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누가 궁예를 왜곡하는 소리를 내었는가?

유석재 기자 2024. 4. 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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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궁예(배우 김영철)가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관심법을 쓰다 누군가 기침을 하자,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라며 꾸짖는 장면. /KBS 유튜브

얼마 전 유튜브를 보니 또 KBS 채널에서 ‘태조 왕건’ 전편을 스트리밍해 주고 있었습니다. 방영된 지 20년도 훨씬 넘게 지난 이 드라마에서 여전히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대사는 주인공인 왕건의 것이 아닙니다. 드라마 전반부의 실질적인 주인공에 가깝게 비중이 큰 인물, 바로 궁예(김영철)의 “지금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는가?”란 대사입니다.

더 오래 전, 대학교 4학년 때였을 것입니다. 포천 산정호수에서 열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따라간 적이 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그들만의 시간이 따로 주어지자 할 일이 없어진 저는 호숫가 주변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콘도나 음식점이 즐비하지는 않아서 얼음이 얕게 덮인 호수 주변을 유유자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호수 북쪽에 웬 산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야트막한 구릉이 편안하게 드리워지기 십상인 호수 주변의 상투적인 풍경과는 달리, 어딘가 장엄해 보이는 산세가 범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당시엔 스마트폰도 지도 앱도 없던 때라 지나가는 할머니 한 분에게 그 산에 대해서 여쭤봤습니다.

“할머니, 저 산 이름이 무엇입니까?”

“명성산(鳴聲山)이지요.”

“명성산이라... 웬지 무슨 전설이 있을 것만 같은데요.”

“옛날에 왕이 죽었다는 산이요.”

왕이 산에서 죽었다? 전 집에 와서 그 산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다가 전혀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산정호수 북쪽에 명성산이 있는데, 그 산 이름은 고려 건국 때 왕건에게 쫓긴 궁예의 말년을 슬퍼하여 산새들이 울었다 하여 붙여진 것이라 한다.’(동아세계대백과사전)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산새들이 슬피 울었다고? 새가 슬피 우는 걸 사람들이 어찌 알았겠는가? 새가 우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 슬펐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명성산 주변에 사는 민초(民草)들은 분명히 궁예의 몰락과 죽음을 슬퍼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그것도 천 년이라는 세월을 지나 지금까지 그런 전설이 내려온다면, 도무지 백성들의 마음에 맺힌 한(恨)이 어떠했기에.

그런데, 궁예, 궁예라? 전 의아했습니다. 어려서 본 만화, 동화책, 인형극에서 제 처자식 죽이고 미륵행세를 하다 쫓겨난 그 미치광이 군주의 이미지는, 신채호의 미완성 역사소설 ‘일목대왕의 철퇴’를 읽은 뒤에도 좀처럼 씻겨지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학교에서 배운 고려시대사 시간에도 궁예는 ‘군주가 되기엔 부적절한 사람’으로 한 마디 정도 언급한 뒤 곧바로 왕건에게 바통을 넘겨준 인물이 아니었던가 말입니다.

KBS교향악단 유튜브 콘텐츠 '궁예-레퀴엠' 속 한 장면./KBS교향악단

과연 궁예의 최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리고 그 역사와 전설 사이의 간극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2001년 4월,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다뤄질 궁예의 최후가 역사서의 기록과는 다르다, 즉 명성산으로 도망간 궁예가 왕건과 마지막 술자리를 가진 후 측근을 시켜 자살하게 된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당시 이 기사가 나간 후 독자들의 반응은 엇갈렸습니다.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다니, 일본의 교과서 왜곡과 무엇이 다른가”라는 분노가 있었는가 하면, “드라마에선 허용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오히려 승자의 기록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는 건 바람직하다”라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기는 건 당연합니다. 도대체 정사(正史)에 기록된 ‘공식적인’ 궁예의 최후 장면은 어떠했던가? 그리고 그 ‘정사’라는 건 언제 누가 무슨 목적으로 편찬한 것인가?

