 단정하고 신중하게 써나가다 보면, 지은이처럼 저도 모르게 “직선의 정직함과 바름, 곡선의 완곡함과 부드러움, 사각형의 단정함, 원의 포용을” 배우게 될지 모른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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