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11 인터뷰] 시즈오카 축구 일군 日 축구 원로, "나 때는 김진국이 차붐 이상... 박지성급 활동량 갖춘 '일본 킬러'"

임기환 기자 2024. 4. 4.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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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일레븐=일본 시즈오카)

시즈오카는 가나가와현과 더불어 일본 축구의 본산이라 할 만하다. 가나가와현(6개)에 이어 일본 내에서 프로급 클럽이 두 번째로 많다(4개).

시즈오카현에서도 시즈오카시는 가장 중심이 되는 행정 구역이다. 시미즈시가 시즈오카시 아래로 흡수 합병되면서 지금의 시즈오카시로 거듭났다. 대신 시미즈시는 시미즈구가 되었다.

시즈오카 축구는 반 세기 전 지역 유소년들을 데리고 대한민국 인천으로 가서 축구 교류를 할만큼 진취적 면모를 풍겼다. 체육교사 은퇴 후 시미즈축구협회 부회장으로 재직 중인 니시무라 씨는 "시즈오카는 일본 축구의 원류라 할만큼 오래토록 유소년 육성에 힘써왔다. 아마 유소년을 한국까지 보낸 건 우리가 처음일 거다. 국내 어느 지역에서나 참가할 수 있는 전국 규모의 유소년 대회도 우리가 거의 처음이었지"라며 은근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는 자기네 대회를 일본 전역에서 벤치마킹해갔다고 덧붙였다. 

시즈오카의 대회가 아직도 일본 축구계에서 회자하는 이유는 현 UEFA(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나 AFC(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처럼, 당시 일본 전국의 유소년 최강 팀들을 한 자리에 모여 놓고 챔피언들이 리그를 펼치게끔 판을 깔아주었기 때문이다. 시즈오카는 지도자들이 최신 축구 정보와 트렌드를 교류하는 장이었다. 

안정환부터 시작해, 조재진, 최태욱, 이기제, 정대세, 황석호, 오세훈 등 전현직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몸 담았던 시미즈 S펄스 역시 시미즈 FC를 뿌리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시미즈 FC의 토대를 닦은 곳이 바로 시미즈축구협회다. 무려 약 55년 전 이야기다.

니시무라 부회장은 여담으로 당시 꼬맹이었던 유소년들이 자라고 자라 지금은 일본 축구계를 안팎에서 이끌어 나가고 있다고 뿌듯해 했다.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를 비롯해, 시미즈 S펄스 U13 감독 등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니시무라 부회장은 본격적으로 지역 축구판에 발을 담그기 전부터 시즈오카 축구 발전에 다방면으로 이바지해왔다. 상술했듯 현역 시절 체육교사였는데, 교편을 잡으면서 마지막 10년가량은 시미즈축구협회 직원으로 지역 축구 발전을 위해 힘써왔다. 그런데 하다 보니 일이 넘칠만큼 많아졌고, 55세 무렵 정든 교정을 뒤로 하고 시미즈축구협회 소속으로 올인하기 시작했다. 그게 벌써 20년도 훌쩍 넘었다. 

시즈오카의 유소년 축구 발전소 드림 필드에서 만난 니시무라 부회장은 일흔에 가까운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2024 영덕 풋볼 페스타 윈터 리그에서 우승한 대한민국의 U12 챔피언과 드림 필드 등 시즈오카 축구를 견학하러 온 영덕군 관계자들을 애정으로 대해주었다. 시미즈 구단과 시즈오카 축구의 역사 등을 필두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도란도란 나누었는데, 그 종착역은 한일전이었다. 성남시와 36년가량 축구로 교류하고, 한국을 100회 넘게 찾았으며, 그래서 이회택, 차범근 시절부터 지금의 손흥민, 이강인 시대까지 한일 축구의 역사를 관통하는 그였기에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본은 당연하고, 한국 축구에도 관심이 대단히 많으며 조예 역시 깊은데, 70년 역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한국 선수는 누구입니까."

"혹시... '김진국'이라고 아시려나요?" 당연히 '차붐' 차범근의 이름이 거론될 줄 알았으나, 의외의 네이밍이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아마도 요즘 독자들에게는 대단히 생소하겠으나, 한국 축구의 역사를 거론하는 데 있어 절대 가벼이 여겨선 안 될 이름 석자다. 축구 명문 경신고등학교를 졸업해 1980년 차붐의 뒤를 이어 독일 리그에 진출한 한국인 2호 코리안 분데스리거였다. 과거 지동원과 백승호 소속 팀으로도 국내 팬들에게 잘 알려진 SV 다름슈타트와 보르마티아 보름스에서 1982년까지 활약했다. 

다소 의외로 여겨진 답변에 이유를 물었더니, "대표팀 축구에서는 김진국이 차붐보다 나았지. 특히 한일전에서는 더욱 그랬어. 우리랑 붙을 때마다 공포의 대상이었지. 워낙 빠르고, 운동량도 대단했어. 운동장 구석구석 그의 발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국 선수로 치면 박지성과 비슷한 스타일이라고 그는 첨언했다. 

2003년 MBC꿈나무축구재단 이사로 재임, 2018년부터 이사장을 맡고 있는 '원조 쌕쌕이' 김진국은 그야말로 당시 일본 축구의 경계 대상 1호였던 셈이다. 이후 박경훈, 변병주, 서정원, 김대의, 이천수, 최태욱, 문선민, 황희찬 등까지 K리그와 한국 축구를 수놓았던 수많은 쌕쌕이들이 존재했지만, 그 쌕쌕이들의 아버지 격인 김진국처럼 일본을 묵사발냈던 존재는 그때가 유일하고, 지금도 무이하지 싶다.

한국 축구의 '전설의 시조새 윙 플레이어' 김진국 이사장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니시무라 부회장은 가슴이 벅차 오르듯, "차붐도 물론 대단했지. 그런데 멕시코 월드컵 무렵의 김진국은 정말 대단했어. 요즘 세대들은 모르겠지만, 정말 전설적인 한국 축구의 영웅이야. 팬심으로 언젠가 꼭 만나보고 싶어"라며 한껏 달뜬 모습을 보였다.
 
20년 넘게 시즈오카 축구의 발전, 나아가 일본 축구의 발원지에 준하는 자부심을 지켜 나가려는 니시무라 부회장. 그리고 20년째 우리 유소년 축구의 성장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김진국 이사장. 이 둘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각자 최선을 다해 나간다면, 언젠가는 한일 유소년 축구의 원로로서 연이 닿을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해보며 그와의 소중한 자리를 파했다.

글=임기환 기자(lkh3234@soccerbest11.co.kr)
사진=베스트 일레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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