궁예에 관한 기사가 나오는 공식적인 정사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고려사(高麗史)’ 두 책입니다. 과도기에 살았던 인물의 필연적인 운명이겠죠. 먼저 ‘삼국사기’ 열전(列傳) 제10 궁예전에서 묘사하고 있는 궁예의 최후 장면을 보겠습니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太祖·왕건)를 끼고 호위하여 문 밖으로 나오며 “왕공(王公)이 이미 의로운 깃발을 들었다”라고 외치게 했다. 여기서 전후로 분주히 따르는 자들이 몇 명인지 알 수 없었고, 먼저 궁성 문으로 가서 소리치며 기다리는 자가 또한 1만여명이었다. 왕(궁예)이 듣고 어찌할 바를 몰라, 이에 미복 차림으로 달아나 산림(山林)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되지 않아 부양(斧壤·지금의 평강)의 민(民)에게 해를 입었다.>

이 기사가 ‘고려사’ 세가(世家) 제1 태조세가에선 이렇게 ‘보완’돼 적혀 있습니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끼고 나오며 사람들로 하여금 말달리면서 “왕공이 이미 의로운 깃발을 들었다”라고 외치게 했다. 여기서 분주히 따르는 자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고, 먼저 궁문으로 가서 소리치며 기다리는 자가 또한 1만여 명이었다. 예(궁예)가 이를 듣고 깜짝 놀라 “왕공이 얻었으니 내 일은 끝났도다(王公得之, 吾事已矣)(1)”라 말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에 미복 차림으로 북문을 통해 달아났다. 궁녀들이 궁을 청소하고 (태조를) 맞아들였다.(內人淸宮以迎)(2) 궁예는 악곡(嶽谷)으로 달아났다. 이틀 밤을 지난 후에는 몹시 배가 고파서 보리 이삭을 잘라 훔쳐 먹었다.(信宿飢甚偸裁麥穗而食)(3) 얼마 되지 않아 부양의 민(民)에게 해를 입었다.>

두 ‘공식적인’ 사료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아주 흥미있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좀 거친 비유같지만, 마치 동아전과 베낀 학생 두 명의 숙제를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대로 전과를 베낀 학생 한 명과, 나름대로 살을 붙여 숙제를 해온 학생 한 명. 인터넷에 안 뜨는 한자가 많아 두 사료를 원문 그대로 보여드리지 못해 유감스럽습니다만, 두 사료는 ‘아’ 다르고 ‘어’ 다른 차이만 있을 뿐 거의 똑같은 문장이라는 점을 금방 눈치챌 수 있습니다.

궁예의 묘로 전해지는 함경남도 안변에 있는 한 건물. 1913년 촬영한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그러나 분명히 달라진 부분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 부분들이야말로 궁예 최후의 ‘진실’에 한걸음 다가서는 열쇠일지도 모릅니다. 먼저 ‘삼국사기’에서 ‘왕’이라 칭한 부분을 ‘고려사’에선 ‘예’라는 이름으로 아주 낮춰 부릅니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不知所圖)’는 부분은 ‘깜짝 놀랐다(驚駿)’로, ‘산림’은 ‘악곡’이라는 표현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궁예가 뒷문(북문)으로 달아났다는 묘사도 추가됐습니다. 후자가 전자에 비해 표현이 더 과장되고 궁예를 더 깎아내리려는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려사’의 궁예 관련 부분이 ‘삼국사기’보다 더 과장된 예는 다른 곳에서도 나타납니다. 상당히 끔찍한 묘사입니다만, ‘삼국사기’에서 ‘왕비를 달군 쇠몽둥이로 죽였다’라는 부분이 ‘고려사’에선 ‘부녀자들을 달군 쇠몽둥이로 찔러죽여 연기가 입과 코로 나오게 했다’로 확장되는 식입니다.

위 사료에서 ‘삼국사기’에 전혀 없던 부분이 ‘고려사’에서 등장한 문장은, 위에서 제가 원문을 병기한 세 부분입니다. (1)궁예의 독백. 물론 상식적으로 궁예가 당시에 이런 말을 했을 리가 없겠지만, 아마도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서 첨가한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2)궁녀(나인)들이 청소를 했다? 이런 쓸데없는 말이 들어가는 이유는 당연합니다. 이것이 ‘궁예전’이 아니라 ‘태조세가’이기 때문이죠. 없던 말을 억지로 끼워넣은 듯한 분위기가 역력합니다만. (3)이틀 밤을 지낸 뒤 보리이삭을 훔쳐먹은 대목.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장입니다. 이 문장의 첨가는 원래 있던 뒷문장과 자연스럽게 이어져 “식량 훔쳐먹다가 백성에게 맞아 죽은” 듯한 모습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죠.

