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도깨비와 씨름 한판

조규익 숭실대 명예교수 2024. 4. 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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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시절, 등교한 아이들의 일상적 관심사는 뻔했다. 누가 ‘팔뚝만 한’ 망둥이를 잡았고, 누구네 소가 송아지를 낳았으며, 누구 누나가 이웃 마을로 시집간다는 등 자잘한 사실들을 빼면 늘 귀신과 도깨비 이야기만 남았다.

‘힘이 최고’라는 믿음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툭하면 씨름을 즐겼다. 무서우면서도 친근하던 도깨비의 습성과 무관치 않은 일이었다. 당시 고향 마을 도깨비 이야기의 중심 내용은 씨름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동네 장정 한 사람이 한밤중 서낭당 고갯마루에서 도깨비를 만났다. 그가 다짜고짜 씨름을 걸어왔다. 그를 이기지 못하면 장정은 죽게 되어 있었다. 장정은 굳은 마음으로 도깨비의 허리춤을 잡았다. 마을의 씨름 장사와 전설적 씨름꾼 도깨비의 ‘심판 없는’ 일전이 심야에 벌어진 것. 밤새 끙끙대며 씨름이 계속되는데, 아랫마을에서 새벽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도깨비는 스르르 손을 풀곤 냉큼 사라졌다. 장정이 비 오듯 흐르는 땀을 훔치고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수십년 된 몽당빗자루 하나를 끌어안고 있는 게 아닌가. “아뿔싸! 내가 밤새 씨름한 상대가 고작 이 몽당빗자루였단 말인가?” 허탈해진 그는 마을의 몽당빗자루들을 모두 수거해 불태웠다.

지금 온 국민이 두 편으로 갈려 ‘도깨비 씨름판’을 벌이고 있다. 어느 쪽이든 자신을 인간으로 상대편을 도깨비로 여기지만, 도깨비가 누군지는 심판이 안다. 이야기 속 인간은 승자이고, 모호하긴 하나 도깨비는 패자로 설정되어 있다. 거창한 구호 아래 모든 것을 걸고 싸우지만, 허무하게도 늘 미완의 싸움 끝에 남는 건 ‘몽당빗자루’다.

인간 세상에 영속되는 건 없고, 이데올로기 또한 인간의 불완전한 마음이 허구해낸 논리일 뿐. 아무도 나를 위해 유토피아를 만들어 줄 수 없음을 깨닫기까지 이토록 긴 시간의 지저분한 투쟁과 끔찍한 거짓 언설(言說)들이 필요했던 것일까. 인성(人性)·지성(知性) 모두 엉망임이 시시각각 드러나는 지금, ‘도깨비방망이’를 휘두르며 혹세무민하는 영악한 소인배들을 보라. 자신들이 산골의 심야 ‘도깨비 씨름판’에서 새벽빛을 감지하고 놀라 널브러지던 몽당빗자루에 불과함을 언제쯤이나 깨달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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