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연이 1년처럼…어르신 시인들의 농익은 회한과 익살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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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냐 하기에/ 그렇다고 했다/ 얼굴 한번 보자길래/ 그러자고 했다/ 가을 산 깊어지기 전에/ 함께 보자고 했다" 일흔다섯 윤상철(부산)씨의 시 '안부'다.
"잘 노는 친구 잘 베푸는 친구 다 좋지만/ 이제는 살아 있어 주는 사람이 최고구나" 노래('절친', 이상훈, 77·경기 고양)했으니, 가령 시인 황동규(86)의 "기다렸는가? 첫눈 내리는 저녁이다.// 아직 한 대포 아는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첫눈 내리는 저녁')와도 호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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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다는 것이 봄날
성백광 외 지음, 김우현 그림 l 문학세계사 l 1만6800원
“잘 있냐 하기에/ 그렇다고 했다/ 얼굴 한번 보자길래/ 그러자고 했다/ 가을 산 깊어지기 전에/ 함께 보자고 했다” 일흔다섯 윤상철(부산)씨의 시 ‘안부’다.
“살며시/ 입 다문 사진보다/ 활짝 웃는/ 영정사진 더 슬프다” 일흔 허만덕(경기 안양)씨가 썼다. 제목 ‘사진’.
비장할 필요 없다. “임종하시는 어머니 손 잡고, ‘엄마 곧 만나요’ 하고선/ 하루에 꼭 챙기는 한 줌의 영양제” 제목 ‘영양제’(김명희, 75·대구)다.
당초 ‘짧은 시’ 공모전이긴 해도, 이들은 에두르지 않는다. 은유도 어지간히 없다. 생략이 많아 자연 여운이 된다. 한국시인협회와 대한노인회가 주최한 제1회 ‘어르신의 재치와 유머’ 짧은 시 공모전에 응모된 시 100편을 엄선해 이달 펴낸 ‘시집’의 제목은 ‘살아 있다는 것이 봄날’이다. 최우수상을 받은 시 ‘봄날’에서 따왔다.
“죽음의 길은 멀고도 가깝다/ 어머니보다 오래 살아야 하는 나를 돌아본다/ 아! 살아 있다는 것이 봄날” (김행선, 70·서울 영등포)
시집엔 한 연을 넘는 시도 그닥 없다. ‘1연’이 ‘1년’인 양 바로 지금의 희락, 절망, 욕망, 회한과 익살 따위로 시는 농익는다.
“길을 가다 문득 돌아보니/ 내가 걸어온 발자국이 보이지 않네/ 다시 돌아 앞으로 가려 하나/ 길이 전혀 보이지 않네/ 멀리서 나를 바라보니/ 내가 바로 미세먼지네” 김중대(78·경기 남양주)씨의 ‘미세먼지’처럼, 일상이 곧 시적 반전이다. 휴대폰은 세탁기에서 돌고, 한참 찾아 헤매던 안경이 손에 쥐어져 있다. 생의 욕구도 이 균열에서 나온다.
“돼지 꿈꾸었다는 마나님 앞세우고/ 로또복권 사러 가는 길에서/ 1등 당첨되면 십일조 헌금하자고 합의했는데/ 그 십일조가 세전 10%냐, 세후 10%냐/ 옥신각신하다가/ 복권은 못 사고 막걸리만 한 통 사 가지고 돌아왔다”(‘로또’, 양종술, 77·경기 하남)
“아내의 닳은 손등을/ 오긋이 쥐고 걸었다/ 옛날엔 캠퍼스 커플/ 지금은 복지관 커플” 대상을 받은 성백광(63·대구)씨의 ‘동행’이다.
올초 출간된 일본 노년들의 센류(짧은 정형시) 모음집(‘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이 눈길을 끌었다. 2001년부터 매년 공모전을 해오고 있다.
국내 처음으로 지난달 중순까지 한달 진행된 이번 공모전엔 최고령 98살 응모자를 포함해 접수된 시만 5800편이 넘었다고 한다. 예심서 100편, 이중 12편을 김종해·나태주·유자효 시인이 입상시켰다. 나태주 시인은 ‘작품해설’에서 “(예심작에) 깜짝 놀랄 만한 이름들이 응모작 속에 들어 있었다”며 “묘하게도 기성 시인들의 작품만 입상작에서 모조리 빠져 있었다”고 썼다.
“잘 노는 친구 잘 베푸는 친구 다 좋지만/ 이제는 살아 있어 주는 사람이 최고구나” 노래(‘절친’, 이상훈, 77·경기 고양)했으니, 가령 시인 황동규(86)의 “기다렸는가? 첫눈 내리는 저녁이다./…/ 아직 한 대포 아는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첫눈 내리는 저녁’)와도 호응한다. 여든둘에 출간한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에 있다.
김종해 시인은 “삶의 가장 진실한 순간들”의 “포착”이라 말한다. ‘어르신’에 씌운 고정관념 밖 진실들. “손주들이 오면 고맙다/ 손주들이 가면 더 고맙다” 김왕근(64·서울 송파)씨의 ‘손주들’이고, “이 당 저 당 다 있어도/ 경로당이 최고입니다” 일흔다섯 신동고(서울 동대문)씨의 ‘최고의 당’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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