상당히 악의적인 냄새가 풍기지 않습니까? 마치 ‘이 부분에 굉장히 비참한 묘사를 넣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란 고민에 대한 정답같이 느껴질 정도네요. 결국 바뀐 글자와 추가된 문장은 모두 ‘궁예를 깎고 왕건을 높이는, 그리고 좀 황당하거나 싱거운 내용’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원문을 해석하기에 따라서 ‘식량을 훔쳐먹은 일’과 ‘민(民)에게 해를 당한 일’은 논리적 인과관계가 없는 전혀 별개의 일로 생각할수도 있습니다.(‘얼마 되지 않아[尋爲]’라는 표현이 원래는 ‘산림 속에 들어갔다’와 ‘해를 입었다’ 사이에 있는 것을 보십시오) 또, 부양의 민(民)이란 그냥 민이 아니라 왕건측의 지시를 받아 무장 동원된 사실상의 군대, 즉 민병(民兵)일수도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흔히 들어온 ‘궁예는 맞아 죽었다’ 또는 ‘돌 맞아 죽었다’라는 등의 말은 정사엔 나오지도 않는군요. 두 책 모두 그냥 ‘해를 입었다(所害)’입니다.

KBS 드라마 '태조 왕건'이 묘사한 궁예 최후의 장면. 궁예(김영철·가운데)가 왕건(최수종)과 술잔을 나눈 직후, 측근 은부(박상조)의 칼을 받고 있다.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23년(1145)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의 정사입니다. 김부식은 고려의 신하였고, 당연히 고려의 창업자인 왕건의 정당성을 부각시키고 궁예를 깎아내려 기술했습니다. 견훤전의 말미에 ‘궁예·견훤같이 흉악한 자들이 어찌 우리 태조에게 항거할 수 있으랴? 다만 태조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 준 자이다’(이것은 ‘삼국사기’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문장이기도 합니다)라고 쓴 걸 보면 그의 시각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궁예의 최후를 다룬 부분은 ‘고려조정 대변인의 공식발표’에 의거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궁예 사망 200여년 이후에 씌어진 ‘삼국사기’의 기록조차 그러한데, 그후로 300여년이 더 지난 조선 문종 1년(1451)에 김종서, 정인지 등이 편찬한 ‘고려사’야 어떻겠습니까. 자신들의 왕조가 멸한 왕조, 그 왕조가 폐위시킨 인물에 대해 <고려사>가 얼마나 허접스러워하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을지는 뻔한 일이겠죠.

볼테르는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모든 역사는 거짓말이다!” 명성산의 전설은 궁예가 백성들의 미움을 받는 폭군이 아니었을 가능성을, 북쪽(부양)으로 간 것이 아니라 남쪽(포천)으로 피했을 가능성을 말해줍니다. 전설은 이밖에도 많습니다. 궁예가 왕건과 항전했다는 철원의 보개산성, 성동리성, 싸우다 달아났다는 패주골, 군사들이 한탄을 하며 쫓겨났다는 군탄리, 궁예가 피신했다는 명성산의 개적동굴, 궁예가 건너면서 한탄했다는 한탄강… 전설을 종합해 보면, 궁예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왕건과 싸우다 남쪽으로 후퇴했던 것 같습니다. 그 최후의 항전지는 명성산이었을 것입니다.

궁예의 최후를 그린 드라마의 설정은, 놀랍게도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왕건과 최후의 술자리를 가진 뒤 자살한다는 내용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지만, 사실 명성산 근처엔 궁예가 왕건에게 항복문서를 바쳤다는 ‘항서밭골’이란 지명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큰 논란이 되었던 자살(自殺). 마치 로마 황제 네로처럼 부하에게 맡긴 칼에 비장하게 최후를 맞는다는 설정은 물론 꾸며낸 것입니다만, ‘육당 최남선 전집’의 ‘풍악기유’는 육당이 수집한 철원 지역의 한 전설을 이렇게 들려줍니다.(이재범 ‘슬픈 궁예’에서 재인용)

<운거사비한 구레왕(궁예)이 발붙일 땅을 얻지 못하고 심벽한 것을 찾아서 삼방 골짜기로 들어왔다… 아아 천지망아로다 하고, 그곳에서 심연을 향해 그대로 몸을 던졌더니, 물에는 빠지지 않고 시방 능 있는 곳에 와서 우뚝 선 채로 운명했다.>

역사는 역사이고, 전설은 전설입니다. 미심쩍은 정사(正史)라 해도 실증할 수 있는 것이 그뿐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공식적으로’ 뒤집을 수는 없습니다. 허나 역사의 ‘진실’은 때로 남아있는 기록 밖에 있을 때가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아직도 궁예의 죽음은 사료와 전설 사이 그 어딘가에서 소리없이 떠돌다가 이슬처럼 스러져간 그 숱한 ‘진실’을 우리에게 되새겨주는 고리들 중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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