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마을 흩어지는 공동체Ⅱ] 4. 소양동 준상이네 집

오세현 2024. 4. 5. 00: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빛바랜 ‘한류 1번지’ 철거보다 두려운 건 상실감
2000년대 ‘겨울연가’ 열풍 소양동 들썩
준상이네 집, 외지인 발길 한류 상징으로
밤낮없는 방문에 지역-주민 마찰 빚기도
재개발 부지 포함 철거-존치 논란 ‘몸살’
2021년 존치 가닥 불구 구체적 계획없어
재건축조합 해당부지 추억공간 남기기로
주민들 춘천·한국 알렸다는 자부심 여전
기와집골 쇠퇴 역사·문화적 가치 아쉬움
최근 ‘소년시대’ 등 드라마 촬영 이어져

2000년대 들어 위축됐던 소양동은 드라마 ‘겨울연가’로 호황기를 맞이한다. 드라마 한 편의 위력은 대단했다. 일본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소양동은 순식간에 한류 명소가 됐다.

▲ 1 준상이네집 전경 2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에 방영된 직후 일본 관광객들이 소양동 준상이네집을 찾기 시작했다. 3 준상이네집 내부 4 관광객들이 몰리면서 소양동 곳곳에는 드라마와 관련된 물품을 파는 곳들이 들어섰다 5 준상이네집을 알리는 표지판 본사DB

■ 한류의 시작

2004년 여름. 소양동이 들썩였다. 새로울 게 없던 지역에 외지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대부분 일본 관광객들이었다. 이들은 드라마 ‘겨울연가’에 나온 준상이네 집을 보기 위해 소양동을 찾았다. 사실 드라마가 국내에 방영된 시기는 2002년이다. 이듬해 일본에 방영되면서 순식간에 일본 열도를 집어삼켰다. 지금도 ‘겨울연가’를 한류의 시작으로 꼽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준상이네 집은 한류의 상징이었다. 평범한 가정집은 관광지가 됐고 밤낮으로 사람들이 들끓었다. 개방 40일 만에 관광객 2만여 명이 다녀갔으니 그 인기가 어느 정도였을지….

드라마가 방영된 지 20년이 지났지만 준상이네 집 주인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는 이름도, 나이도 밝히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20년 전 이야기를 풀어놨다.

당시 준상이네 방은 미국 사람에게 세를 주던 곳이었다. 어느 날 촬영팀이 집에서 촬영을 했으면 좋겠다고 요청했고 이를 수락한 게 지역의 운명을 바꿔놨다. 침대도, 책상도, 하다못해 물컵도 다 기존에 집에서 쓰던 물건들이었다. 피아노만 촬영팀이 가져온 소품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드라마가 대성공을 거둔 후, 예상치 못한 관광객들의 방문에 속앓이를 할 때도 많았다. 그는 “준상이네 집은 한류의 시작이었기 때문에 자부심은 있었지만 너무 고생스러웠던 시간이었다”며 “저녁에도 오고 밥먹을 새도 없이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1년 정도는 무료로 개방했는데 도저히 안되겠어서 춘천시에 얘기를 하니 ‘볼 사람만 보게 하라’라고 해서 입장료를 5000원씩 받기 시작했다”고 했다. 개인 사유지가 관광지가 되면서 집 소유주와 춘천시, 관광객, 주민들 간의 마찰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일본 관광객들에게 한국을, 춘천을 알렸다는 자부심은 여전하다. 그는 “많이 힘들었지만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졌다. 한일관계가 그렇게 다정하게 좋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드라마와 준상이네 집 덕분에 한국의 이미지, 춘천의 이미지를 좋게 만드는 데 최선을 다했다. 우스갯소리로 ‘어느 외교부 장관도 나만큼은 못 했을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했다.

드라마 ‘겨울연가’의 여파는 명동 닭갈비 골목으로 남이섬으로 퍼져나갔다. 드라마 촬영지 곳곳이 명소가 되면서 춘천은 인기 관광지가 됐다. 준상이네 집 주변에는 드라마와 관련된 물품들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준상이네 집 주인은 “일본 사람들이 마치 주인공(배용준 역)을 실제로 본 듯 그렇게 좋아했다”며 “감동을 받는 모습을 볼 때 마다 자부심을 느낄 때가 많았다”고 했다. 주민들에게도 준상이네 집의 인기는 색다른 추억으로 남아있다.

정락병(73) 소양동 주민자치회장은 “일본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많이 왔었고 골목골목이 관광객들로 꽉 찼다”고 회상했다. ‘욘사마’를 보러 온 관광객들을 실은 관광버스도 동네를 점령했다. 정락병 회장은 “‘욘사마’가 피아노를 쳤다고 해서 유명해진 집인데 그때 ‘욘사마’는 지금 BTS보다 인기가 더했다”고 했다. 최옥화(66) 소양 7통 통장은 “준상이네 집은 평범한 기와집이었는데 배용준이 촬영을 했다고 해서 일본인들이 정말 많이 왔다”며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서 주차장까지 마련했을 정도였다”고 했다.

■ 재건축 여파에 휘청

한류의 상징이었던 준상이네 집의 마지막은 편치 않았다. 재개발 부지에 포함되면서 끊임없이 철거와 존치 논란이 불거졌다. 준상이네 집 자체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춘천 지역 전반적인 관광콘텐츠 부족과 낙후된 주변 여건, 한일 갈등 등의 파고를 넘으며 명성에 흠이 가기도 했다. 재건축 사업이 속도를 내지 못하면서 준상이네 집 존치 여부도 표류하기 시작했다.

2021년 3월 준상이네 집은 철거 대신에 보존으로 가닥이 잡혔지만 현재로서는 이 마저도 불투명하다. 당시 춘천 소양촉진2구역 재건축정비사업조합은 준상이네 집을 완전히 철거하기 보다는 집 안에 보관돼 있는 피아노, 전화기, 침대 등을 보존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준상이네 집 위치가 기와집골 귀퉁이어서 아파트 건설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와있지 않은 데다 공사 이후 해당 부지에 공원이 들어설 예정이어서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준상이네 집을 추억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원으로 지어질 계획이어서 춘천시의 심의를 받아야 하고 장애인 보행로 확보 등의 절차가 남아있어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도출되지 않았다. 우춘수 소양촉진2구역 재건축정비사업조합장은 “준상이네 집의 가치, 의미 등이 남다르기 때문에 보존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현실적으로 심의 기준을 맞출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준상이네 집 주인은 그 공간이 그대로 존치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거랑 똑같이 해서 전시를 해다오’라고 조합에 얘기했다”며 “조합에서 전시실을 만든다고 했으니 그렇게 하리라고 믿는다. 거기에서 쓰던 물건들을 그대로 두고 왔는데 조합에서 잘 보존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 그 후 20년

뜨겁게 불타오르던 열기는 식었다. 드라마가 일본에 방영된 지 20년이 지났으니 이제는 준상이네 집도, 소양동을 메우던 관광객들도, 이들을 상대로 한 영업장들도 모두 옛 일이 됐다.

쉴새없이 관광객들이 드나들었던 지역은 이제 고요하기만 하다. 지상 26층 규모의 아파트가 지어지고 있으니 이제 몇 년 후면 이 곳도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 될 테다.

시대의 변화를,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주민들은 잊히는 동네의 모습이 아쉽기만 하다. 정락병 회장은 “준상이네 집뿐만 아니라 기와집골 자체가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가치가 있는데 보존하지 못한 게 안타깝다”며 “1950년대부터의 춘천의 모습이 있기 때문에 지역의 랜드마크가 됐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소양동을 찾는 발길은 여전하다. ‘소년시대’를 비롯해 드라마 촬영이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다. 정락병 회장은 “개인적으로 마을을 보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지만 변화하는 데 적응을 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한 달 전 쯤에도 드라마 촬영하러 왔는데 이런 식으로 시대 흐름에 맞춰서 흘러가는 것”이라고 했다. 유명희(66)씨 역시 “드라마 촬영할 때 옛날 모습이 필요하면 소양동을 찾을 수 있도록 준비해 놓는 것도 괜찮았을 것 같다”며 “기와집골부터 시작해서 동네가 예전 모습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으니까 별도의 세트장을 만들 필요도 없다”고 했다.

준상이네 집 주인은 아파트만으로는 명품도시를 만들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마을의 역사가 있어야 명품이지 아파트만 자꾸 올라간다고 명품은 아니다”라며 “아무데나 다 있는 아파트 말고 마을의 이야기, 역사를 돌아봐야 한다”고 했다.

오세현·최우은

Copyright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